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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응접실

풍크툼/어떤옷장

by 고요의 남쪽 2010. 5. 30.

「어떤 옷장」

김승일|시인

1

옷장 속에서 작은 아이들은 꿈을 꾸며 가장 작아진다. 김행숙「옷장의 보석」부분
옷장 안에는 옷 대신 겨울 이불이 쌓여 있어. 나는 로켓이 불을 뿜길 기다리고 있지. 이불장이 마구 흔들리고 드디어 우주에 다다른 순간. 옷장 밖으로 이불이 다 쏟아진다. 이불을 마구잡이로 흩뜨려놓고 나는 그 밑으로 기어다녀. 이불 밑에 내가 있고 내 밑에 이불이 있지. 이불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방 안 전체가 이불장이었으면 좋겠어. 겨울 이불의 빳빳한 냄새를 맡으면서 나는 이불 세 장에 짓눌려 있다. 공기가 희박한 이불바다에서 나는 땀을 철철 흘리고 있지. “또 이불을 다 꺼냈구나. 나프탈렌 냄새는 몸에 나빠.” 엄마는 이불을 다시 집어넣으라는 벌을 내렸지만. 나는 너무 작아서 이불을 들어 올릴 수가 없다. 나는 종종 이렇게 작아지곤 해. 엄마가 저녁상을 차릴 때는 접시보다 작아져서. 나는 그냥 식탁 앞에 앉아 있다. 너무 작으니까 아무 일도 할 필요가 없어.
1월에 공포영화를 보고 나서 그해 여름까지 매일 밤 무서워서 대성통곡을 한다. 어차피 같이 죽을 텐데 옆에 사람이 있고 없고는 위로가 안 되고. 식음을 전폐한 채 삐쩍 말라가면서 나는 옷장 안에 숨어 있지. 옷장 안에는 세탁소에 갔다 온 옷들이 비닐도 벗지 않고 걸려 있어. 옷들이 전부 사람이면 좋겠다. 내 방이 옷장이고, 우리 집이 옷장이고, 우리 마을이 옷장이라면. 수만 명이 옷장에서 부둥켜안고. 나는 그중에서도 맨 구석에 숨어 있어. 귀신이 옷장을 열고 차례차례 죽이는 동안. 나는 제일 구석에서 내 차례를 기다릴 거야. 내 차례가 오려면 아직 한참 남았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낮잠을 잔다. 세탁소 비닐들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꿈을 꾸며 마지막에 죽는다.
그러나 내 방은 커다란 옷장이 되는 대신 커다란 옷장 여덟 개가 차지하고 있어. 우리 집엔 옷도 별로 없는데 왜 이렇게 옷장만 많은 걸까? 기역자로 니은자로 디귿자로 옷장을 배치하면. 옷장은 벽이 되고 벽은 미로가 되지. “며칠 있으면 옷장 두 개를 버릴 거란다. 그러면 네 방도 넓어질 거야.” 하지만 옷장보다는 차라리 책장을 버리고 싶어요. 책은 옷장에 넣어도 되잖아. 옷장 안에서 책을 보다가 미로 위에서 잠을 자도 좋을 것 같애. 친구들이 나더러 옷방에서 잔다고 놀려댄다면. 걔들이 뭘 모르는 거지. 너희들은 옷방에서 안 살지? 그것참 불쌍하구나. 옷방의 구석은 그늘이면서 옷방은 커다란 바람막이다.
아빠가 나를 옷장에 가둔 날. 옷장에 빗장이 걸리고 나는 옷장 안에서 울고 있다. 아까 전에는 억울해서 울었어. 지금은 옷장에서 나가기 싫어서 우는 척을 하고 있지. 한참 낮잠을 자고 일어나보니 저녁 먹을 시간이 지난 것 같다. 옷장 안에선 배가 덜 고픈 것도 모르고 아빠는 나를 굶기고 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겠지? 옷장에서 안 나가면 학교에 안 가요. 학교에 안 가면 개근상을 못 받아요. 결국엔 아빠가 사과할 거야. 나는 옷장 안에서 문이 안 열리도록 꽉 잡고 있다. 옷장 속의 어둠은 싫지 않지만 그래도 작은 스탠드가 하나 있어서 나쁠 건 없지. 옷장 옆에 냉장고가 붙어 있어서 식량 조달이 가능하다면? 옷장이랑 냉장고 사이에 터널을 뚫는 거야. 이렇게 몇 가지 요건만 갖추어지면 옷장에서 사는 것도 꿈은 아니다.

2

왜 아이들은 옷장 속으로 들어가는 것일까. 도둑이 들어와도 옷장 속에 숨고 전쟁이 일어나도 옷장 속에 숨는다. 내가 내 딸과 숨바꼭질을 하면 너는 백이면 백 옷장으로 들어가지. 아까도 옷장에 숨었잖아 왜 또 옷장에 숨니. 누굴 닮아 저렇게 단순할까? 만약에 전쟁이 터져서 군인들이 우리 집에 들어온다면. 절대로 옷장엔 숨지 마. 군인들은 옷장부터 열어본단다. 나는 단단히 주의를 준다. 세탁기에도 숨으면 안 돼. 군인들은 세탁기부터 열어보니까. 냉장고는 말할 것도 없지. 군인들은 배가 고프거든. 지하철을 타고 남태령을 지나가면서 나는 아이들한테 설명해준다. 남태령에는 방공호가 있어. 전쟁이 터지면 대통령이 여기 와서 숨는단다. 방공호 안에는 2년 동안 먹을 수 있는 식량이 있어. 통조림이나 훈제 소고기겠지. 아이들은 칭얼거리지도 않고 잘 듣는다. 전쟁이 터지면 기필코 남태령에 와서 숨겠다고 다짐한다. 아이고, 이 녀석들아! 너희도 생각이란 걸 하고 살아라. 당연히 군인들이 방공호부터 공격 할 텐데. 거길 들어가겠다고? 그러면 어디 숨어요. 집에 있으면 지붕 위로 폭탄이 떨어지고. 방공호에 있으면 제일 먼저 수색당하고. 차라리 옷장에 들어가서 낮잠 자다 죽을래요. 가스가 터져서 불이 났다고 한다. 누전이 돼서 불이 났다고 한다. 애들은 옷장 속으로 들어가서 서로 껴안고 죽었다고 한다. 옷장 속에서 작은 아이들은 꿈을 꾸며 가장 작아지고. 나는 애들을 구하러 달려가는데. 애들은 이미 손톱의 때보다도 작아져서 찾기가 쉽지 않아. 얘들아 어디 갔니? 어디 갔어? 어디 있어?
숨바꼭질을 하면서. 딸은 또 옷장 속으로 들어갔는데. 나는 침대 밑을 확인하고, 냄비 뚜껑을 열어보고, 서랍을 당겨본다. 내 딸을 잃어버리고 말았구나. 내가 옷장 앞에서 우는 척을 하면. 딸은 옷장 밖으로 나와 자지러진다. 한 번만 더 하자면서 딸은 다시 옷장 속으로 들어가고. 나는 또 딸을 잃어버린다. 그리하여 내 딸은 살인마가 쫓아와도 옷장에 숨을 것이다. 핵폭탄이 떨어지고 외계인이 침공해도 옷장 속에서. 실연을 당하고 사춘기를 겪어도 옷장 속으로. 딸은 더 깊숙이 들어가고 나는 더 많이 잃어버릴 것이다. 모든 것이 지나간 다음. 자지러지면서 옷장 밖으로 나올 때까지.

3

작아져서 살아간다는 것은 잠깐 작아지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야. 사람들은 말하지. 옷장 속에서 살고 싶으면 인내심을 길러야 할 거라고. 당신은 작아진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를 못 하는군? 옷장 속에서 아이들은 한 나라의 주인이 된다. 나는 아직 어린데 이렇게 큰 나라를 어떻게 다스리란 거지? 하지만 대개 운명이 그렇게 정해져 있는 법이야. 화살 한 방에 허무하게 죽는 것도 운명은 운명이니까. 아이들은 운명 속에서 작아지는데. 말을 타고 저 끝까지 뛰어가면 가도 가도 끝이 안 나고. 그래서 아이들은 끊임없이 가장 작아지는데. 여기서 인내심이 무슨 소용이니?
옷장의 결들은 수많은 얼굴이었어. 손가락으로 하나씩 윤곽을 그려주었지. 다 그릴 때까지는 밖에 나가지 말자. 나는 그렇게 다짐했던 것인데. 그러다 스르르 낮잠에 빠지기라도 하면 나는 어떻게 될까? 며칠 있으면 옷장 두 개를 버릴 거라고. 엄마는 그렇게 상상해본다. 옷장을 버리면 옷장은 무엇이 될까? 옷장 안에 있는 내 아들은 무엇이 될까? 어떤 옷장을 버릴지 아직 결정하지도 않았으면서. 그녀는 꿈을 꾼다.

 

* 김승일|시인, 「어떤 옷장」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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