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일단 이 글쓰기를 이 정도에서 마무리를 해야겠다. 제목이 ‘대동강’인데 제목과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 나왔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다른 제목으로 다시 새롭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가져와야겠다. 그것이 나를 위해서나 독자를 위해서나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무엇이든 나를 더 이상 배반하기 전에 관계를 청산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해 보니, 그런 배반은 이미 글쓰기의 초엽부터 짐작이 되던 것이었다. ‘적두병’과는 달리 ‘대동강’에는 시작부터 어떤 증오심과 혐오감이 먼저 자리를 틀고 있었다. 그 소재 자체가 배반적인 아우라를 담아내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이 글은 ‘배반’으로 끝을 맺어야 할 것 같다.
모든 배반에는 냄새가 있다. 그것은 무색무취의 것이 절대 아니다. 배반을 당해본 경험이 있는 자들은 모두 그것을 안다. 배반하는 자들에게는 악취가 난다. 그들은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향수를 뿌리고 다닌다. 공자가 말한 교언영색(巧言令色) 같은 것이 그것이다. 교언영색에도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먼저 다가와 친절을 베풀어 마음을 산 후 때가 오면 더 큰 댓가를 요구하는 행태가 있고, 은근하게 신뢰감을 주는 스타일로 행세하며 자신을 돕거나 따르도록 하는 행태가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많이 다른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집단 내의 모두에게 환대받고 싶어하는 심리가 특별히 강하고, 이기적이며, 때가 오면 언젠가는 자신의 이득을 위해 남에게 상처를 주며 배반을 한다는 것이다. 사람을 진정성 있게 사귀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서만 보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그들의 행태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는 늘 배반의 악취를 맡게 한다.
그러나, 꼭 그렇게만 볼 수도 없는 일이다. 그들을 그렇게 만드는 것도 역시 주변의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배반을 당하는 자는 반드시 자기 안에 배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배반을 부른다. 내가 먼저 상대를 배반하지 않으면 상대도 나를 배반하지 않는다. 절대 이유없는 배반은 없다. 그런 자들이란 것을 알았든 몰랐든 그들을 가까이 한 것은 그들을 인정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므로 상황에 따라 그 인정을 철회하겠다는 것은 그들 입장에서는 역시 자신에 대한 배반인 것이다. 세상 이치가 그런 것이다. 그 이치는 물론, 인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동물이든, 사물이든 모든 것들은 나를 따라 배반할 뿐, 자신이 먼저 배반을 저지르지 않는다. 그렇게 봐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인간에 대해 절망한다는 것은 자신 역시 인간들에게 절망감을 주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백보를 양보해도 적어도 한 번은 그랬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외가 없는 원칙이다.
‘대동강’이란 상호가 어떤 이율배반감을 선사했다는 것이 이번 글쓰기의 한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앞에서도 밝힌 바가 있다. 이율배반이란 무엇인가? 서로 배반하는 두 가지 원칙이 지배한다는 것이다. 나는 ‘대동강’이라는 상호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탈북자 김 아무개가 그 이름으로 체인점을 열었을 때나, 대를 물린 오래된 음식점이면서 이북 음식 전문점으로 호가 난 식당의 자생적인 상호에서는 그런 느낌을 받지 않았었는데, 문득 중화요리를 파는 반점들이 우후죽순처럼 그 상호를 달고 나왔을 때 문득 무엇인가 이율배반적인 어떤 것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염이 들기 시작했다는 것이 내 소견이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한 번 생각해보자는 것이 이 글이 쓰여지게 된 동기였던 것이다. 물론, 잘 되지 않았다. 사람이 신이 아닌 한, 그가 하는 일의 동기와 결과는 서로 다를 수 있다. 이 글쓰기도 그러한 동기와는 너무 멀리 가 있다. 그것도 배반이라면 배반이다. 대동강은 물론이고 우리 사회의 이율배반적인 것들에 대해서 제대로 고찰하지 못했다. 그저, 옛은사를 영감이라 부르며 욕하고, 친구를 매도하고, 내 고장과 직장 동료들을 헐뜯고, 그래서 지나간 추억들을 평가절하하는 일에만 몰두했다. 스스로 사랑하는 것을 혐오한다는 이율배반적인 태도를 보였다.
생각해 보니, 그동안의 모든 것은 순전히 내 기분이었다. 그러므로, 대동강을 상호로 쓰는 것에 무슨 잘못이 있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세상에 그런 것이 어디 대동강뿐이겠는가. 그것 아니더라도 세상은 이율배반적인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교중 미사 때 신부님으로부터 또 한 번 성 아우구스틴의 이야기를 들었다. 삼위일체와 관련된 이야기였다. 그가 삼위일체와 관련된 저술을 하고 있을 때였다. 본성에 있어서는 같고 위격에 있어서는 서로 다른 성삼위를 이성적으로 어떻게 풀이할 것인가를 고민하며 바닷가를 산책하고 있을 때였다. 한 어린아이가 모래 구덩이를 파고서는 거기에다 두 손을 모아 바닷물을 퍼담고 있었다. 아무리 퍼담아도 여전히 모래 구덩이 안은 텅 비어 있엇다. 물은 빠지고 남아 있지 않았지만 아이는 쉬지않고 바닷물을 퍼담고 있었다.
“아이야, 네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아니?”
성 아우구스틴이 물었다.
“그럼요. 바닷물을 퍼담고 있는 것이죠. 언젠가는 저 바닷물을 모두 다 이리로 퍼담을 거예요.”
아이가 능청스럽게 답했다.
“그게 가능한 일이겠니?”
성자가 기가 막혀서 또 물었다.
“언젠가는 되겠죠.”
아이는 여전히 그를 내려다본다.
“그건 불가능하단다. 세상에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걸 너는 모르는구나.”
성자가 약간 짜증이 났다. 아무리 어려도 그것 정도는 알 나이다 싶었다. 그러자, 아이가 피식 웃었다.
“그럼, 신부님이 하는 일은요? 신의 일을 인간의 머리로 해결하려고 끙끙거리는 신부님이 하는 일은 그럼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인가요? 제가 하는 일은 신부님이 하는 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걸요.”
성자가 아차 싶어 고개를 숙이는 순간 아이는 자취를 감추었다. 대충 그런 내용이었다. 신부님은 누가 지어낸 이야기이니 그 이야기 자체를 믿지는 말고 그 뜻을 새기자고 덧붙였다. 인간의 머리로는 설명되지 않는다고 했지만,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되고 신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것이 종교가 아니겠는가. 앞서 인용한 한 글에서 폭력은 어디까지나 인간과 관련된 한에서만 폭력이라고 한 내용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신도 반드시 인간과 관련된 한에서만 신일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과 하나 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노시스교도(영지주의자)가 아니더라도 그 정도로는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동안 내가 ‘대동강’의 이율배반에 대해 쓰고 싶었던 것도 성 아우구스틴의 경우처럼 ‘인간의 머리로는 할 수 없었던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동강’이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이리저리 무작위로 모든 아버지적인 것들을 나열하고, 그 아버지 안에서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를 통해서 무엇인가를 찾아보고자 했던 것은 애당초부터 실패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아버지 안에 있으면서 아버지를 그려보겠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이겠는가?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나를 있게 한 장본인이다. 내가 그를 증오하거나 동경하거나 부인하거나 추인하거나 모두 아버지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일 뿐이다. ‘대동강’은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는 수많은 아버지의 기호 중의 하나다. 아버지 그 자체다. 그런 생각이 든다.
여기까지 일단 쓰기로 한다. 머리를 식힌 후 다음 제목을 골라서 또 글을 써야겠다. 당분간은 ‘세상의 악을 없애시는 주님’께 좀더 의지해야겠다.
추신 : 지금까지 쓴 내용 중에서 독자에게 설명이 안 된 부분이 있어서 보충한다. 한 때 연애담을 섞어 길게 한 번 늘여볼 생각도 있어서 일부러 그렇게 둔 것이었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아 간단한 설명을 붙이는 것으로 대신할까 한다. <여왕과 나>에서의 추억을 소개할 때, “좌현 1등석을 고정석으로 만든 것은 나였다.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도 물론 나였다. 일단 전화기에 가까이 있을 수 있었고, 음악실 앞이라 밝은 게 좋았다. 주로 다방에서 책을 보고 글을 쓰던 나에게는 조명도 중요했다. 나중에는 그 안에 들어가서 음악을 틀어주는 아가씨 때문에 그 자리를 비워둘 수 없었다.”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그 ‘음악을 틀어주던 아가씨’가 지금의 내 아내다. 왜 그 자리를 비워둘 수 없었는지 그러면, 다소 이해가 될 것이다.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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