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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응접실

[스크랩] 대동강(18)

by 고요의 남쪽 2010. 5. 31.

18.

사랑과 폭력. 그러니까 지금 나는 그 두 얼굴과 대면하고 있는 셈이다. 그 두 개의 얼굴은 모두 내 안에 있다. 대동강이든 무대생활자든 시골쥐든 대구든 그것들은 모두 내 얼굴들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내 사랑과 내 폭력과 내 젊은 날과 내 늙은 날과 내 우정과 내 배신과 내 용기와 내 비굴과 내 정성과 내 안일을 모두 가진 것들이다. 부정할 수 없다.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고 해서, 그것이 범법이라는 공증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주변 일을 이런 글쓰기에 담아내는 것은 폭력이다. 그런 차원이라면 직장 내에서의 악에 대해서 쓰는 것도 폭력이다. 그것 아니더라도, 모든 위안에 대적하는 것들은 폭력이다. 왜 나의 고통을 타인에게 전이시켜야 하는가, 그것은 폭력이다. 내 글쓰기의 출발점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쓰지 않기로 했다. 다만, 폭력 그 자체에 대해서는 알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것들을 우리 주위에서 사라지게 하기 위해서.

 

폭력이라는 말은 두 개의 음절, 즉 ‘폭’이라는 음절과 ‘력’이라는 음절로 이루어져 있다. 사전은 각 단어의 뜻을 풀어서 폭력을 ‘난폭한 힘’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힘이 난폭하다는 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 ‘폭’자가 접두사로 붙어 있는 말들을 생각해 보자. 술이나 그 밖의 음료를 지나치게 많이 또는 빨리 마시는 것을 ‘폭음’이라고 하고, 음식을 지나치게 많이 먹는 것을 ‘폭식’이라고 하며, 비가 지나치게 많이 내리는 것을 ‘폭우’라고 하고, 자동차나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달리는 것을 ‘폭주’라고 한다. 이와 같은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일단 ‘폭’이라는 접두사는 ‘정도가 지나침’을 표시한다. <중략>

우리는 앞에서 몇 가지 중요한 논점들을 확인했다. 첫째로 폭력은 파괴를 수반할 수 있는 강렬한 힘이다. 둘째로 그렇기 때문에 폭력은 두려운 것이지만, 경험과 적응 여부에 따라서 그 강렬함의 정도와 두려움의 정도는 달라질 수 있다. 셋째로, 그렇기 때문에 폭력의 폭력성을 결정하는 것은 폭력의 사용자가 아니라 폭력의 대상이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하자. 폭력은 어디까지나 인간과 관련된 것이다. 왜 그럴까? [공진성, 『폭력』 중에서]

 

모든 것은 폭력에서 출발한다. 규정이나 기준이 존재하기 전에는, 모든 시초는 항상 ‘정도의 지나침’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르네 지라르는 ‘초석적 폭력’이라는 말을 써서 최초로 제도를 만드는 폭력을 개념화하기도 했다. 그래서 무엇인가 시작을 꿈꾸는 인간은 항상 폭력의 유혹을 받는다. 시작을 꿈꾸는 자들만이 아니다.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싶은 자들, 남들보다 더 좋은 것을 가지고 싶은 자들은 항상 그 유혹에 시달린다. 그리고 그 유혹 때문에 파멸한다. 그래서 모든 파멸하는 것 뒤에는 항상 폭력의 유혹이 있다.

나는 내 경험에 의거해서, 폭력에 쉽게 노출되는 자들은 틀림없이 ‘아비 없는 자식’들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존이든 역사든, 아비 없이 큰 자들은 언제나 폭력에 쉽게 노출된다. 자기가 시작이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다 보면 폭력과 손잡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주위의 사람들과 동물들과 사물들에게 고통을 준다.

글쓰기에서도 마찬가지다(이 글쓰기, 「대동강」도 예외가 아니다). 좀 딱딱하지만, 소설 이야기를 조금만 해보자. 아버지는 아들의 영원한 숙제다. 정체성 서사를 화제로 삼는 모든 소설에서 부자유친(父子有親)이 문제적인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아비 없는 자식’으로는 그 무엇으로도 행세(行勢)할 수 없는 세상에 사는 자들은 <아버지는 나에게 무엇이었던가>라는 물음으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다. 그것은 거의 운명이다. 특히나, 어디서든 ‘행세하고 싶은 자’들은 반드시 그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풀어내야만 한다. 그래야만 자신이 바라는 바, 스스로 또 하나의 ‘아버지’로, ‘이름’으로, 설 수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이름’으로 존재한다면, 어머니는 ‘몸’으로 존재한다. <어머니의 몸>은 세상의 아버지들이 법과 규율과 명분과 도덕의 이름으로 재단(裁斷)한 것들을 한데 모은다. <이름>이 배제와 분열이라면, <몸>은 포용과 합일의 세계다. 소설 『주홍글자』나 영화 『글루미선데이』는 그런 의미에서 모두 <어머니의 몸>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것들이다. 세상의 구원이 어디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가를 그것들은 보여준다.

『선택』과 「개흘레꾼」은 조금 다르다. 그것들은 잘못된 <아버지의 이름>을 바로잡기 위해 <어머니의 몸>을 선택하기보다는 또 다른 ‘진정한’ <아버지의 이름>을 찾아나서는 소설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 소설의 내포작가(화자주인공)들은 어머니의 아들(딸)이 아니라 아버지의 아들(딸)이다. 그들 작가들이 찾아낸 아버지의 ‘진정한 이름’은 ‘(퇴계의)적전(嫡傳)을 이으셨다 할 만한 선비’와 ‘개흘레꾼’이었다.

『선택』과 「개흘레꾼」은 진정한 아버지의 이름을 찾아나서는 방법과 태도가 각기 다른 소설들이다. 그 차이점이 바로 두 작가의 현실인식이 드러내는 간극의 실체이다. 그 간극이 멀면 멀수록 우리의 환부도 깊어진다. 이 두 소설이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 문제적인 것은, 그들이 다루고 있는 주제가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보혁대립구도의 한 단면을 여실히,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데 있다. 그들이 추구하는 부자유친의 미학이, 비록 그 결말은 동일한 지점을 지향한다 하더라도(아버지를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출발점과 그 과정이 너무나도 상반되어 있다는 것을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이 소설들은 여전히 문제적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 ‘아버지’들은 이미 뜬금없이 한 많았던 이 세상을 떴건만, 그들 없이는 홀로 설 수 없었던 애비 없이 큰 아들들(처자를 두고 월북한 애비나 제대로 애비 구실을 못했던 애비도 역시 ‘없는 애비’다)의 속절없는 ‘애비 타령’ 때문에 아직도 구천을 헤매는 형국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각설하고, 토요일 혼배 미사에 참여했다가 신부님에게 들은 이야기를 하나 소개하는 것으로 이번 글을 마감해야겠다. 요지는 이랬다. 정부의 지원을 받아 2천명이 넘는 영재아들을 연구했던 한 학자의 연구결과다. 수십 년을 추적 조사한 결과, 머리가 좋거나 재능이 뛰어나다는 것은 한 인간의 행복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는 것을 그가 밝혀냈다는 것이다. 그의 조사가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시기, 즉 인류가 큰 격동기에 처해 있던 시절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변수가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도 공감이 가는 연구결과였다. 그러면 한 인간의 행복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무엇이었던가, 그 연구는 ‘부모의 역할’이었다고 적고 있다. 부모가 어떤 사람이었는가가 한 인간에게는 가장 중요한 행복의 조건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부님은 새로 가정을 꾸리는 두 사람에게 ‘좋은 부모’가 될 것을 권면했다. 좋은 말씀이었다. 아이들에게 ‘폭력적인 아비’로 각인되어 있을 것이 분명한 나에게도 크게 반성을 요구하는 권면이 아닐 수 없었다.

출처 : 시골무사 소설 무자수업
글쓴이 : 시골무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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