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대구가 사랑이 부족한 것은 죄의식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사람이든 땅이든 죄를 지은 자는 다리 뻗고 마음 편히 잘 수가 없는 법이다. 대구에 사고가 많았던 것을 두고 다른 지역 사람들이 그렇게 수근거렸다는 소문이 돈 적이 있었다. 그렇게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사랑을 할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더 악해 지고 뻔뻔스러워지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대구에서 사는 사람으로서, 그곳을 고향으로 여기며 아이들도 모두 거기에서 세계로 내 보낸 사람으로서, 정말 가슴아팠다. 왜 그런 말을 들어야 하는가?
“어디든 다 그래. 사람 사는 데가 어딘들 아수라 지옥이 아니겠어?”
젊어서 국책 연구기관에 근무하다가 사십이 되어 지금 직장으로 옮긴 동료가 말했다. 나와는 속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편이었다. 그는 옛 직장에서 노조를 결성하다가 안 해도 될 모진 경험을 했다. 사람이 진중하고 신의가 있다 보니 모두 그를 위원장으로 추천했다. 그리고는 등을 돌렸다. 이를테면 나무 위에 올라간 그를 두고 모두 자리를 뜬 것이다. 나중에는 아무도 그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위에서 압력이 내려오니까 모두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탈퇴 각서를 쓰고 말았다. 은근히 그를 희생양으로 삼고자하는 분위기까지 있었다고 했다.
“그 이후로는 절대 남들 앞에 안 나서기로 작정했어. 인간은 못 믿을 존재야, 절대루.”
그렇게 말하고선 또 실수를 했다. 연전에 교수협의회 회장을 맡았다가 큰 곤욕을 치렀다. 본디 회장에 출마했던 교수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출마자와 같은 과의 원로 ‘무대생활자’가 자기가 인정할 수 없는 사람이 회장에 출마해서는 안 된다고 한 시간 가까이 단상에 올라 횡포를 부리는 바람에 사퇴하고 그를 자기 대신 추천하는 바람에 엉겁결에 맡은 자리였다. 마침 총장 선거가 다가오고 해서 몇몇 뜻있는 젊은 교수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총장 선출제도를 발전적으로 개선하자고 제안했다가 테러를 당했다. 외부 인사를 대폭 참여시킨 총장선출기구를 만들자고 한 것인데, 그것이 자기들에게 불리할 것으로 판단한 ‘무대생활자’ 중 한 명이 그의 연구실로 찾아가 횡포를 부린 것이다. 큰소리로 쌍욕을 하고 연구실 문을 발로 차는 등 있을 수 없는 폭력을 행사한 것이다. 그렇게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서 다른 교수들에게도 노골적으로 압박을 가하는 바람에 그의 제안이 과반수의 동의를 얻는 데 실패하고 그도 회장직을 사퇴하고 말았다.
그는 그 이후로 학내에서의 모든 정치적인 입장을 철회하고 산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다. 어떻게 보면 시골쥐로 사는 법을 터득한 것인지도 몰랐다. 북쪽으로 한 시간 거리에 주말 농장을 만들어 틈만 나면 거기 가서 농사를 짓는다. 퇴직하면 그곳으로 아예 이사를 가겠다고 했다. 대구에서는 살지 않겠다는 것이다.
지금의 직장이 대구의 모든 부정적인 측면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데 그와 나는 서로 공감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이 다르다. 그는 포기하자고 한다. 어쩔 수 없으니 그냥 받아들이라고 한다. 시골쥐로 살면 될 것을 왜 마음 고생을 사서 하느냐고 한다. 나는 그런 그가 좀 안쓰럽다.
“그렇게 살아서 뭣 하게? 그렇게 살면 나중에 만족이 될까? 헛살았다는 느낌이 밀려들면 그땐 어떡할려고.”
나는 그렇게 말했다. 물론 그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지금 직장 생활이 생활의 거의 전부다. 본디 서울쥐인 그로서는 직장 안에서의 삶을 극단적인 투쟁으로 몰고 갈 수가 없다. 그럴 힘도 실익도 없다. 모두들 가만히 있는데 왜 그만 나서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 또 한 번 곤욕을 치를 엄두도 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이 취할 도리가 아니다. 악을 방치하는 것은 악을 저지르는 것과 같다. 내가 지금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이른바 글쓰기의 초심으로 돌아가고자 하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목숨을 걸고’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던 때가 있었다. 그때로 돌아가겠다는 것이다.
머리도 식힐 겸, 미셸 투르니에의 글에서 또 한 편을 인용해 볼까 한다. 귀신 나오는 집에 관한 글이다. 지금의 직장이 나에게는 이를테면 ‘귀신 나오는 집’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그 귀신들이 혹은 내 행실(무의식)의 소산은 아닐까라는 반성도 들기도 한다. 그 판단은 물론 이 글을 다 읽은 뒤에 독자들이 할 몫이다.
귀신 나오는 집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재미있는 이야기 거리에 속한다. 영화 『천녀유혼』의 난약사, 『귀신이 산다』의 헐리게 되는 2층집 같은 것은 근자에 나타난 ‘귀신 나오는 집’의 대표적인 예가 된다.
위의 두 경우는 귀신이 사는 집에 인간이 침입한 것 때문에 벌어지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주 내용이고, 주제는 하나같이 권선징악(勸善懲惡)이다. 그래서 ‘귀신은 무섭지만 선한 인간을 돕는다’라는 도식을 만들어낸다. 귀신이 우리 마음속에 그 거처를 두고 있다는 증거 중의 하나가 바로 그것이다. 전문가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본디 귀신은 절대로 사람을 돕지 않는다. ‘원귀(寃鬼)’가 그것의 본질이다. 그런데, 영화는 꼭 그것들의 개과천선을 말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무서운 것을 피하려는 인간의 보편적인 심성에 아부하는 것이다.
귀신 나오는 집(콩트 구상). 옛날에 한 상인이 살았다. 그는 이스파한에 자리를 잡고 장사를 하고 싶었다. 그는 그 도시 안에서 팔려고 내놓은 집들을 여러 군데 찾아가 본다. 그 중 한 집이 위치나 규모나 내부 구조로 보아 다른 모든 집들보다 월등하게 나아 보인다. 그런데 그 집이 어디로 보나 그보다 훨씬 못한 다른 집들보다 값이 엄청나게 싸다는 사실을 알고 상인은 너무나 놀라게 된다. 의외의 사실에 놀라워하는 그를 보자 안내해 갔던 중개인이 그 집은 귀신 나오는 집으로 앞서 살던 집 주인 셋이 다 포기하고 떠나버렸다고 설명해준다.
속 시원히 사정을 알고 싶어 이 상인은 그 전 주인들을 찾아가 그들의 증언을 들어본다. 1. 이 저주의 발단인 첫 번째 주인의 이야기. 2. 두 번째 주인의 이야기. 3. 세 번째 주인의 이야기.
그런데도 상인은 집을 사기로 결정하여 그 집에 자리 잡는다. 그는 그 집의 수수께끼를 밝혀내고 저주에 종지부를 찍는 데 성공한다. 모든 것에는 그 집 네 주인들의 과거와 현재의 삶이 긴밀하게 뒤섞여 있는데, 결국은 마치 정신분석 치료와 같이 마감된다. 요컨대 문제의 귀신 나오는 집을 역대 주인들의 병들고 객관화된 무의식으로 간주하여 다루는 것이 핵심이다. 처음 세 주인들은 노이로제를 치료하기 위하여 기껏 이사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반면에 네 번째 주인은 캄캄한 방의 열쇠를 찾아낸 것이다.
[미셸 투르니에 / 김화영, 『외면일기』 중에서]
귀신의 출처를 죄의식에서 찾는다. 정신과에서도 죄의식이야말로 모든 병마(病魔)의 원인으로 대접받는다. 그 이론에 따르면 병마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뻔뻔하게 살기, 절대로 남에게 은혜를 베풀지 말기, 준 것보다 항상 더 받기, 공짜 피하지 말기, 잘 되는 놈 그냥 두고 보지 않기, 정의든 선이든 앞장서지 말기’ 등등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니, ‘대구에서 사는 법’을 터득한 사람들에게 그렇게 살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곧 그에게 병마에 시달리라고 악담을 하는 것과 다른 없는 일이다. 그러나, 병 없이 살겠다는 그 마음이 가장 큰 병이라는 것도 이제 알 나이가 되지 않았나 싶은 것이 내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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