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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응접실

[스크랩] 대동강(16)

by 고요의 남쪽 2010. 5. 30.

16.

무대생활자니 시골쥐니 하는 팍팍한 생각들을 하다보니 사람이 더 황폐해지는 느낌이다. 괴물과 대적하다 괴물이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된다. 문제는 사랑이다. 사랑은 그 자체로 인정하는 것이다. 사건도 ‘사건 그 자체’로 보는 것, 인간도 그 생긴 대로를 인정하고 북돋아주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인간이나 사물에 대해서 어떤 태도로 임해야 되는지에 대해서 좋은 참고를 제공하는 이야기를 한 편 인용한다. 미셸 투르니에의 『외면일기』에 나오는 고양이 이야기다.

 

우리 집에서 키우는 여러 마리의 가축들 가운데서 생겨난 고양이 새끼 한 마리를 소설가 이브 나바르에게 갖다 주었더니 그는 고양이에게 ‘티포주’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것은 내 소설 『마왕』의 주인공 이름이다. 6개월 뒤 그 집에 찾아갔다 와서 나는 그에게 이런 편지를 써서 보냈다. “티포주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네. 정말이지 내가 자네에게 갖다 주었을 때는 그저 평범할 뿐이었던 그 고양이가 자네의 열성적인 배려 덕분에 보기 드문 짐승, 요컨대 예외적인 사내가 되었네 그려. 그 녀석에게는 내가 동물에게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활기, 젊음, 광채, 자신감이 넘치고 있어. 그 녀석이 때로 감당 못하게 군다 해도 그것은 바로 어떤 공허감을 메우기 위하여 자네가 그 녀석에게 기대하는 바에 꼭 맞는 만큼만 그러는 것일세.”그런 말을 적어 보내자니 우리 집 정원에서 괴물처럼 엄청난 덩치로 자라버린 코카서스 산 어수리나무를 보고 어떤 여자 친구가 한 말이 생각난다. “당신이 그렇게 사랑하니까 그렇죠. 이 나무가 그걸 아는 거예요.”

나중에 이브 나바르는 나에게 이런 말을 하게 된다. “자네는 내게 티포주를 줌으로써 내게 큰 도움을 주었네. 그러나 자네는 나한테 콩쿠르 상을 줌으로써 나를 속속들이 망쳐놓았네.” 그렇지만 나는 그의 자살에는 전혀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믿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동물이나 식물이 주인의 마음을 읽고 그에 따른 성장을 하고, 기질을 가지게 된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동물은 말할 것도 없고, 식물을 키워봐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다. 하물며 사람은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자식이나 제자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에 대해서 좋은 충고가 되는 말이다.

자식 키우기에 생각이 미쳐 한 마디 덧붙여야겠다. 세상의 어른들은 <딸을 키워본 자>와 <아들만 키워본 자>로 대별될 수 있다. 물론, 이건 편견(고약한)이다. 그러나, 아들만 키워본 자들은 반드시 한 번은 『고양이를 부탁해』라는 영화를 보아야 한다. 그래야 인간이 된다. 딸 가진 부모의 심정을 아는 데에는 그 영화만큼 좋은 텍스트가 없다. 오래 전 언젠가 가수 조영남 씨가 이 영화 다시 보기 운동을 펼쳤던 적이 있었다. 그 때 나는 그가 좋은 가수이면서 좋은 문화 운동가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나는 ‘조영남이 만난 사람’이라는 프로도 열심히 봤다. 그의 화법에 담긴 ‘인간 사랑’이 좋아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방식대로 인간을 사랑하는 모양이다. 그와 내가 ‘인간을 사랑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인정한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라는 이야기를 내 식대로 간단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상징 : 「고양이를 부탁해」는 생각보다 큰 울림을 갖는다. 스무살의, 그것도 지류(支流)에 불과한 스무살의, 대학생도 아니고, 재수생도 아니고, 연예인도 아니고, 고작 한다는 것이 집에서 하는 일을 돕거나(태희), 회사에 나가 허드렛일이나 거들며 무시당하기 일쑤거나(혜주), 그도 저도 할 일이 없는(지영) 아이들의 처지를 표상하던 ‘고양이’가, 이제 순수의 지평을 잃지 않고 유목의 삶에 가장 가까이 다가서 있는 존재들의 표상이라는 의미로 한 단계 크게 격상된다. ‘고양이’는 이제 새로운 상징이다.

인천 : 「고양이를 부탁해」는 인천을 배경으로 한다. 이제 대한민국은 서울이라는 ‘홈 패인 공간’에서 한 걸음 비켜서 볼 수 있는 나라다. 적어도 문화 상품 생산이라는 측면에서는 그렇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친구」 등에서도 부산과 인천이 주 배경이 되어 좋은 반응을 얻었다. 「신라의 달밤」의 경주, 「봄날은 간다」의 강릉도 마찬가지. 이제 서울이라는 ‘홈 패인 공간’에서 조금은 벗어나고픈 사람들이 많아지는 모양이다. 인천은 ‘인천 상륙 작전’이 이루어진 곳이고, 맥아더 장군 동상이 있는 자유 공원이 있는 곳이고, ‘중국인 거리’가 있는 곳이고, 그 유명한 ‘연안 부두’가 있는 곳이다. ‘제물포’와 ‘상인천’과 ‘인천 앞 바다’와 ‘경인선’이라는 기표들이 어우러져 하나의 애매하고 모호하고 엑조틱한 기의를 생산하는 곳이다. 그곳은 서울의 주변이기도 하고 동시에 그것에 대한 배반이기도 하다. 그 인천과 ‘고양이’를 유목주의라는 끈으로 한데 묶으려는 시도는 과연 무모한 것인가? 「고양이를 부탁해」가 인천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일종의 필연이라는 생각마저 든다(이 때 인천은 ‘도시’가 아니라 ‘사막, 혹은 바다’이다).

스무살 : 스무 살은 누구에게나 꿈이다. 꿈은 꿈꾸는 자의 격(格)에 따라 용꿈big dream도 되고 개꿈little dream도 된다(고양이 꿈cat dream은 없나?). 용꿈은 집단의 운명에 관계되고 개꿈은 개인의 실존에만 관여한다. 스무살의 꿈은 언제나 그 두 영역을 넘나든다. ‘홈 패인 공간’의 운명 속에서 ‘매끄러운 공간’을 꿈꾸는 것은, 어느 경계에서 용꿈이 되기도 하고 개꿈이 되기도 한다. 그 경계는 너무 아득해서 가끔씩 우리를 절망케 한다. 그러나 그것을 피할 수는 없다. 우리가 그 경계를 넘어서고 싶을 때, 이미 우리는 개꿈 속으로 진입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스무 살은 모두 개꿈이란 말인가?).

 

『고양이를 부탁해』는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라는 존재, 딸이라는 사회적 위치가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영화다. 나는 그 영화에서 나의 외연(내포가 아니다)이 적지 않게 확장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만큼 <남성/여성>에 관해서는 한참을 수준 미달로 살아왔었다는 이야기다.

다시 본 주제로 돌아가자. 우리의 주제는 사랑이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의 삶은 바람 빠진 풍선이라는 것이 오늘 이 자리에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세상의 모든 이야기는 결국 그것을 먹고 산다. 그것이 이야기의 힘이기도 하다. 사랑을 ‘힘’으로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방식은 다양하다. ‘눈물’이라는 이야기로 그것을 잘 드러내는 조금은 푼수기 넘치는 이야기를 한 편 소개하겠다. 한 문학 교사의 문학을 통한 ‘인간 사랑’을 잘 보여주는 글이다. ‘인간을 사랑하는 인간의 모습’이 참으로 다양할 수 있다는 것도 느낄 수 있게 하는 글이다.

 

국어시간에 조세희의 난쟁이 연작 중 ‘칼날’이라는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 수업을 중단하고 말았다. 대학을 갓 졸업한 총각 국어선생이 수업을 하다가 낙루를 하였으니 단시간에 학생들에게 소문이 퍼졌다. 티 없이 맑고 양순한 그 학생들은 나를 나약한 정신과 불안정한 감정을 가진 교사로 보지 않고 인간적 연민과 문학적 감성이 풍부한 선생님으로 받아들여 주었다. 그 이후 내게는 눈물을 흘리며 문학수업을 하는 선생님이라는 원광이 드리워지게 되었으니, 이제는 대한민국 아줌마가 되었을 그 학생들에게 축복 있기를!

그 후 대학 강단에 서서도 김종삼의 ‘앞날을 향하여’를 읽다가 눈물을 흘렸고, 박재삼의 ‘추억에서’를 강의하다 목이 메었고, 김사인의 ‘지상의 방 한 칸’을 이야기하다 교실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얼마 전에는 수업 중에 임영조 시인에 대한 추모의 글을 읽다가 울음이 북받쳐 끝을 맺지 못했다.

학문의 세계에서는 보여주지 못한 고독의 열정이 시에 대한 애호의 자리에서는 부분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워즈워스는 ‘무지개’에서 하늘의 무지개를 보며 가슴 설레던 어린날의 경이감이 늙을 때까지 지속되기를 염원하였다. 나의 경우 시에 대한 열정이 시에 처음 매혹을 느낀 10대의 사춘기로부터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지는 것이 다행스럽다. 지금도 좋은 시를 보면 가슴이 설레고 남에게 그 시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해 주고 싶은 충동이 솟구친다. [「가을 에세이, 고독」(이숭원, 교수신문, 334호)]

 

수업 중에 눈물이 흘러, 혹은 목이 메어, 수업에 지장을 받는 일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보통, 전문가들은 눈물이 없기 때문이다(혼자서는 울어도 대중 앞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어야 하는’ 것이 전문가들의 직업적 태도다). 그러나, 그건 보통의 전문가들 이야기고, 진짜 달인(達人)은 위의 인용문에서처럼 아무데서나 가리지 않고 울 수 있는 모양이다. 인간에 대한 사랑에 무슨 시간과 장소가 따로 있겠는가. 순진무구한 시심(詩心)이 유지된다는 것은 그래서 축복이다(지나친 축복도 병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양이를 부탁해』라는 영화를 수업 시간에 이야기하다가 그 말미에 ‘스무 살은 개꿈이다’라고 초를 친 나는 ‘피도 눈물도 없는 보통의 전문가’에 불과하다. 남 잘되는 꼴을 못 보는 것이 바로 보통의 전문가들이 자주 보이는 행색이다.

그러나, 그런 나도 수업 중에 목이 멘 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님을 이참에 고백하여야겠다. 기왕에 말이 나왔으니 말이다. 30대 초반 무렵, 소설 강독 시간에 이청준의 「눈길」 읽다가 한 번, 그리고 한 십년쯤 뒤, 문학개론 시간에 무슨 이야기 끝에 『중국의 붉은 별』 제5부「장정」‘대도하의 영웅들’ 부분을 설명하다 한 번, 그리고 근자에, 정규 수업은 아니지만, 검도교실에서 제자들에게(아들도 포함된) ‘허리 맞을 때 소리 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맨살 위에 시퍼런 줄이 서도록 팔로 막았다던, 돌아가신 아버지 학창시절 검도 배우던 이야기’를 전하며 (분발할 것을 촉구하다가) 한 번, 그렇게 세 번 울었다.

 

출처 : 시골무사 소설 무자수업
글쓴이 : 시골무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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