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두병(赤豆餠)
1.
"영락없이 오빠로구만!"
고모님의 그 말이 고종사촌누이와 나를 두고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고개를 돌려 사촌누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주변이 시끄럽기도 했지만 살아생전 아버지와 고모님 사이의 맥락이 언뜻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고모님이 아버지의 누이동생, 그것도 이남에서의 유일한 혈육이었던 누이동생이라는 생각이 든 것은 잠시 뒤 일이었다.
“할머니한테는 유일한 혈육이지...”
고종사촌형이 초면의 사촌형수에게 나를 그렇게 소개하는 소리를 듣고서야 문득 그 생각이 들었다. 그렇군. 고모님과 고모부님, 고종사촌 형제들, 이들이 나의 유일한 일가 친척이었다. 사촌형과는 근 40년만의 해후였지만 멀리서도 금방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렇군, 유일한 핏줄이었군. 나는 사촌누이의 얼굴을 쳐다보며 그렇게 한 번 더 속으로 되뇌었다. 누이는 여전히 쓸쓸하였고, 여전히 나를 두고 '오빠'라는 호칭을 쓰는 데 인색하였다(누이는 나를 볼 때마다 적대적이다. 그건 오랜 전통이다). 그것이 우리들 사이를 지배하던 수십 년 간의 어법적 관계였으니까 어색하지도, 서운하지도 않았다. 왜 있지 않은가? 세월이 우리를 잠식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 그래서 어색함을 무릅쓰고 무엇인가 옛것을 끝까지 고집하는 행투들 말이다. 그러나 누이의 막말은 그런 의지와는 처음부터 거리가 멀었다. 우리 둘 사이에는 그런 것들이 호사스럽게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팔순의 고모님은 이번에도 광채가 나는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연전에 마산에서 있었던 형의 혼사에 이어 두 번째다. 이번의 대구행에서도 여전하다. 손부(孫婦)가 대구 사람이어서 이번 혼사는 대구에서 치른다고 전화로 알려왔을 때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입을 벌려 웃지도 않았는데 화사한 웃음에 눈이 부셨다. 아무런 말씀이 없었지만, '조근놈 오니?' 그렇게 말씀하시고 있는 것 같았다. 제주에서는 작은놈(막내)을 조근놈이라고 부른다. 피난 시절의 친정 오라버니의 핏덩이를 고모님은 늘 그렇게 불렀다. 젊은 날의 고모님은 지금처럼 저렇게 화사하지 않았다. 어딘가 근심 한 자락은 늘 얼굴에 남기고 계셨다. 서른 살 무렵, 내가 막 전임으로 자리를 잡을 때, 우리 집에 한 번 다녀가셨을 때에도 그랬으니 아마 환갑 무렵까지는 늘 그랬던 것 같다. 그런 고모님이 20여년만에 다시 뵈었을 때는, 홀연히 화사한 얼굴로 나타났다. 나는 그 때, 대자대비 천수관음이 늙은 여자였더라면 더도 덜도 없이 딱 저런 표정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저 이상의 표정은 없다... 이어서, 우리 어머니도 살아계셨다면 분명 저런 모습이지 않았을까라고 자문했다. 까닭은 없었다. 다만 고모님과 어머니는 동갑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라는 막무가내식 억측만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 생각은 거의 환청(幻聽)의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어서 그것을 거역할 어떤 에너지도 내겐 없었다.
"그래, 니가 애를 많이 썼다."
고모부님이 손녀들의 부축을 받고 나오면서 먼저 가겠다는 나를 두고 그렇게 말했다.
"아뇨! 제가 무슨 애를 썼다구요? 누이한테 전화하고 일간 한번 내려갈게요. 고모부님, 그전 그집에 살고 계시는거죠?"
"그래, 그대로니끼니 한 번 오나라."
말씀이 어눌한 고모부님을 대신해서 고모님이 그렇게 말했다.
고종사촌형이 와서 명함을 건넸다. 그와는 다섯 살 터울이다. 홀로 서울에서 자수성가한 그는 일찍 세상을 떠난 형의 자리를 대신해서 혼주 역할로 바빴다. 서울에 가면 한 번 들르겠다고 했다.
2.
적두병 가게 주인은 30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굽는 데 20분 식히는 데 10분이라는 설명이었다. 머리가 아프다며 결혼식에 불참한 딸아이가 오후 늦게 바람을 쐬자며 졸랐다. 서문시장에 가서 만원짜리 청바지 두 벌을 샀다. 그리고는 근처에 있는 적두병 가게로 온 것이다. 문득 딸아이에게 적두병 맛을 보여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여기가 큰이모가 다닌 학교란 말이지, 딸아이는 주변 풍물에 대한 뾰족한 관심들을 드러내며 기다리자고 했다. 가게는 옛날 여고 건물 본관을 쪼개 만든 상가 한 귀퉁이에 자리잡고 있었다. 아내도 묵묵히 그 의견을 따랐다. 여기서 태어난 아내나 딸아이에게는 오랜만에 찾은 고향 동네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차를 타고 주변을 돌았다. 차 안에서 바라보는 달성공원은 누추한 몰골로 옛 모습 그대로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물색 초라한 정문 앞의 노인들, 싸구려 점집, 너절한 좌판들, 거기다가 스프링 조랑말까지...
“이동하 소설 「장난감 도시」라고 들어봤니? 여기가 그 배경인데...”
얼마 전 이번 학기 세미나에 포함되어 있다며 조셉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을 가져간 딸에게 물었다. 영어학 전공이라 기대를 하고 물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박사과정이니 혹시나 해서 물었는데 역시 모른다고 했다. 소설의 배경이 된 복개천 위의 하꼬방들은 이미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한 때는 니나노집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기도 했던 곳이었다. 그나마, 그 장난감 도시의 배후를 장식하던 옛 골목들이 여전한 것이 작은 위안이 되고 있었다.
처가가 있던 자리와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점집 골목까지 일순하고 또 몇 번의 유턴과 직진을 거듭하며 달성공원 주변을 넘나든 끝에 드디어 적두병을 마주할 수 있었다. 이미 예약을 해 둔 바였기 때문에 물건을 주고받는 데에는 별로 시간이 들 일이 없었다.
“잠깐요, 그냥 거기 서 계세요.”
딸아이가 휴대폰 사진으로 몇 장면을 담아가겠다고 했다. 적두병을 담는 가게 주인이 피식 웃었다. 30대 중반이나 되었을까? 얼마 전 직장 동료들과 함께 근처 국밥집을 찾았다가 주차장 입구에 자리 잡은 이 적두병 가게에 관심을 드러내는 나에게, 적두병은 재고가 거의 없으니 미리 전화로 주문해 줄 것을 청하던 그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작은 진열장 안에는 밤빵이랑 공갈빵이랑이 소담스럽게 담겨져 있는 한 평이 채 될까 말까 한 가게였다. 겉모습이 일본이나 홍콩의 여느 뒷골목 구멍가게 모습을 하고 있어서(딸아이의 관전평이다) 그런대로 예쁘장하다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화상(華商)의 후예가 아닐까? 어린 시절, 지금 가게 맞은편 쪽에 화교가 하던 중국집이 있었다.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진열장 한켠에 색바랜 공갈빵이 놓여있던 그 집 풍경이 그렇게 무작위로 떠올랐던 것 같다. 단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었던 집이었지만, 왠지 그 집 아들(혹은 손자?)이 여기서 대를 이어 적두병과 공갈빵을 굽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환청인양 그런 염이 물밀 듯이 쳐 들어왔다.
“잠깐만요. 두 분 이리 좀 와 보세요!”
이번에는 가게 주인이 우리를 불러세웠다. 셈을 치르고, 사진을 찍고, 차 쪽으로 발걸음을 두어 걸음 옮기고 있을 때였다. 계산이 잘못되었나? 의아한 표정을 짓는 나에게 그는 의외의 선물을 안겼다.
“다정하게 붙어 서 보세요.”
가게 주인이 발 밑 어름 어딘가에서 고색창연하게 보이는 사진기를 들어올리며 그렇게 말했다. 자바라 같은 지지대가 망원렌즈를 지탱하고 있는, 뭔가 있어 보이는 폴라로이드 사진기였다. 흑백사진이어서 더 인상적이었다. 왠지 여유가 있어 보이더니, 한 가락 하는 친구였군. 틀림없이 옛날 그 중국집 아들, 아니면 손잘 거야. 또 환청이 크게 일었다. 적두병은 생각보다 맛이 있었다. 이 정도면 경주 황남빵보다 더 나은 거 아니냐고 아내가 물었다.
“이제 할 일 없이 경주 갈 일도 없겠네.”
내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하자 아내가 그렇게 쐐기를 박았다. 심심하면 차를 몰고 경주의 황남빵 가게를 찾는 내가 아내로서는 참 역겨운 존재였다는 것이다. 무슨 일이든, 일상에서 작게 취급되는 것은 작은 것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 아내의 신조였다. 만이천원짜리를 사기 위해 삼만원을 버리는 것은 누가 뭐래도 비도덕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작은 일에 큰 의미를 두는 것이 곧 모든 정신병의 시초라는 것이 아내의 생각이었다.
3.
때도 없이 가슴이 먹먹해 지는 날이 늘었다. 새로 생긴 불안의 일종이거니 하지만 전혀 낯선 느낌은 아니다. 침대에서 혼자 눈뜨는 낮잠의 끝자락은 늘 그랬다. 그 낯설지 않은 느낌이 싫다. 굳이 그 불길함을 설명하자면 로렌 아이슬리가 『그 모든 낯선 시간들』에서 말한 ‘전혀 모른다는 것의 외로움’이지 싶다. 외로움 중에서는 아주 짱이다. 그래서 그 느낌이 더 싫은지도 모르겠다. 아주 끔찍할 때가 많다. 그러나 그럴 때면, 그가 말했던 것처럼, 그러나 아무도 듣지 못하게, “아무 것도 아니에요, 엄마, 아무 것도 아니죠.”라고 읊조린다. 그러면 조금 나아진다.
향수로 아내와 심하게 다퉜다. 타투다라는 표현을 쓰지만 사실은 일방적으로 아내에게 화를 내며 폭언을 퍼부었다는 편이 옳았다. 누구한테 선물 받았다는 건데 냄새가 역해서 사용하지 말라고 한 것을 공연히 딸아이에게 주어서 사단이 나게 했다. 재미로 집안 구석구석 여기저기 뿌리고 다닌 딸아이는 그 냄새로 역정을 내는 아버지가 보기 싫어서 일찍 새벽차로 올라갔다.
아내는 내가 예민하다고 타박을 한다. 특히 이런저런 냄새를 두고 투정을 하는 내가 미워 죽겠다는 투다. 빨랫감에 들어가는 세제류에도 곧잘 시비를 건다. 장(醬)류를 다룰 때는 아예 미리 신고를 한다. 아마 집안 내력인 모양이다. 어머니는 그림도 잘 그렸지만 냄새로 무엇이든 분간을 잘 해내었다. 어머니가 만든 음식은 우선 그 냄새부터가 좋았다. 그 생각을 하니 지금도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코끝을 맴돈다. 그런 어머니가 나에게 자신의 모습을 감춘 것은 세상을 버리기 대여섯 달 전쯤부터였다. 앓아누운 방 안으로 나를 들이지 않았다. 몰골도 몰골이지만 냄새가 안 좋으니 들어오지 말라는 거였다. 그 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가 통 기억에 없다. 그게 한 번씩 슬프다. 어머니의 그림을 내가 몇 장이나 가지고 있는지가 궁금할 때가 있어서 한 번 세어 본 적도 있다. 열두어 장? 희미하게 남아 있는 그림들조차 세월에 색이 바래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그 중에서도 어머니의 손을 잡고 달성공원 앞을 지나던 그림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어머니의 치맛자락이 내 얼굴을 가끔씩 스쳤던 것 같았고, 집세가 밀려 집주인의 가게를 우회해서 가자는 말씀을 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그래도 5원짜리 산도(샌드) 과자 하나는 입에 물었던 것 같다. 다섯 살이나 되었을까? 왜 그 그림이 가장 선명한 축에 드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어쨌든 나는 어머니의 말년을 제대로 그려낼 수 없다. 앞에서 말한 어머니의 냄새 통금령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나는 어머니가 어떻게 육신의 몰락을 이루었는지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림의 연결이 자주 끊어지는 지도 모르겠다. 임종 시 볼 수 있었던 그 뼈만 남은 앙상한 육신은 이미 어머니가 아니었다. 모든 윤곽이 지워진 채, 오직 움푹 파인 눈자위와 볼썽사납게 튀어나온 입언저리로만 남아있는, 그야말로 해골과 진배없는 얼굴과 간헐적으로 들락거리는 미약한 숨결만 가지고는 도저히 어머니라고 할 수 없었다. 정말이지, 내가 할 말을 이미 다 해 버린 로렌 아이슬리의 말처럼 어머니의 그런 모습은 그저 ‘생이 지나가면서 늘 남기는 부스러기’일 뿐 다른 어떤 것도 아니었다.
불가(佛家)에서는 천상에서의 대화가 말이 아니라 향내로 이루어진다고 한다는 걸 누구에겐가 들었던 기억이 난다. 냄새에 그렇게 민감했던 어머니도 아마 천상의 대화를 추억하느라 그랬을 것이다. 그래요, 엄마. 아무 것도 아니에요, 아무 것도...
4.
오랜만에 아침에 잡곡밥이 나왔다. 팥, 콩, 현미, 보리, 옥수수, 찹쌀이 골고루 섞인 밥이다. 투명하게 자줏빛으로 물든 모양이 보기에 좋았다. 근자에 화두가 되고 있는 ‘전혀 모른다는 것의 외로움’에 대해서 곱씹으며 입안 가득하게 퍼지는 알곡들의 화음(和音)을 즐겼다. 아마 수 삼년은 된 듯한 느낌이다. 군에 가 있는 아들아이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에도 한 번 이 화음을 본 듯하다. 그리고는 또 잠잠했다. 잡곡밥은 이를테면 아내의 사은품, 혹은 나와 아내의 ‘상호이해각서’와 같은 거였다. 본디 내가 요구하는 것은 순전한 팥밥이다. 순 자줏빛의 채색으로 마치 피를 삶아 뿌린 듯한 자극적인 색감을 지닌 팥밥을 나는 원한다. 그러나 아내는 그 핏빛 색감, 삶은 팥의 비릿한 내음(아내의 관전평이다)을 견디지 못한다. 아내는 콩쥐다. 팥을 싫어한다. 그래서 선택된 것이 잡곡밥이다. 나는 그 사이비 경향파적 빛깔과 간헐적으로 전달되는 팥의 미감에 만족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화음 아니겠는가? 많은 소리가 어우러지지만, 내가 듣고 싶은 소리만 골라 들을 수 있는 것이 화음이다. 성가대에 들어오실 생각 없으세요? 성가대 부단장이 그렇게 제안했을 때 불현듯 생각했던 것도 바로 그 화음이었다. 따로 놀면서 어울리는 화이부동(和而不同), 중학교 땐가 교회 성가대 활동을 하면서 비로소 소리에 눈뜨던 옛 기억들이 불쑥 튀어올랐다. 이 나이에 성가대라니... 나를 보고 그런 제안을 하는 부단장이 신통해 보였다. 세 영세자들 중에서 소리통이 있어 보이는 사람들을 물색하던 중이었던 모양이었다. 하긴 그도 넉넉히 봐서 50대 중반은 족히 되어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소리 공부나 한 번 해볼까 해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던 참이기도 해서 거절 않기로 했다.
로렌 아이슬리의 『그 모든 낯선 시간들』이 문학집배원을 통해서 내 창(窓) 안으로 던져졌을 때의 전율을 내 서툰 말솜씨로 요약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마침 그 날 같이 점심을 먹던 이들과도 비슷한 화제로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바여서 더 감도(感度)가 높았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전혀 모른다는 것의 외로움’을 전하는 대목은 가히 압권이었다. 사실 일생을 두고 나는 늘 그것과 대면해 왔다. 작게나마, 그 외로움을 넘어서기 위해 분투했던 기억들도 전혀 없지 않다. 이를테면, 앞에서 말한 그 화음, 그 소리에 눈뜨던 시절도 따지고 보면 그 외로움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던 나날이었다. 전혀 모르던 소리가 어느날 드디어 오고, 그것에 이어 밖으로만 돌던 사람들도 내 안으로 들어오고, 나는 외로움을 벗어던지고 성가대의 일원이 되었다. 그런 문턱들은 그 뒤에도 많이 있었다. 공부에 몰두해서 전 학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석차를 가졌을 때도 그와 비슷한 느낌을 가졌고, 성(性)을 알게 된 날에도, 그리고 소설을 몇 편 쓰고 소설가가 되면서도 그런 것을 느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로렌이 말하는 그 ‘전혀 모른다는 것의 외로움’은 그렇게 내가 다루어왔던 외로움들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물론 그걸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걸 모르는 자가 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는가.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 제1원인을 두고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 이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그 외로움을 드러내는 로렌의 말솜씨가 바로 그 외로움 자체였다는 것, 그것이 압권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몇 마디 말이 회오리처럼 쓸고 지나간 자리가 너무 황량했던 것이다.
5.
누이가 청상(靑孀)이 되었을 때의 고통, 그녀가 거했을 그 황량한 자리들을, 그 막연한 외로움과 두려움들에 대해 지금 내가 무어라고 말할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핑계를 대고 문상조차 가질 않았다. 그에 앞선 고종사촌 큰형의 죽음에도 나는 애써 태연하려고 노력했다(나 스스로의 관전평이다). 그 때도 멀리 있다는 핑계를 대고 내려가지 않았다.
“오빠가 좀 도와줘야지.”
누이가 혼자되고 처음 전화를 걸어와서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또 애써 태연하려고 노력했다.
“오빠는 무슨 오빠, 그냥 이름 불러라. 그게 편하다.”
한 살 터울이었지만 그 정도의 차이는 으레 무시되는 것이 당시 우리들의 어법이었다. 더군다나 누이는 호적상으로는 나와 동갑이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요청을 이런저런 핑계를 만들어 거절했다. 누이는 **생명 연수회가 마침 대구에서 있어서 신입 사원들을 데리고 왔다며 그 언저리에서 나를 한 번 볼 것을 청했지만 나는 결국 누이를 만나지 않았다. 물론 누이가 직장으로 나를 찾아올 경우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누이는 그런 방식으로 나를 만나려고 하지는 않았다.
지금 와서 늘어놓는 변명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다. 그러나, 그 때 만약 누이를 만났다면 나는 도저히 그녀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게 두려웠다.
누이는 여전히 쓸쓸했지만 기세나 기품은 여전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꽤나 도도한 여자라는 느낌을 줄만했다. 질녀들도 보기 좋게 성장해 있었다.
“둘째가 통번역대학원에 다닌다. 나중에 취직 좀 시켜주라.”
멋쩍게 서있는 나에게 누이가 농반진반으로 말을 걸었다.
“그래? 공부 열심히 하는구나.”
“참, 그 집에도 영어하는 애가 있잖아. 걔가 먼저 가야겠네.”
“다 팔자 소관이지 뭐.”
팔자소관이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나왔다. 하필이면...., 요즈음 들어 안 사실인데, 내 어법이 지닌 아주 심각한 고질(痼疾)이 바로 속이 빤하게 드러나는 말을 시도 때도 없이 천연덕스럽게 내뱉는다는 거였다. 나중에 돌이켜 보면 그렇게 유치할 수가 없는 것인데, 막상 대화의 맥락에서는 그걸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어 요즈음은 일단 말을 줄이고 상대방의 말 중에서 그런 코드가 있나 없나를 먼저 살핀다. 생각보다 사람들이 자기 자랑을 많이 하고, 남의 일에 대해 무관심하며, 자기 생각 위주로 산다는 것을 자주 본다. 그리고, 그런 평가를 받을 소지가 있는 말을 가급적 아끼려고 노력하는데, 그게 마음먹은 것처럼 쉽지가 않았다. 말하고 싶은 욕구를 제어하는 것도 꽤나 어려운 일이구나, 문득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도 많았다.
“나중에 한 번 전화하고 내려가마.”
누이는 부산에서 작은 여행사를 꾸려나가고 있었다. 혼자서 하는 것은 아니고 누구와 함께 하는 것 같았다.
“그래라, 와 줘서 고맙고.”
누이는 마산의 우리 쪽 일가가 아무도 오지 않은 것을 서운해 하는 눈치였지만 크게 내색하지는 않았다. 아마 내 입장을 사서 그러는 것 같았다. 고모님도 딱 한 마디만 하셨다.
“걔네들은 안 왔니? 안 왔어?”
그러고는 나를 한 번 쳐다보는 것으로 그만이었다.
6.
적두병 가게에는 아무도 없었다. 창 안으로 들여다보이는 가게는 마치 준비 없이 방치된 오래된 애인의 방을 보는 느낌이었다. 아무렇게나 던져진 적두병 오븐이며 문 열린 발효기 같은 것들이 낯익으면서도 서먹하게 다가왔다. 사람 하나 빠진 것 치고는 너무 횡덩그레했다. 그제서야 진열창을 제외하고는 모두 앤틱스럽게 자줏빛 스틸톤으로 채색한 가게의 전면이 찬찬히 눈에 들어왔다. 옛날식 전당포처럼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그게 아니었다. 구도며 채색이며 공을 들인 표시가 여기저기서 났다. 이걸 두고 딸아이가 가게 풍경이 이국적이라고 했구나 싶기도 했다.
같이 간 젊은 직장 동료 한 사람이 내 행투를 이리저리 살피는 눈치였다. 뭘 그런 데까지 들여다보느냐는 표정이었다. 국밥집으로 향하는 골목길을 거치면서 그가 말했다.
“여긴 도대체가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어요? 이렇게 제멋대로 난 길은 처음이라니까요.”
아마 두 번째였던 것 같은데, 고작 두 번 만에 남의 골목길을 다 가지겠다는 것은 좀 성급하다 싶었다. 언젠가 마산의 형 집을 찾던 생각이 났다. 형이 이사를 가고, 설과 추석, 일 년에 두어 번 형 집을 찾는 일이 나에게 큰 고역이었던 적이 있었다. 갈 때마다 30분씩 길을 헤맸다. 길눈인지 마음눈인지 어느 것 하나는 무척 어둡다는 것을 그 때 알았다. 작정을 하고 표지가 되는 건물을 확실히 기억하려고 노력한 뒤에야 겨우 그 고역을 면하게 된 적이 있었다.
할머니 국밥집은 골목 안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손바닥 만한 간판만 떼면 영락없는 낡은 구식 가옥이다. 누추하지만 얼큰한 맛이 일품이고 내용물도 푸짐해서 인근 직장인들이 알음알음 많이 찾는 곳이다. 네 사람의 일행 중 처음 온 두 사람이 그 맛을 기렸다. 두 번째인 친구는 아무런 말이 없다.
나이 들면서 밥먹는 일이 큰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누구와 함께 무엇을 먹느냐가 하루하루의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다. 혹자는 그런 점심 공양이 결국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대학 교수가 나이가 들면 누구나 학장이나 총장을 꿈꾸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그런 계산 이전에, 나이 들어 줄창 혼자 식당에 간다는 것이 얼마나 참담한 일인가를 겪어 보지 않은 이는 잘 모른다. 한 일 년 간 겪어본 후일담이다. 물론 그때처럼 나름대로 사회적 고립을 자초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나선 경우는 좀 다르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직장 문화라는 것이 있어서 때때로 어울려 다니는 것이 보기에 좋은 것일 때에는 그 일에 무심한 것도 그리 바람직한 일은 아니었다.
돌아가는 길에 다시 가게를 찾았다. 가게 안은 여전했다. 적두병은 아직 만들지도 않았으니 맛볼 수 없는 것이었지만 전날 만든 공갈빵이나 밤빵 등은 아직 진열창 안에 얼마만큼 남아 있었다. 그거라도 사서 찻집에서 차와 함께 먹을 심산이었다.
“한 번 두들겨 보시지요. 안에 사람이 있는 것 같던데...”
누가 뒤에서 그렇게 훈수했다. 그럴까 말까 하는 중에, 그 말을 들었는지 가게 안으로 주인이 나타났다. 알아보는지 가볍게 눈인사를 보내왔다. 막혀 있을 것으로 여겼던 한 쪽 벽면이 뒤편으로 통하는 출입문이었다. 눈에 잘 띄지 않았을 뿐 엄연히 있는 통로였다. 나는 여태까지 이 작은 가게 뒤로 어엿한 살림집이 붙어 있을 것이라고는 아예 생각해 보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으레 가까운 곳에 집을 두고 출퇴근할 것으로 단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시야 자체가 가게 안에만 머물렀던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저 자기 생각에만 꽉 잠겨 좌면우고(左面右考)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성모당(聖母堂) 카페 카리타스(CARITAS)는 이제 일주일에 두어 번은 꼭 찾는 단골 찻집이 되었다. 풍경도 호젓했고 직장 인근이기도 했고 국밥집에서 돌아오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기도 했다. 나는 그 문고리에 새겨진 ‘우리가 사랑을 베푸는 곳에 하느님이 있다(UBI CARITAS IBI DEUS)’라는 글귀가 마음에 들어 연구실 명패 위에 그 글귀를 작게 적어서 붙여 놓았다.
“선생님도 영낙없는 대구 사람이시군요.”
커피를 마시며 골목길 타령을 불렀던 친구가 말했다. 그는 성모당에도 처음이었다. 직장 인근에 이런 장소가 있었다는 것이 놀랍다는 투였다. 자신들이 모르는 도회의 구석구석으로 데리고 다니는 나를 두고 그는 그렇게 평한 것이다. 그러나 ‘대구사람’이라는 말에는 그만의 메타포가 따로 있었다.
“그렇지. 나기는 제주도에서 났지만 자란 건 여기니까. 기억의 시작이 대부분 여기서부터라는 건 내가 여기 사람이라는 거겠지.”
젊은 교수는 서울서 내려온 지 5,6년 된 친구다. 내 앞이라 ‘젊은 교수’지 그의 나이도 이제 사십대 중반이다. 그 나이에 나는 이미 세상을 다 살았다는 느낌에서 크게 허우적거린 적도 있었다. 그에 비하면 그는 의젓한 편이다. 연전에 연구교수로 일 년을 비우고 이번 학기부터 다시 강의를 맡았다. 그 기간이라면 한 두 번의 인사(人事)에 참여하고 두어 번의 승진을 했을 경력이다. 간혹 텃세에 밀리기도 했을 것이다. 아마 이런저런 마음 고생 때문에 대구라는 곳 자체가 이미 마음에서 멀어져 있는지도 몰랐다. 외지인들은 대구에 정착할 때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끝내 정착하지 못하는 이들도 많이 있다. 나도 서울, 청주 등지에서 10년 가까이 타향생활을 해 봐서 그 심정을 어느 정도는 이해하는 편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힘들었다고 해서 그곳을 경멸하지는 않았다. 딸아이가 서울생활 4,5년만에 거기서 뿌리를 내렸으면 한다고 하길래 선뜻 그러라고 했다. 청주에도 가끔씩 아내와 함께 들른다. 그곳 사람들과는 지금껏 잘 지낸다. 오히려 고향에 내려와서 불협화음이 더 잦다. 고향은 예나제나 선지자를 박대한다. 쉽게 인정하지 않는다. 출발점이 있는 곳이라 후일의 차이를 인정받기가 힘들다. 그래서, 불편했지만 인정이 있던 그곳들을 나는 사랑한다. 그것 아니라도 내 청준의 명암이 고스란히 침전되어 있는 곳을 경멸하다니,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문학집배원이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에서 한 구절을 뽑아 보냈다. 자신의 소설 공부가 그에서부터 발원한 내력도 첨부했다. 보면(들으면) 볼수록(들을수록) 마음에 드는 친구다. 로렌 아이슬리 이후로 또 오래 여운을 남기는 대목이 있었다. 그 중에서 한 구절만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아가야, 내 사랑하는 아가야.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거나 사랑한 적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라. 네가 살아있었더라면 지금의 나처럼 될 수 없었을 거야. 그것 하나만 봐도 알 수 있잖니. 아기를 갖고 동시에 이 세계를 경멸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단다. 왜냐하면, 우리가 너를 내 보낸 곳이 바로 이 세계이기 때문이란다. ………”
7.
아버지의 얼굴을 문득 거울 속에서 본다는 것은 이미 오래된 메타포여서 특별히 감동적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고모님이 내 얼굴에서 당신의 하나뿐인 오빠를 다시 보았다고 해서 그것이 어떤 원초적 장면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그 장면을 처음 가진 것은 꽤나 오래된 일이다. 광주 보병학교에서 4개월간의 훈련을 마치고 사관학교 교관으로 막 임관했던 시절, 앞자리에 앉았던 동료가 어, 하며 말했다.
“너, 그러고 보니 김수영하고 많이 닮았다.”
그랬다. 아버지는 김수영처럼 눈썹이 송충이마냥 굵었고 큰 눈에서는 겁이 줄줄 흘러내렸으며 양 볼은 들어갔으되 입술 모양은 그린 듯이 반듯했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의 문약(文弱)에 반했는지도 모른다. 어릴 때는 외탁을 했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낙동강 전투로 출정을 하면서 맨 앞에서 나발을 불었다는 그 외삼촌을 어머니는 자주 이야기했다. 어떤 얼굴이었을까, 어머니의 하나뿐인 동생, 아버지가 평양에 있을 때 교육장쯤 되는 이에게 빽을 써 소학교 교사로 취직을 시켰다는 그 외삼촌. 얼굴도 모르는 그 외삼촌을 어머니는 내 안으로 밀어넣었고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기보다는 외삼촌의 조카로 크는 정체성 서사를 써 왔다. 그런데 살이 빠지면서 언뜻언뜻 낯익은 얼굴이 거울 속에서 나타나곤 했다. 그렇지 않아도 내심 혹시나 하고 있었는데 친구의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역시 그랬다. 그래서 작정을 하고 그런 모습을 조금씩 지워나갔다. 그건 내 정체성을 혼란시키는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점심으로 라면을 두 개씩 넣어 끓여먹었고 거기에다 우유 한 팩, 사과 한 개를 반드시 첨부했다. 군것질과 야식도 꼭꼭 챙겼다. 석 달도 채 되지 않아서 아버지의 얼굴은 완전히 나를 떠났다.
한참 만에 아버지가 다시 나타난 것은 제사상 위에서였다. 형네에게서 부모님 영정을 받아와서 처음 제사상을 차리던 날이었다. 영정을 본 아들아이가 어, 하고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똑같네요.”
영정 안에서는 내 나이 또래의 아버지가 턱을 조금 치켜 든 채 희미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늙은 김수영의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는 평생 똑같은 모습이었다. 아이는 꽤나 충격인 모양이었다. 아마 큰아버지와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었는지도 모르겠다.
“느낌이 비슷한 거겠지.”
잠깐 시야가 흐릿해지는 것을 느꼈지만 이내 잡을 수 있었다. 잠잠할지어다, 세상의 모든 회한들이여.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은 오직 시간만이 해낼 수 있다. 그 시간을 견딘다는 것, 그것만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아마 그냥 그런 식으로, 되는 대로 읊조렸던 것 같다..
아버지가 우리 가족을 위해 진심으로 헌신한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아버지는 자기 안에서 최선을 다했다. 다만 운이 따르지 않았고, 특히나 시대가 좋지 않았다. 대동아전쟁과 6.25 사변. 한창 때 두 번의 전쟁을 겪고 모든 걸 버리고 이남으로 내려와 고군분투했으니 아버지로서는 할 만큼 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대구에 내려올 때까지 아버지가 어떤 직종에 종사했는지는 기억에 없다.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아버지는 주로 달성공원 앞에서 ‘공원상회’라는 상호를 걸고 주류 중간 도매상을 하던 때의 장년기와 마산으로 내려가서 교회의 허드렛일을 맡아 하면서 홀로 지내던 노년기에 집중되어 있다. ‘공원상회’ 시절이 그러니 아버지의 전성기였던 셈이다. 가게 가운데 긴 바를 설치해서 양쪽으로 사람들이 서서 5원짜리(지금 가치로는 아마 500원 정도 되었을 것이다) 낱술잔을 기울일 수 있도록 아이디어도 내고, 손수 주정을 사서 양조를 해서 이문도 두어 배로 챙겼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버지는 늘 유쾌했고, 돈도 꽤 벌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가게에 두고 쓰던 책상 서랍에 언제나 1원짜리나 10원짜리 지폐들이 그득했으니까. 그런데 어떻게 해서 하루아침에 몰락하고 말았는지 나로서는 아는 바가 없다. 듣기로는 어머니의 계가 잘못 되었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계 하나에 집안이 풍비박산 난다는 것이 납득이 안 가는 것이다.
형은 관리하는 건물을 두고 오래 자리를 비울 수 없다며 대구 혼사에는 올라가기 어렵다는 뜻을 전해 왔다. 형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는 고모님에게 먼저 연락을 취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지난 번 형네 둘째 아이 혼사 때에도 내가 고모님에게 연통을 넣었다. 퇴직 후 4층짜리 건물 관리를 맡아 제2의 인생을 시작한 형은 아이들을 다 내 보낸 후 혼자서 살고 있다. 교회에도 여전히 열심이지만, 형수와는 무엇이 틀어졌는지 또 별거 중이라는 소식이다. 간혹 초등학교 교사로 있는 큰딸 아이가 아이들을 데리고 와 있는지 전화기 너머로 아이들의 깔깔 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도 있다.
“남해 쪽에 좋은 땅이 좀 있더라.”
말년에는 한적한 곳으로 들어가 농사를 짓겠다는 것이다. 하루가 멀다고 싸우면서 하필이면 왜 처가가 있는 남해 쪽인지 모르겠다.
8.
적두병 가게 주인이 길 맞은 편에 있던 화상(華商)의 후예임이 분명하다는 확신감이 온몸을 감싸고 돌았다. 그 길에서 나고 자라고 시집을 온 아내에게 옛날 그 중국집에 대해서 물었다. 그녀는 분명한 어조로 확인을 해 주었다.
“맞은 편, 조금 아래쪽에 있었잖아요. 진열장 안에 공갈빵 몇 개는 꼭 있었고..., 만두도 있었나?”
아내는 그 집 짜장면이 별 맛이 없었다는, 필요 이상의, 전문가다운 생생한 강평까지 곁들였다. 그러나, 적두병 가게 주인이 그 화교의 후예일 것이라는 내 추측에는 동조하지 않았다. 아내의 말에 의하면 이미 그 때 그 집 주인의 나이가 만만치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 손자겠지.”
고집을 피우는 나를 보며 아내가 피식 웃었다. 그 모습이 ‘또 시작하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내는 나의 황당함(아내의 관전평이다)이 딸아이에게 내림으로 전해진 것 같다고 늘 걱정이다. 하는 짓이 너무 똑같다는 것이다. 어떨 때는 섬칫한 느낌이 들 때도 있단다. 전날 아버지하고 어디 갔다가 들은 소리를 다음날 딸하고 가서 똑같이 들었을 때의 기분을 상상해 보란다. 같은 장소에서 철자 하나 안 틀리고 똑같은 말을 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라는 것이 아내의 보고다. 문제는 그 말들이 모두 황당스러운 내용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기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말들을 이 두 부녀는 어떻게 그렇게 천연덕스럽게 똑같이 할 수 있는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것이 아내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적두병 가게 주인은 화교임이 틀림없었다. 우선 생김새가 전형적인 산동인(山東人)이었다. 얼굴이 넓고 희며 콧날이 서 있고 눈이 큼직한 것이 분명 산동 사람의 혈통이었다. 그 다음은 바로 ‘적두병’이라는 상호다. 그 가게의 상호는 ‘적(赤) 두(豆) 병(餠)’이라고 큼직하게 적힌 세 글자가 전부다. 우리말로는 팥떡이나 팥빵이라는 말인데, 굳이 한자를 넣어서 그렇게 적어놓은 이유가 무엇이겠는가라는 것이다. 요즘 젊은 사람이 한자를 그렇게 중히 여긴다는 것은 그것이 결국 그의 모종의 ‘뿌리’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라는 것이 나의 추리였다. 다음으로는 직감이긴 하지만, 그의 기술이 내림 기술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당대에 보고 배운 기술과 대를 이어 내려온 기술은 무엇이 달라도 다른 법이다. 그가 만든 적두병은 내가 맛본 것 중에서는 단연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이상적이라 할 만큼 팥소와 껍질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모르는 이들은 팥소의 단맛에 적두병의 맛이 좌우되는 줄 알지만, 사실은 팥의 물성이 차기 때문에 껍질이 파삭하게 먼저 단맛을 내고 팥소가 은근하게 뒷맛을 유지하게 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팥의 향미를 음미하면서 물리지 않고 그 맛을 오래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팥소를 쓰는 전병류가 지켜야 할 금과옥조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속이 아려서 많이 먹을 수가 없다. 안흥찐빵이라든지, 여러 인기 있는 찐빵들은 으레 그 원칙을 고수한다. 그런 요령, 그런 맛의 관념을 이렇게까지 절묘하게 구현할 수 있다니, 그것이 대물림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가능한 기술이라는 말인가.
그러나 아내의 생각은 달랐다. 그건 팥쥐들의 생각일 뿐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입맛은 간사해서 때에 따라 다르고 기분에 따라 다른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호들갑을 떨 필요가 아예 없는 법이고, 우리 땅에서의 화교들 문제는 좀더 정치경제학 쪽으로 가야된다는 투였다. 화교들이 제3공화국 시절의 차별 대우를 견디지 못하고 모두 이산(離散)한 것을 모르느냐는 거였다. 무엇이 달라졌다고 그 너절한 달성공원 앞에 손자까지 나서서 다시 전을 펴겠느냐는 논조였다. 재산 취득과 관련된 법령이 개정되어 외국인도 내국인과 별반 다름없이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안다고 반박도 해 보았지만, 아내 앞에서는 ‘도사 앞에서 요령 흔들기’에 불과했다. 미국에서 퓨전식당을 하고 있는 그녀의 형부, 나의 손윗동서가 바로 그 이산의 당사자 중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아내는 콩쥐다. 콩쥐들은 세상을 즐길 줄 모른다. 어떻게 일만 하며 살 수 있겠는가. 무엇이든 그것이 일일 때에는 이미 늦다는 것을 그들은 모른다.
9.
소환할 수 없는 기억, 영원히 미소환으로 남아 있는 것들이 내 안에서 웅웅거린다는 것을 안다. 그 느낌은 서글픈 감정과 무력감과 증오심, 그리고 분노와 함께 하지만 정작 자신의 실체를 전체로, 그리고 그림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렇지 않아. 나에게는 얼굴이 있어. 간혹 꿈에서도 나타나. 악마의 얼굴이지. 세 살 때 만난 계모의 얼굴이 아닌가도 싶어. 꿈이 아니더라도, 그 얼굴이 내 안에서 올라오면 이미 나의 통제를 벗어나 있다는 걸 느낄 때가 많아.”
시를 쓰는 한 선배에게 ‘내 안의 웅웅거림’에 대해 말했다가 그런 말을 들었다. 20년은 저 편에 가 있는 기억이다. 그는 아예 통째로 자기를 버리는 길을 택하는 것 같았다. 내성(內省)보다는 외투(外鬪)를 택했다. ‘악마의 얼굴’은 영원히 지울 수 없다는 것을 그때 이미 깨달았었는지도 몰랐다. 그는 시와 생활을 철저하게 분리했다. 그런 그를 그때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비슷하지만 다른 경우도 있다. 내성 위주로 정갈하게 시를 쓰던 친구였다. 주로 내가 그를 찾아다니곤 했다. 그는 그런 것을 말로 하지는 않았다. 다만 시를 썼을 뿐이었다. 그의 시는 아름다웠다. 아름답다 못해 처절하다는 느낌마저 주곤 했다. 그것이 그가 ‘내 안의 웅웅거림’ 혹은 ‘악마의 얼굴’을 퇴치하는 한 방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최근에야 들었다. 그만큼 내가 무뎠다는 말이다. 그런 그와 10년 넘게 연락을 끊고 지낸다. 나는 그 때 모럴에 무심한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시에서도, 삶에서도 그는 철저히 모럴을 배제했다. 어떻게 보면 위악적이라 할 만큼 그는 생에 대해 냉정한 포즈를 취했다. 그런 그가 나에게까지 그 냉정한 포즈를 확대한 것인지 아니면 모럴 없는 그를 이해하지 못한 내가 그를 우정 배제한 것인지 확실치 않다. 그 과정이 기억에 없다. 그가 얼마 전 큰 상을 받았다. 신문에 난 그의 사진에는 머리가 허옇게 센 중늙은이 하나가 얼굴을 약간 찡그린 채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시간은 의미가 될 때만 시간이다. 내 안의 시간 중에 골다골증을 앓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 때마다 가슴 속은 한 동안 먹먹해 진다. 있다는 것을 알 뿐, 그 안의 것들에 대해서 나는 여태 무지하다. 오리무중이다. 그것들은 과거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다. 환원할 수 없는 현재의 시간들 역시 그들의 몫이다. 현재를 근원결락(根源缺落)으로 만드는 것이 주로 그들이 하는 일이다. 마치 뒤돌아 볼 틈도 없이 해치우는 숙련된 자객들처럼 그들은 불시에 쳐들어와 나를 쓰러뜨린다. 속절없다. 어쩌겠는가, 그렇게 넘어질 뿐이다. 인간이란 누구나 그저 ‘생이 지나가면서 늘 남기는 부스러기’일 뿐 다른 아무 것도 아니라지 않는가.
그러나, 속절없다는 것도 궁색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도 이제 일어설 때가 되지 않았는가라는 환청이 들릴 때가 한 번씩 있다. 늘상 자객에게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달성공원 앞에서 적두병을 본 것은 어쩌면 우연이 아닌지도 모른다는 염이 불쑥 쳐들어왔다. 그랬다. 그것이 우연이라면 세상에 우연 아닌 것이 어디 있겠는가. 아내와 내가 만난 것도 우연이고, 만나 보니 어린 시절 한 골목을 뛰어다녔던 사이였고, 그게 좋아 결혼했고, 아이 둘을 낳고 30년을 무탈하게 살아온 것도 우연이다. 우연일 뿐이다. 달성공원 근처에 쓸만한 국밥집이 있다고 누가 나를 데려왔고 이후로는 내가 사람들을 데리고 다니게 되었고, 그래서 또 적두병을 다시 만나게 되고 하는 것이 우연이라면, 일년에 두어 번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이제 경주까지 가서 황남빵이라는 적두병을 맛볼 필요도 없어진 것도 우연이고, 아버지가 모든 것을 두고 이남으로 내려온 것도 우연이고, 그 아버지가 젊은 아내를 잃고 혼자 말년을 쓸쓸하게 보낸 것도 우연이고, 그 밑에서 소년 고생을 보란 듯이 한 우리 형제의 그 쓰디쓴 인생 역정도 한낱 우연이었을 뿐이다. 그러니, 적두병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것이 우연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조이스가 말한 에피퍼니(epiphany 계시의 직관적 경험)라도 된다는 것일까.
적두병이 일종의 신성현시(神聖顯示)가 되려면 좀더 많은 그림이 필요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그림은 이미 낡고 색이 바래 그 형체를 분간하기 어려운 것들 투성이다. 그 중에서도 어머니와 연관된 것들은 더 그랬다. 색이 뚜렷하고 형체가 완전한 것들은 카타콤의 석관에 새겨진 부조 형식의 이콘(icon)들처럼 이미 어떤 이미지가 반영된 것들이어서 그 자체로 완결된 의미가 되는 것들이었다. 그것으로부터 어떤 의미를 추출하거나 추리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했다.
동행한 사람 중에서도 적두병 가게에서 물건을 구입하는 일이 처음 발생하였다. 마침, 주인 청년도 일찍 나와 이미 적두병을 굽고 있었다(그를 청년으로 부르는 것은 우연히 엿들은 통화 때문이다. 그는 애인을 둔 미혼이었다). 한 박스를 주문하고 점심 식사가 끝난 뒤에 물건을 인수하는데 따라온 청년 교수(40대지만 아직 미혼이다)가 공갈빵을 한 봉지 가득 사서 담았다. 그는 시골에서는 보기 드문 팥쥐다. 그래서 나는 그를 좋아한다. 점심 행사에 자주 동행하는 친구여서 당연히 같이 온 적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초행길이라고 했다. 이미 식당에서 오래 머물렀던 터라 카리타스에는 들르지 않고 바로 돌아왔다.
10.
“3월 7일 제82회 아카데미상의 장편 다큐멘터리 부분은 ‘코브(The Cove)’가 수상했다. 미국 사진작가가 찍은 이 영화는 일본의 작은 어촌에서 돌고래를 포획해 식용으로 판매하는 현장을 보여준다. 다큐멘터리 주인공은 돌고래 조련사에서 동물 보호 운동가로 변신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이 길들이던 돌고래가 자살하는 사건을 겪고 충격을 받아 돌고래 보존운동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돌고래가 수조 밑바닥으로 가라앉으면서 호흡을 스스로 멈추는 순간을 목격한 주인공은 ‘돌고래는 사람보다 큰 뇌를 가진 동물이므로 사는 것이 힘들면 다음 숨을 내쉬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다.“(이인식의 멋진과학, 조선일보. 2010. 5.1)
조간신문에서 ‘돌고래의 자살’을 읽으면서 순간 어머니의 수개월에 걸친 마지막 골방 칩거가 떠올랐다. 수조 안에 가라앉아 숨쉬기를 멈추었다는 고래가 하나의 이콘이 되어 어머니의 그림에 첨가되었다. 어머니가 스스로 선택한 그런 방식의 작별 인사는 당시로는 별다른 감회를 주지 못했다. 간혹 그림이 없는 그때를 생각하면 슬퍼지기도 하지만, 기억이 없다는 것은 그것이 일상이었다는 말이기도 한 것이다. 일상은 아무런 감흥을 줄 수 없다.
그런 어머니의 일상을 두고 볼 때, 고모님의 화사한 노년의 얼굴에서 그 연배의 어머니를 연상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불가사의한 일이다. 고모님은 어머니와 많이 달랐다. 그것이 어떤 장소적 배경을 지녔던 사건인지는 기억에 없다. 다만, 사건만 있다. 고모님이 오른손에 붕대를 칭칭 감고 나타난 적이 있었다. 두 집이 가까이 살던 때였던 모양이다. 나는 혼자서도 아장아장 걸으며 고모집과 우리집을 곧잘 오갔다. 어머니가 고모님의 미련을 타박했다. 보리쌀을 너무 치대다가 그만 손바닥에 염증이 생기고 말았다는 것이다. 어머니라면 절대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 당연히 우리는 내일 죽어도 보리밥은 먹지 않았다. “조팝은 먹었어도 보리밥은 먹어보지 않았다”고 어머니는 말했지만, 내가 조팝을 먹어본 기억은 없다. 아무리 없는 사람이라도 우리 고향에서는 보리밥 먹는 사람은 없었다는 뜻이었다. 그때도 팥밥을 자주 해 먹었다.
어머니가 그림을 잘 그렸다는 것, 방바닥에 도화지를 놓고 밑그림 하나 없이 풍경화며 인물화를 슥슥 그려나가는 어머니의 자태가 너무 아름다웠다는 것(형의 담임선생님은 그런 어머니의 그림 솜씨를 빌려서 교실 환경미화를 하곤 했다), 아버지를 졸라 곧잘 극장 출입을 했다는 것, 그리고 맛있는 팥밥을 할 줄 알았다는 것(나는 아내가 팥밥을 할 줄 모르는 것을 보고 비로소 그것을 알았다) 등으로 나는 어머니도 팥쥐였으리라 짐작한다. 한 마리 아름다운 어미 팥쥐. 나는 그녀의 작고 어린 새끼. 어머니는 본인도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넌 외탁이야. 형하곤 달라.” 어머니는 늘 그렇게 말했다. 그것이 얼마나 달콤한 유혹인지 콩쥐들은 모른다. 그건 팥쥐들끼리만 아는 것이다. 콩쥐들은 모른다.
갑자기 혼선이 왔다. 콩쥐 고모님의 붕대 감은 손이 팥쥐 어머니 탓이었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리가 걷잡을 수 없이 치고 올라온 것이다. 어머니는 끼니를 얻으러 온 동갑의 시누이에게 팥도 아니고 멥쌀도 아니고 보리쌀 한 됫박을 내 주었다. 콩쥐는 그것을 치대고 치대어서 하얀 쌀밥으로 만들었다. 자신의 손을 버려서 식구들의 따스하고 부드러운 한끼 밥상을 얻은 것이다.
“여우 같은 년, 오빠가 불쌍하지.”
그날따라 고모님은 나에게 쓸데없는 역정을 냈다. 조막만한 발바닥에 무슨 묻을 것이 있다고, 아장거리며 고모집을 찾은 어린 친정 조카의 발바닥을 세숫대야 안에서 아프게 문질러댔다. 팥쥐 어머니, 콩쥐 고모님. 한 분은 일찍 가셨고 한 분은 여태 계신다. 옛날이야기는 언제나 옳다. 팥쥐 아들도 그건 안다.
그렇다. 기억은 그림이다. 그림은 시간이 지나면 색이 바랜다. 후대의 화가들은 그 위에 자기 색깔을 덧씌우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인물과 배경은 지워버릴 수도 있다. 특히 자화상일 경우에는 더 그렇다. 그래서 나는 내 그림에 어떤 불멸의 진실이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그래요, 엄마. 아무 것도 아니에요. 아무 것도 아니죠. 그냥 쉬세요...
11.
욕심을 내기는 했지만, 미셸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을 내가 가진 말로 분석하거나 해석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미 그것을 지난 주에 확인했으면서도 각기 장을 나누어 요약해 오기로 제안한 것은 정말이지 미련한 짓이었다. 푸코에게 문제인 것은 ‘말’이었다. 그런 태도의 측면에서만 보자면 그 역시 팥쥐였다. 콩쥐들이 쓰는 말은 그저 마르크스 아니면 니체다. 틈만 나면 혁명이고 초월이다. 팥쥐들은 그게 싫다. 그저, 그냥, 한 번 모여서 찍찍거려 보자는 건데 콩쥐들은 그것마저 무슨 심각한 데몬스트레이션으로 간주한다. 말을 메타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문자밖에 없다. 문자는 말로 들어낼 수 없는 폐부의 실핏줄까지 모두 찍어낼 수 있다. 글자 없이 우리의 정신행위가 가능한가? 마치 내가 꽁꽁 얼어붙어 있는 기억의 바다에 전두병이라는 이름의 파쇄선(破碎船) 한 척을 띄워놓고 정처(定處) 없는 밤바다여행에 나서고 있는 것처럼, 푸코도 살아있는 정충처럼 움직이는 자기만의 문자행위에 몰두하고 있었다. 나는 요약을 포기하고 그 대신 『정신의학의 역사』 앞부분을 일부 요약해 놓은 것을 스터디 멤버들에게 메일로 보냈다.
<18세기 잉글랜드에는 1713년 설립된 노리치의 베델 수용소를 포함하여 7개의 수용소 혹은 공공 자선소가 더 있었다. 그러나 곳곳에 흩어져 있는 사립기관, 처음에는 “광인의 집madhouse”이라 불리다가 나중에는 “개인 신경 클리닉”이라 불리게 된 곳에도 많은 수의 환자가 입원해 있었다. 그렇다면 소위 정신의학의 창시자라고 불린 사람들 대다수가 가지고 있던 공통점은 무엇이었을까? 자본주의와 중앙권력의 잔혹한 동맹이 정신의학을 탄생시켰다는 푸코식 개념은 과연 적합한가? 동기도 없이 타성에 젖은 집단에게 노동 규율을 주입하기 위한 목적으로 일탈자들을 감금하는 권력의 게임판에 올라간 의사들이 과연 정신의학의 창시자라고 볼 수 있는가? 사실 바티와 러쉬는 초기 자본주의 경제의 중심 - 특히 필라델피아와 런던 -에서 시장 경제 분위기에 푹 젖어 있었다. 반면, 아직 중세의 깊은 잠에 빠져 있던 18세기 말 피렌체에서 키아루지가 자본주의에 눈떴다고 말하기는 어렵고, 더욱이 레오폴드 대공이 오스트리아 군주의 권한을 확장하기 위해 토스카나 정신병원 체제까지 통제하려 했었다고 말하는 것은 익살극 속의 말귀와 진배없다. 당시 빈의 경제적 관심의 대상은 토스카나가 아니었고, 젊은 레오폴드(통치권을 잡던 1765년 당시 18세에 불과했다)와 그의 모친 마리아 테레사는 산업부흥으로 국가기강을 확립하려 했다기보다는, 전통적이고도 계몽주의적인 “절대권력자”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인용문의 뒷부분으로 가면 “통찰력, 관찰능력, 지적 능력, 선한 의지, 끈기, 인내, 경험, 당당한 체격, 존경을 끌어낼 수 있는 표정”이 정신과 의사에게 요구되는 자질이라는 말도 있었다. 그 항목들은 평소에 내가 늘 꿈꾸어 오던 것들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마침 정신과를 하고 있는 고교 동창생들이 두어 명 있었는데 얼추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언제부턴가, 무엇엔가 의문을 표시하고 그것에 집착하는 모든 행태에 대해 저항감이 들기 시작했다. 특히나 주변의 사소한 일, 일상의 작은 불편함에 대해 자기만의 불만을 토로하면서 마치 그것이 큰 문제에 대한 통찰이나 되는 듯이 당당한 표정을 짓는 치들을 볼 때마다 속이 머슥거렸다.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같은 과의 친한 후배 교수에게 말했더니 그가 정색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선배도 조심하셔야겠어요. 은사님 한 분이 그런 증세가 있어서 병원에 갔더니 심근경색 중증이라는 진단이 나오더래요. 개복수술을 했는데, 9시간 수술에 12시간 만에 의식이 돌아오시더랍니다. 허벅지 정맥을 떼서 심장에 이식했대요. 그러니, 속이 메스꺼울 때는 그냥 계시지 말고 병원에 꼭 한 번 가보세요. 나이 들면 조심하셔야 합니다.”
매사에 누그러뜨리고 마음 편하게 살라는 조언이었다. 그러나, 마음먹은 대로 다 되면 그게 인생이겠는가. 학회 발표장 같은 곳에서도 마찬가지다. 젊은 연구자들은 좀 덜한데, 나잇살께나 먹은 자들이 말 같지도 않은 것들을 가지고 짐짓 심각한 폼을 잡고 떠들고 있는 광경은 그야말로 목불인견(目不忍見)이다. “전 생애를 걸쳐 비로소 알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한 가지 사실”이었다는 로렌의 말에 의지하지 않더라도 늙어서까지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호들갑을 떠는 것은 지극한 노추(老醜)일 뿐이다(이 글도 노추가 아니길 빌 뿐이다).
아침을 적두병으로 떼웠다. 까칠한 입맛을 달래는 데는 그만한 게 없었다. 아내도 전염이 되었는지 곁에서 하나 거들었다. 시장기가 돌아서 좀 일찍 점심시간을 잡을까 했는데 마침 청년 교수가 전화를 해 일행 한 명과 함께 인근의 죽집으로 향했다. 호박죽과 단팥죽, 그리고 미역국 한 그릇을 가져다 놓고 천천히 이른 점심을 들었다. 팥빵으로 아침 끼니를 삼았다는 말에 앞에 앉았던 청년 교수가 놀래는 표정을 지었다. 공갈빵이라면 몰라도 적두병으로 아침 끼니를 삼는다는 것은 보통 내공이 아니라는 거였다. 내공? 정신병이겠지. 나는 속으로 그렇게 응대하며 그에게 물었다. 그는 원예학과 직업교육이 전공이었다. 학부와 대학원에서는 원예학을 전공했고 박사학위는 미국에서 직업교육으로 받아온 이다.
“팥이 정신과 질환에 좋다는 속설이 있는데 사실인가?”
“그럼요, 신경안정제 역할을 하죠. 피로회복에도 그만이고.”
이 친구는 그저 내가 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괜찮다는 식이다. 나도 그가 하는 것이 밉지는 않지만 이번에는 그런 게 아니었다.
“실제로 그런 근거가 있느냐니까?”
“의학적인 근거야 모르겠고..., 팥 성분이 뭐 다 전분이고 당이니까 피로회복에 좋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기능을 하는 건 분명하고, 신경이 예민한 이들에게는 옛날부터 돼지국이나 팥죽 같은 것을 많이 권장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는 거의 백과사전이다. 연전에 아내와 함께 한 자리에서 영국산 장미목 가구가 왜 좋은지에 대해 구구절절이 알아듣게 설명을 해서 잠시 앤틱 가구에 관심이 있었던 아내를 순식간에 자기 팬으로 만든 사람이었다. 그는 무엇이든 가볍게 다룰 줄 안다. 그랬다. 가벼운 게 좋은 거다. 무엇이든 무겁다는 것은 필요없는 것들이 필요없이 많이 들어가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무거운 것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점심식사를 하고 연구실로 돌아와서는 이내 휴대폰을 싸고 있던 가죽집을 뜯어내 버렸다. 이렇게 작고 가벼운 것을! 맨 몸으로 드러난 손전화는 손바닥 안에 냉큼 들어와 안겼다. 왜 여태까지 번거롭게 가죽집을 씌웠는지 모르겠다. 이제는 뭘 아끼기 위해서 필요 이상의 불편을 감수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기로 했다. 가진 것 다 써보지도 못하고 죽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군인간 아들아이가 병과학교에서 콜렉트콜로 전화를 걸어왔는데 다이얼 문자판을 못 찾아서 허둥대다가 통화를 놓치고 말았다. 가죽집의 거추장스러움도 한 몫을 거들었다. 그런 통화방식은 처음이었고, 지금 손전화가 터치폰 방식이라 문자판이 통화중에는 지워지는 것도 당황스러웠다. 아내가 자기 전화로 전화를 넣어 연습을 시켰다. 별 것도 없었다. 아무 숫자나 누르라고 하면 ‘다이얼’이라고 적힌 데를 눌러서 숫자판이 나오도록 해서 눌러주면 그만이었다.
이 나이에 젊은 사람들의 스터디 모임에 끼어들기로 한 것이 과연 가벼운 처신이었는지, 무거운 처신이었는지 아직 잘 모르겠다. 무엇에 집착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갈 수 있는 데까지는 가보는 것이 옳지 않겠나 싶은데, 아직은 잘 모르겠다.
12.
제주도에는 두 번 다녀왔다. 30대에 한 번, 40대에 한 번이다. 긴 여행은 그 후로 일본에 서너 번 다녀 온 것이 전부다. 그것도 절반은 공무였다. 학생들을 인솔하거나 학술교류협정 체결 같은 출장업무였다. 생각해 보니 여행에는 아주 인색한 편이었다. 여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지금까지 통틀어서 열 번이 안 된다. 차를 몰고부터는 장기적인 기차나 버스 여행 자체를 해 본 기억이 별로 없다. 어디를 다녀와도 1박(혹은 무박) 2일이 고작이었다. 30대 후반부터 한 가지 일(검도 수련)에 몸을 꽁꽁 매달아 놓았던 것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당시는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의 출구를 만드는 것이라 생각했다. 카프카의 말처럼, 그때는 자유가 아니라 오직 하나의 출구만을 원하던 시절이었다. 자유나 해방은 언감생심이었다. 그만큼 사는 것에 쫓겨 지내던 때였다. 이제 그 일에도 해방이 필요한 때라는 생각이 든다.
제주도에서의 기억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공무가 섞여 있기는 했지만, 두 번의 여행에서도 출생지를 찾아본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제주도는 그저 관념일 뿐 내겐 하등의 작은 그림도 될 수 없는 곳으로 각인되어 있다.
“갯바위 위에서 빨갛게 익은 얼굴로 하염없이 울고 있더구나. 목소리가 잠겼던 것을 보면 한참을 그러고 있었던 것 같더라.”
형에게 업혀 놀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늦게까지 귀가하지 않는 형과 나를 찾으러 나왔다가 본 풍경을 어머니는 그렇게 전했다. 어머니가 들려준 바닷가에서의 그림은 고작 그 정도가 전부다. 하나 더 있다. 뱀 이야기다. 방 안에 나를 눕히고 부엌일을 보고 다시 들어오니 머리맡에 왠 긴 막대가 하나 놓여 있더란다. 얘가 언제 나가서 이 막대를 주워왔나 하고 가까이 가보니 빛깔도 좋은 청동 빛 구렁이어서 기겁을 한 적이 있다고 했다. 주인집 할머니가 와서 쌀알을 뿌리며 달래서 내보냈다고 한다.
제주도에 한 번 가봐야겠다는 말을 염불처럼 외고 다닌 지도 수 삼 년은 된 것 같다. 해남 쪽 어디에 가면 차를 싣고 갈 수 있는 큰 배가 뜬다고 들었다. 여름이 오기 전 차를 가지고 가서 진득하게 돌아다녀볼 생각이다. 내가 태어난 곳이 김녕 쪽이었다니 그곳에 가서 한 사나흘 머물다 와야겠다.
형은 이미 한차례 순행을 끝낸 모양이었다. 제주도를 시작으로 서울로 대전으로 한 바퀴 크게 돌았다고 했다. 대구로 내려오기 전 잠시잠시 머물던 곳도 일일이 다 체크를 하였고, 대구에 올라와서도 연락 없이 이곳저곳 훑고 다닌 눈치였다. 형수 이야기로는 첫사랑이었던 여고생의 옛날 집 앞까지 순례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마음에 있는 일과 드러내고 하는 일이 엄연히 구별이 있는데 도대체가 그러니 아무리 환갑 나이라도 부부싸움을 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느냐는 거였다. 형수는 아들이 사법고시에 합격하자 연수원 뒷바라지를 핑계로 아예 짐을 싸서 서울로 올라가 버렸다.
첫사랑. 형과 형수는 첫사랑을 그런 방식으로 오마쥬(경배)하는가. 우리와는 조금 방식이 다르다. 두어 달 전, 아내와 함께 시내 교보문고에 나갔다가 최백호와 임희숙을 샀다. 최백호는 나만 좋아하고 임희숙은 둘 다 좋아한다. 그러다 보니 아침부터 임희숙을 듣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래서 「첫사랑의 종」, 「떠나갑니다」, 「기다려야 할 사람」 같은 노래는 가사가 아주 친숙해졌다. 형네가 순진한 건지 우리가 너무 무딘 건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나이 들면 누구나 첫사랑의 그 불패적 판타지가 그리운 법이다. 그래서 첫사랑 아니겠는가.
형에게는 나보다 훨씬 많은 그림이 있다. 어머니는 물론 아버지에 관한 그림도 월등히 많이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런 글쓰기를 할 때면 형의 그림이 탐날 때가 많다. 형이 가지고 있는 그림이 수량 면에서만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 것은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본격적인 사회생활로 막 접어들 무렵이었다. 형의 요청으로 그때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형의 학창시절 사진들을 정리하면서(형은 군입대를 앞두고 나에게 자신의 소지품들을 위탁했다) 문득 그것을 깨달았다. 형의 사진은 명암이 분명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과 돌아가신 후로 뚜렷하게 구분된다. 형에게는 전성기가 있었다. 내가 대구에서 ‘누구의 동생’이라는 명찰을 뗀 것은 거의 최근의 일이다. 주로 형 친구들이지만, 지금도 간혹 그 명찰로 나를 부르는 이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내 이름이 안중에 없다. 그런 형이 어머니와 아버지의 긍지가 되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형과 함께 한 사진 속에서의 어머니는 내 그림 속의 어머니와는 많이 달랐다. 어머니의 그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내 앨범 속에서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동정은 될지언정, 나는 어머니의 긍지는 아니었다. 형도 마찬가지였다. 형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어떤 사진에서도 웃음을 남기지 않았다. 그 침울한 얼굴은 형의 몰락이 어머니의 죽음과 전혀 무관치는 않을 것이라는 추리를 강요해 마지않기도 하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죽음과 형의 몰락이 친연성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과 내가 그 이후로 길바닥을 훑고 다니던 부랑(浮浪)의 야인(野人) 생활을 청산하고 학교 공부에 매진했다는 것은 일종의 부조화 혹은 아이러니다. 그 아이러니가 어떻게 해서 발생한 것인지를 명확하게 짚어낼 수는 없는 일이다. 사람 일을 머리로 헤아린다는 것 자체가 못난 짓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형이 어머니의 ‘아들-연인(son lover)’이 아니었던가 하는 짐작은 간다. 형은 아버지가 어머니의 몸 속에서 다시 그 정수(精髓)만으로 부활한 존재였지 않았나 싶다. 아버지의 태생적인 문약을 극복하고, 총명과 강건함과 사교성으로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활동이면 활동에서 두각을 나타낸 형은 어머니로서는 자신이 세계에 내 보낸 최고의 작품이었을 수 있었다. 그에 비하면 나는 일개 연민과 동정의 대상에 불과했다. 내성적인 성격이라 그저 어머니 치마폭 안에서만 어정거렸고, 공부든 운동이든 그저 그만그만한 아이였다. 나서는 일도 없었거니와 누구를 따라다니는 일도 없었다. 늘 혼자였던 막내 아들이었다.
“넌 외탁이야, 형하고는 달라.”
어머니가 그런 말로 날 위로하려 했던 것도, 그래서 팥쥐의 그 감미로운 세계로 내가 입장할 수 있도록 안내한 것도 사실은 그런 배경에서 나온 일종의 배려였던 것이 분명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어머니의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분명 환청이었다. …아가야, 내 사랑하는 아가야.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거나 사랑한 적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라. 네가 살아있었더라면 지금의 나처럼 될 수 없었을 거야. 그것 하나만 봐도 알 수 있잖니. 아기를 갖고 동시에 이 세계를 경멸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단다. 왜냐하면, 우리가 너를 내 보낸 곳이 바로 이 세계이기 때문이란다.…
13.
화창하기 그지없는 날씨였다. 유독 대구만 27도를 웃도는 날씨라고 교중 미사를 보는 중에도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대구 날씨는 별나기로 유명하다. 오월 초, 달성공원 앞은 조랑말이 끄는 꽃마차까지 등장해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야말로 아이들의 꽃동산이었다. 혼배 미사까지 보고 두 시가 넘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공갈빵을 사러 가자고 제안했다. 아내는 적두병보다 공갈빵을 더 좋아한다. 그렇게 콩쥐 티를 낸다. 그러나 공원 앞길은 그야말로 북새통이었다. 큰장 네거리부터 차들이 꼬리를 물고 거북이 걸음이었다. 젊은 엄마들이 등에 업거나 혹은 유모차에 싣거나 해서 집에 있는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나온 것 같았다. 마치 무슨 총동원령이라도 내린 것 같았다. 차가 꼼짝없이 갇혀버렸다. 짜증은 둘째고, 난생 처음 보는 풍경이다 못해 장관이라는 염마저 들었다. 난리가 났군, 두리번거리는 나를 보고 아내가 말했다.
“날씨 좋으면 늘 이래요. 봄이잖아요.”
아버지가 공원상회 주인장이었을 때에는 달성공원에 동물원이 없었다. 그저 향나무 울창한 숲길과 일본인이 남기고 간 신사 건물이 두어 채 있었을 뿐이었다. 하나는 단군 성전으로 또 하나는 시에서 운영하는 독서실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 외에 기억에 남는 건축물로는 상화(尙火) 시비와 달성 서씨 송덕비 그리고 관풍루라는 경상감영 터에서 옮겨왔다는 누각 정도가 고작이었다. 이른 아침, 그 건축물 사이를 산보하는 것으로 아버지는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낮에는 할 일 없어 공원을 찾은 노인들을 대상으로 들병이 장사가 성업이었고, 형과 나는 그들에게 다문다문 소주나 사이다를 배달하며 용돈을 벌어 쓰곤 했다. 그러니, 요즘처럼 아이들의 꽃동산이 되기에는 공원은 너무 조숙(?)한 공간이었던 셈이다.
“이 정도면 장사도 할 만하겠는데?”
처가 터 앞을 통과하면서 내가 그렇게 말했다. 아내는 처녀 가장으로 몇 년간을 달성공원 앞에서 장사꾼으로 버텼던 이력이 있다. 나를 만나고서도 서울로 올라와 신접살림을 하기 전까지는 가업인 구멍가게 일을 거의 혼자 도맡아서 꾸려나갔다. 딸아이가 뱃속에 든 상태에서도 남정네들이 하는 일까지 가리지 않고 해치워서 동네에서는 억척녀로 호가 났던 아내였다. 처가 터에는 2층으로 번듯한 상가가 들어서 있었다.
“봄 한 철 버는 걸로 일 년 버티는 거지 뭐. 요즘은 수준이 높아져서 관광버스가 별로 안 올걸요? ”
그러고 보니 대형 버스는 별로 보이지 않았다. 옛날에는 단체 관광도 많았단다. 그때는 인근 시골에서 어르신들을 태운 관광버스가 한 번씩 목돈을 안기곤 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을 거라는 거였다. 왠만하면 제주도나 외국으로 많이 나가고 그런 사정이 못 되더라도 도계(道界)를 넘는 장거리 관광이나 온천 여행을 많이 가는 추세일 거라고 아내가 말했다.
간신히 공원 앞을 지나 적두병 가게에 도달했지만 막상 가게는 ‘일요일 휴업’이라는 안내문을 내건 채 셔터를 내린 모습이었다. 의외였다. 일요일 하루 수입이 평일 장사 일주일을 능가할 것이 분명한데, 이건 좀 아니다 싶었다. 눈 좋은 아내가 먼저 보고 흠을 잡았다.
“월요일에 놀던지 하지. 이 좋은 날 왜 가게 문을 닫는 게지?”
“그러게. 어디 출사(出寫)를 나가셨나?”
전문가다운 사진 솜씨가 생각나 그렇게 추정도 해보았다.
“사진이야 평일에 찍어도 잘 나오지. 꼭 일요일에 찍을 필요가 어디 있어?”
아내는 모처럼 찾은 길이 허사가 되자 못내 못마땅하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자신의 목적이 무산된 것보다는 일요일 장사를 거들떠보지 않는 가게 주인의 상도(商道)가 더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아마 공원 앞 선배 상인으로서의 어떤 배반감, 이를테면 돈 앞에는 그 무엇도 없어야 한다는, 이 바닥 상인들에게 반드시 공유되어야 할 신조가 크게 훼손당하는 것에 대한 어떤 배반감 같은 것이었던 것 같았다. 여기는 대구라는 도회가 거의 반라의 자태로 자신의 땀내 나는 곳까지도 고스란히 드러내는 곳, 바로 달성공원 앞이 아니던가? 아내는 이 점집 즐비한 욕망의 거리에 일요일 휴업이 가당키나 한 일이냐는 듯 곤혹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혹시 교회에 나가나?”
일요일 휴무를 정당화 시키려면 그것밖에 없었다. 생각해 보니 그럴 확률이 가장 높았다. 교회에서는 주일을 지키는 것을 큰 미덕으로 삼는다. 성당은 조금 달랐다. 교중 미사 후에 혼배 미사가 있어 성가대 사람들이 단체로 점심 식사를 했는데 본당 신자가 운영하는 식당에서였다. 주일이었지만 영업은 정상적으로 하고 있었다.
“그렇겠네. 그렇지 않고선 오늘 같은 날 장사를 안 할 수가 없지.”
아내도 그렇게 양해하는 것이 속이 편한 모양이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건 달성공원을, 그 누추한 욕망들의 벗은 모습들을 깡그리 무시하는 독선적인 교만이었고, 멀리서 그에게 공갈빵과 적두병을 사러 오는 우리의 선량한 귀향의식(歸鄕意識), 혹은 속절없이 고향을 떠난 자들의 말릴 수 없는 귀소본능, 그것도 아니면 고향을 버리고 떠나 어렵게 성공한 자들이 욕망하는 바 누추함 그대로의 고향을 보고자 하는 얄팍한 이기심 같은 것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도전을 감당할 만큼의 내공이 우리에게는 아직 없었다.
돌아오는 길은 시원하게 뚫려 있었다. 모두 외곽으로 나갔는지 시내길이 한결 편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내 마음은 그리 편한 것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는 추리였지만, 적두병 청년이 크리스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가 돌아온 화상(華商)일 것이라는 기존의 추리에 묘한 서술적 부조화, 이를테면 반서술(反敍述)적 동기 같은 것을 부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건 생각지도 못한 혼선이다. 나는 그를 좀더 복고적인 인물톤으로 밀어부칠 요량이었다. 사실 관계 확인을 끝까지 미루고, 환청을 핑계로 그냥 혼적인 것으로 추상될 수 있는 어떤 대물림 쪽으로 그의 존재성을 몰고 갈 심산이었다. 그가 줄곧 흑백사진만을 찍는 것도 낡은 흑백사진으로 침전되어 있는 자기 안의 과거와 화해하고자 하는, 일찍이 떠나고자 했던(무엇인가 비극적인 요소가 있으면 더 극적일 것이다) 그의 아버지나 조부와 다시 하나가 되고자 하는 그만의 예술적 동기로 해석하려고 미리 작심해 둔 상태였다. 그런데, 크리스찬이라니, 내가 애초에 생각한, 약간의 광기와 약간의 모럴과 약간의 장인적 기질을 두루 갖춘 21세기의 기예적 인간상, 이를테면 고통을 요하는 기예의 숙련을 통해 극기와 용서의 자기실현을 추구하는 그런 인간상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었다. 그런 인물들은 으레 반규범적, 반집단적, 자기초월적 기질의 소지자이기 때문에 독실한 크리스찬으로 살기에는 아무래도 적절치 않은 조건이었다. 아상(我相)이 너무 강한 것이 결정적인 흠이었다. 물론, 현실적으로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얼마든지 그런 인물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이 현실이다. 모든 선입견과 고정관념을 깨부수고 넘어서는 것이 바로 인간이지 않은가. 그러나, 그것은 현실의 문제고 내가 지금 문제 삼고 있는 세계는 어디까지나 그럴듯함의 영역, 개연성의 영토였다. 한 치의 오차, 한 순간의 우연이 있어서도 안 되는 것이 바로 허구의 세계가 아니었던가. 나는 지금 나의 내밀한 욕망에 따라 그를 허구로 재구성하려던 참이었다.
어쩌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갈 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렇게 가다가는 그는 엄연한 대한민국 사람이고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제대로 배운 청년이었지만 뜻한 바가 있어 제빵학원 같은 곳에서 제빵 기술을 익힌 후 신앙생활과 취미생활을 병행할 수 있는 자유업으로 적두병 가게를 선택한, 보통의, 자기 생활에 충실하게 임하는 모범적인 시민일 공산이 더 큰 것이었다. 조부나 아버지가 이산의 아픔을 겪은 이 땅의 화상이기는커녕 나 같은 교육자를 아버지로 두었거나 아니면 목사나 장로를 아버지로 둔 신앙인 집안의 책임감 있는 장남일 수도 있는 거였다.
그러면, 적두병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그 안에 무슨 혼이 들어가 있는 것이 될 수 없는 한 그것은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그러면, 달성공원도, 아버지도, 어머니도, 형도, 나도, 아내도 모두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그와 적두병을 매개로 엮어보고자 했던 그 모든 것들이 쓸쓸히 퇴장 당하는 형국인 것이다(지나친 엄살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지금까지의 모든 이야기들이 적두병 하나에 목을 매고 있었다는 것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그것 없이는 내가 지금까지 펼쳐 놓은 모든 것들이 싸구려 이발소 그림들이 되고 마는 것이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자 어깨에서부터 무릎까지 관절 마디마디의 근력들이 일순간에 모두, 마치 풍선에서 바람 빠지듯, 빠져버리는 느낌이었다. 그에 걸었던 기대가 사라져 버리면서 상황은 아주 열악한 방향으로 급선회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현실로 돌아오면, 그가 크리스찬이라는 것을 내가 마냥 탓할 입장은 아니었다. 성당을 나서며 아내에게 한 말이지만, 세례를 받자마자 성가대에 들어가서 신앙생활에 좀더 몰두할 수 있게 된 것이 너무 감사했다. 혼배 미사라도 있어서 한 쌍의 젊은이가 새로운 가정을 이루게 된 것을 다 같이 성가로 응원하고 축하하는 일을 하고 나면 너무 기분이 좋았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나이 지긋한 성가대원 모두가 그랬다. 박수를 칠 때도 아주 흥이 돋아나게 쳤다. 돈을 받고 하는 일도 아니고 누가 강요해서 하는 일도 아니었다. 주례를 가끔 서기도 하지만 그것과는 또 느낌이 달랐다. 화음을 이루며 아멘을 합창하고 목을 놓아 자비를 베풀 것을 청원하는 대목에서는 때로 눈물도 어리고 목이 메일 때도 있어서, 이 같은 복을 갑자기 주신 하느님이 나중에 어떤 대가를 요구하실지 두려운 심정마저 들 지경이다. 그런 내가 그가 크리스찬일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재미삼아 지금까지 써온 것들이 갑자기 황이 될지도 모른다고 엄살을 떠는 것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아무래도 그건 못난 짓이지 싶었다. 주여, 잠시나마 못난 모습을 보인 것을 용서하소서. 아멘.)
14.
처형과 동서를 생각하면 언제나 마음이 짠하다. 신혼 무렵 한국에 나왔을 때 잘 해 주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걸린다. 이제 동서도 내일 모레면 환갑이다. 언젠가 다 큰 아들아이가 그렇게 말하더란다. 엄마 아빠는 왜 미국에 와서 이 고생이냐고. 도대체 왜 평생을 고생만 하며 사느냐고, 자기 인생을 좀 살라고, 그런 말을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하더란다. 두 사람 다 무취미가 취미다. 교회에 나가는 것, 좋은 음식을 개발해서 ‘사회적 지지와 인정을 받는 것’이 전부다. 돈도 좀 벌었다. 콩쥐, 팥쥐 분류법에 따르면 그들은 100% 콩쥐다. 팥쥐의 유전자는 단 1%도 없는 사람들이다. 그 조카는 아버지를 닮아서 얼굴도 잘 생기고 키도 크고 근력도 좋았다. 생각도 깊고, 자기 관리가 깔끔하기 그지없다. 대학을 졸업하고 중국대륙에서 영어교사로 2년 있다가 우리집에 들렀을 때에는 머리를 짧게 한 채 밀리터리룩으로 일관해 밖에 나가면 다 G.I인 줄로 알았다. 내가 보기에는 그냥 짱이었다. 우리집 아이도 이종 사촌형한테 더 끌린다는 투였다. 아르헨티나에서 나서 그쪽 말(스페인어)을 모국어처럼 구사하고 미국에서 중고등과 대학과정을 마친 조카는 처형네의 긍지였다.
내국인처럼 살던 화교들이 일거에 자취를 감춘 것은 10월 유신이라는 권위주의적 압제 체제가 세상을 온통 꽁꽁 얼어붙게 만들었던 70년대 중후반 어름이었다. 화교뿐만이 아니었다. 황지우가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에서 말했던 것처럼, 이 땅에 살던 젊은이라면 누구나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가고 싶어 하던 때였다. 마지막까지 버티던 처형네도 그 끝물 무렵에 결국 아르헨티나로 떠났다. 부모 형제들이 모두 일본으로 미국으로 아르헨티나로 흩어진 마당에 자기들만 이 땅에 있는 것이 외롭기도 하였겠지만 가장 어려웠던 것은 생업을 통해서 이 땅에서의 정체성을 당당하게 확보하는 일이었다. 동서는 대구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자란 토박이였다. 나처럼 저 멀리 제주도에서 나서 편입된 얼치기 대구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세상을 떼어 매고 아르헨티나로 날아갈 수밖에 없었다. 고향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한국인 주인이 있는 식당의 주방일밖에 없었다. 고향이었지만 이 땅에서 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르헨티나 이주 십년 뒤, 처형네는 미국 입국에 성공해서 지금은 테네시주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이산(離散), 디아스포라(diaspora), 뿌리 뽑힘의 문제가 한 인간의 삶(민족 단위나 가족 단위의 이산을 포함해서)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것은 말로 다 드러낼 수 없는 차원에 속한다. 그것은 모든 면에서 인간을 구획한다. 한 번이라도 뿌리를 옮겨 살아 본 식물과 그렇지 않은 식물의 차이, 그 이상이다. 그래서 인간은 이산을 경험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나눌 수 있다. 식물에서는 옮겨 심은 것이 크게 열매 맺고 번성할 확률이 높다. 그러나 사람의 경우는 좀 다르다. 사람의 뿌리는 영혼에 닿아 있으므로 자칫 크게 한 번 상하면 회복 불능의 상처를 입게 된다. 주변에서 그런 이들을 많이 본다. 한 자리에만 있던 영혼도 마찬가지다. 뿌리와 토양이 너무 닮아가서 종내는 쇠한 토양의 힘이 그대로 뿌리로 옮겨간다. 진딧물이라도 한 번 올라오면 영원히 떨어지지 않는 경우도 생긴다. 새 양분을 받을 기회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산과 토착을 두고 어느 것이 좋다 나쁘다를 일괄해서 말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나, 대구는 아무래도 이산의 은총이 크게 한 번 내려져야만 될 땅이라는 생각이 든다. 식자층들의 사고 구조에서부터 노상(路上)의 코흘리개 문화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유아적인 배타의식이 넘쳐흐른다. 이상야릇한 오토 에로티시즘(auto-eroticism)이 도처에서 작동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게 못난 짓이라는 걸 모른다. 알 만한 사람도 ‘세상이 다 그런 것 아니냐’는 식으로 얼버무리고 넘어간다. 자기 혼자 거스르는 것이 두렵기도 하고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지도 않을 건데 왜 그런 불편을 감수하겠냐는 표정이다. 한 때 나에게도 그런 진딧물이 크게 한 번 올라온 적이 있기 때문에 그 심정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이것저것 떠나서, 서울에서 청주로 그리고 다시 대구로 직장을 옮겨 다닌 내 행투를 보면 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겪는 이산은 다소 복합적이다. 나의 일부 행적과 드러난 이력은 영낙없는 대구사람이다. 그러나 의식구조와 태생적인 출신성분은 외지인이다. 그래서 때와 장소에 따라 왔다 갔다 한다. 왔다 갔다 하는 것은 그런 외형적 요소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안쪽도 사실은 복합적이다. 나는 대구를 사랑한다. 내 치명적인 모든 것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이곳, 그리고 두 아이를 세계로 내보낸 이곳을 나는 미워하거나 경멸할 수가 없다. 그건 언어도단이다. 그 차원에서 나는 영낙없는 대구사람이다. 그러나, 대구사람 다수가 공유하고 있는 타지역에 대한 차별적이고 배타적인 특권의식, 그 유아적인 욕망의 허구성은 경멸한다. 그런 차원이라면 나는 결코 대구사람이 될 수 없다.
대구사람 타령이라니, 이런 말을 늘어놓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제임스 조이스 더블린이나 윌리엄 포크너의 요크나파토파(포크너의 고향 미시시피 지역을 메타포하는 가공의 도시)를 오마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가당치 않은 욕망이다. 쳐다보기엔 너무 높다. 사실 이 글을 처음 시작할 무렵에는, 적두병에 얽힌 남모르는 개인사 한 토막만 들춰내면 그만이다라는 생각에 그 어떤 노이즈도 끼어들 틈새가 없었다. 글을 쓴다는 일이 그만큼 낯설었다. 절필한 지가 10년도 더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쓰다 보니 은근한 욕심, 이를테면 포크너 소설에 바쳐진 헌사의 내용처럼 “현실적인 것이 묵시적인 것으로 승화”되는 글쓰기의 욕망 같은 것이 생겼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다면, 달성공원 한 곳이면 족할 것을 이리저리 옮겨 다닐 이유가 없다. 애초의 의지대로 적두병 하나만 이야기하는 것이 “마땅하고 옳은 일”(주여 용서하소서)이리라. 묵시든 예언이든 그것은 잡인들이 함부로 취할 것이 못된다.
그렇지만, 글은 언제나 의지를 거스른다. 그래서 모든 글쓰기는 항상 모험이다. 어찌 되든, 갈 데까지 가 보자는 것도 솔직한 내 현재의 심정이다. 적두병을 향한 내 사랑에는 변함이 없다. 첫사랑 아닌가. 결국 그 적두병 이야기로 이 이야기는 끝을 볼 것이다. 내 사랑이 적두병(赤豆餠)이든 적두병(赤豆病)이든 현재로선 내가 알 바 아니다.
15.
적두병으로 머리가 복잡한데 대구문협에서 <나의 문학청년 시절을 말한다>를 써 달라는 원고 청탁이 왔다. 고등학생들에게 나누어 줄 거라고 했다. 적두병을 쓸까, 첫사랑을 쓸까, 젖어미를 쓸까 망설이다 첫사랑으로 정했다. 적두병은 아예 따로 쓰는 게 나을 것 같았고, 젖어미는 고등학생들에게는 좀 어려운 이야기일 것 같았다. 그 나이 수준에서 인간이 태생적으로 판타지를 먹고 사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내용을 메타포하기에는 첫사랑이 제일 나을 것 같았다. 문학은 환상이다, 현실을 압도하는 환상이다, 첫사랑은 나에게 현실을 압도하는 환상이 무엇인지를 최초로 보여준 사건이다, 그 최초의 감정을 끝까지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 생각으로는 그런 식으로 이해를 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써 보긴 했는데 잘 되지 않았다. 쓰다 보니 문학이 아니라 첫사랑 쪽으로 그냥 가버렸다. 어쩌겠는가, 그래야 첫사랑 아니겠는가. 첫사랑 때문에 다투었다는 형과 형수의 순진성을 오마쥬하는 차원에서 소개한다.
제가 연극을 하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소년 시절, 나의 눈도 카프카의 그것처럼 크고 회색빛이었으며, 눈썹은 숱이 많고 굵어서 짙은 검은 색이었다. 카프카처럼 나도 얼굴로 말을 하기를 즐겼다. 단어 대신에 얼굴의 근육을 사용할 수 있는 경우에, 나는 늘 그렇게 했다. 미소를 짓는 것, 눈썹을 모으는 것, 좁지 않은 이마에 잔뜩 주름을 잡는 것, 입술을 앞으로 내밀거나 뾰족하게 하는 것 등, 이 모든 것이 말을 대신하는 동작들이었다. 나도 카프카처럼 몸짓을 좋아했다. 그 때문에 나는 몸짓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다. 몸짓은 대화에 부수되는 단어의 중복이 아니라, 독립된 운동 언어 자체이며 별개의 의사소통 수단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종종 자연스러움을 잃고 상대와의 거리를 만들 때 나는 늘 변명하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제가 연극을 하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하지만 제 연극이 당신들의 마음에 들기를 희망합니다. 제가 이런 짓을 하는 것은 오직 아주 잠시나마 당신들의 이해와 동정을 얻기 위함입니다.”
소년 시절의 어느 한 시점에서부터 대학을 졸업할 무렵까지 나를 따라다녔던 근원결락강박(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다는 일종의 불안)에 저항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우선 세상을 무대로 인식하는 것이었다. 심각한 것도, 존중할 것도, 무서울 것도, 아낄 것도 없는, 모든 것이 가짜인 이 연극판에서 제대로 한 번 놀아보는 것, 그것만이 오직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었다.
불패의 환(幻), 혹은 첫사랑: 연극-연극적 삶-은 현실을 그저 아무렇게나 모사하거나 회피할 뿐 근원적으로 그것을 패퇴시킬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 문학은 운명적으로, 일종의 구원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불패의 환상으로 나를 구원한다. 문학은 그래서 첫사랑이다. 이창동의 <박하사탕>은 거꾸로 가는 기차로 장면과 장면을 잇는다.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서사 기법을 사용해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그 영화에서 더 인상적인 것은 ‘첫사랑’에 대한 작가의 오마쥬였다. 어떤 거룩한 것도 첫사랑 앞에서는 무력하다. 나도 언젠가 내 첫사랑을 그리며 불현듯 삼랑진역을 찾은 일이 있다. 왜 나의 첫사랑이 삼랑진역과 겹치는지에 대해서는 스스로도 정확한 해명이 불가능하다. 다만, 다음과 같은 기억만이 있다. 서로 엇갈리기만 했던 한 소녀와의 어느 한 시점에서의 기억이다.
소녀가 아버지 홀로 남은 우리집을 찾은 것은 내가 막 집을 나선 후였다. 새벽 기차를 타기 위해 서둘러 집을 나선 지 10여분이나 되었을까, 새벽종을 치고 교회 앞마당을 쓸기 위해 계단을 내려오던 아버지는 느닷없이, 교회 마당 한 가운데 들어와 있는 소녀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 시간에 그 아이가 그 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새벽기도 왔니?”
물론 아니었다. 큰 눈을 멀뚱거리며 말없이 그저 자기를 쳐다보기만 하는 숫기 없는 머슴애를 찾아왔노라고 소녀는 말했다. 아버지는 당신은 물론 당신과 함께 한 모든 것과 영원한 작별을 고하는 투로 떠나버린 아들을 생각하며 씁쓸하게 말했다.
“일찍 떠났다. 아주 안 올 모양이다.”
일찍 혼자된 아버지는 하나 남은 아들이 자기 옆에서 고등학교를 마쳐주기를 바랬다. 그런 아버지, 그런 교회, 그런 가난, 그런 수모가 나는 싫었다. 무엇보다도 소녀에게 말 한마디 건넬 수 없는 그런 내가 지독하게 싫었다.
내가 집을 떠나던 날 소녀가 우리집을 찾았다는 것을 안 것은 한참 뒤, 아버지 생전에 내 혼사가 거론되던 무렵이었다. 아버지는 대학 졸업반이던 나에게 교회 안에서 혼처를 찾자고 했다. 아버지는 당신 마음대로 작정을 해 둔 데가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따로 사람이 있었다. 당연히, 그럴 생각이 없다고 말하는 나에게 아버지는 갑자기 소녀 이야기를 꺼냈다. 소녀가 두 번, 내가 떠나던 날과 그 해 여름에 한 번 뜬금없이 우리집을 찾았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 순간,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근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내 앞을 가로막고 있던 장막이 일순 사라졌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첫사랑이었다.
그 해 여름, 아버지를 떠나 난생 처음 대구에서의 객지 생활(그러나 나로서는 귀향이었다)을 하던 나는 상사병으로 사람이 죽는다는 말을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일주일 동안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하고 소녀 생각만 하고 누워 있었다. 모든 것이 나와는 상관없는 풍경에 불과했다. 식욕은 일찍이 멀리 달아났고 온몸의 힘은 빠지고, 뜬눈으로 지새는 밤이 이어졌다. 이대로 죽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어느날 문득 기적처럼 일어나 기차역으로 달려갔다. 죽더라도 소녀는 한 번 보고 죽을 심산이었다. 저녁 무렵 도착한 소녀의 집 앞에는 평상이 놓여있었다. 평상 위에 앉아 있던 소녀의 오빠가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방학도 아닌데 어떻게 내려왔니? 아버지가 내려오라고 하시든?”
그러나, 나는 아버지를 만나지 않을 작정이었다. 원하던 고교 입시에 실패했던 소녀는 방금 학원에서 돌아온 모양이었다. 소녀는 샤워 중이었다. 앉아서 기다리라는 오빠의 권유를 뿌리치고 나는 다시 기차역으로 향했다. 그리고, 기적처럼 다시 일어났다. 언제 그랬냐는 듯, 1년 2년, 묵묵히 일상을 소화하고 소녀의 생각을 지워나갔다.
소녀를 다시 본 것은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원하던 대학을 가지 못하고 참담한 심정으로 아버지와의 대면을 마친 후 다시 기차를 타고 올라가려던 때였다. 이 사람 저 사람 사이에서 환하게 누가 다가왔다. 그녀였다. 그렇게 세상이 환했던 적은 그 후에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 피아노를 전공한 그녀는 대구에서 열리는 콩쿨에 참가하러 가는 길이었다. 그러냐고만 했다. 그러곤 각자의 자리로 헤어졌다. 속이 울렁거렸다. 기차 멀미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저 혼미 속을 덜컹거리며 가고 있는데 그녀가 나를 찾아왔다. 아마 삼랑진역 근처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나를 데리고 열차칸 사이로 나갔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시간이나 흘렀을까, 끝내 입을 열지 않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던 그녀가 말했다.
“그만 들어가요.”
그 이후로 그녀의 소식은 접할 수가 없었다. 마치 유령처럼, 소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한 토막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때론 가슴 아프고 때론 아쉽지만 운명이러니 생각한다. 지금도 그녀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그러나 끝내 하지 못했던, 그 무엇이 징징거리며 내 안을 맴돌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나는 아직 그것을 쓰지 못했다.
16.
환상이 깨어지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네이버(naver)에 ‘적두병’을 쳐 넣는 순간 그동안의 모든 환상은 깨끗하게 짐을 싸서 떠나버렸다. 대구의 명소, 대구의 맛집 달성공원 적두병, 빵쟁이 형님 이 아무개, 빵보다 커피 맛이 더 일품인 적두병 가게, 달성공원까지 가서 적두병 맛을 못 보면 3년 재수없다는 속설 등등, 그리고 전통 혼례로 올린 최근의 가게 주인 결혼식 장면까지, 적두병과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이 망라되어 있었다.
가게 주인이 미혼이었을 것이라는 나의 추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우연히 엿들은, 살갑게 주고받는 연인과의 통화를 두고 그렇게 추리한 것인데 미처 그것이 신혼의 달콤함이라는 것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아마 나의 신혼이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 치명적인 실패의 원인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또 추측?).
실패의 예감이 현실로 막상 그 얼굴을 드러내자 오히려 더 홀가분해지는 느낌이었다. 적두병을 가지고,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적두병을 굽는 빵쟁이 청년의 인간 승리적 삶을 이용해서, 불편했던 과거와 화해하고 다가올 새 생명에 대한 격려를 아끼지 않겠다는 나의 결의(?)를 근사하게 선전하고자 했던 모종의 모색, 혹은 음모는 깨끗하게 접어야 했다. 흑심을 접으니 돌연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교묘한 트릭도 복잡한 플롯도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 말하자면 그를 주인공 삼는 소설은 이제 끝장 난 것이다. 포기가 빠른 것 또한 내 팥쥐적 캐릭터의 일부가 아니던가.
그런 와중에도, 이럴 때 한 줄이라도 더 써 놓아야 되지 않겠냐는 염이 들었다. 직업적으로 글쓰는 이들은 누구나 알 터이지만 이럴 때 써지는 글들이 대체로 순도가 높다. 마침 도서관에서 권장 도서 서평집 발간 계획을 알리고 원고청탁서를 보내왔다. 일전에 다른 의도로 초를 잡아놓았던 원고(로스쿨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위해 논술 문제를 그들의 카페에다 올려 준 적이 있다. 아마 ‘초월의지와 자기파괴본능의 상관성’이라는 주제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를 꺼내 ‘승리하는 인간’으로 제목을 정하고 마무리를 지었다.
승리하는 인간 : 대학 1학년 때 차라투스트라를 처음 만났다. 미숙한 독자에게 그는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았다. 그냥 있기는 뭣해서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혼자 웅얼거렸다. 아마 그랬던 것 같다. 혼자서 하는 말은 대화가 아니다. 그와 나는 어떠한 대화도 나누지 못한 채 헤어졌다. 그 이후로 나는 바람결에 그의 소식을 간간이 듣기만 하였다. 세월이 흐르고, 그와 다시 만났다. 다시 만난 그가 먼저 말을 건넸다.
인간은 짐승과 초인 사이에 놓인 밧줄이다. 심연 위에 걸쳐진 밧줄이다. 저쪽으로 건너가는 것도 위험하고 줄 가운데 있는 것도 위험하며 뒤돌아보는 것도 벌벌 떨고 있는 것도 멈춰 서는 것도 위험하다.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다리(橋)일 뿐 목적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인간이 사랑스러울 수 있는 것은 그가 건너가는 존재이며 몰락하는 존재라는 데 있다. 나는 사랑한다. 몰락하는 자로서 살 뿐 그 밖의 삶은 모르는 자를. 왜냐하면 그는 건너가는 자이기 때문이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중에서]
나는 그에게 이청준의 「줄」과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이야기했다. 이제 나이가 들어 머리가 허옇게 세어버린 옛친구에게 그는 물었다. 그러냐고, 갈 길이 아직도 머냐고, 아직도 ‘승리하는 인간’이 되고 싶으냐고, 그래서 아직도 줄을 탈 때 끝이 가까워 보이느냐고.
『아버지 저도 이젠 사람들 앞에서 줄을 탔으면 합니다.』
허노인은 그때 얼굴색이 조금 변했으나 온화하게 물었다.
『그래…… 그럼 줄을 탈 때 끝이 가까워 보이느냐?』
『네, 바로 눈앞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 가는 줄이 넓게 보이겠구나…….』
『그 위에서 뛰어 놀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허노인은 단호하게 말했다.
『안 되겠다!』
운은 까닭을 몰랐으나 더 대꾸하지 못했다. 18세가 되었다. 운은 허노인에게 같은 청을 들였다.
『어때, 줄이 넓어 보이더냐?』
『줄이 보이질 않습니다.』
운은 불안했으나 사실대로 말했다.
『그래, 줄을 타고 있을 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단 말이지?』
『예.』
『귀도 들리지 않고?』
『예.』
그것도 사실대로 대답했다.
『흠, 아직도 객기가 있어…….』
허노인은 턱으로 줄을 가리켰다. 운은 또 아무 대꾸도 못하고 줄로 올라갔다. 사실 운은 자신이 허노인과 같이 줄을 잘 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허노인이 줄을 타는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천정 포장을 걷어 젖히고, 넓은 밤하늘을 배경으로 허노인은 흰옷에 조명을 받으며 줄을 건너는 것이었는데, 발을 움직이는 것 같지도 않게 그냥 흘러가듯 조용히 줄을 건너가는 노인의 모습은 유령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그냥 땅위에서 하품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청준, 「줄」 중에서]
이청준이라는 기표가 없었다면 질곡의 70년대를 어떻게 보냈을까, 어느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저 ‘십리 안이 오리무중’이었을 것이다. 길을 가는 인간에게는, 그것이 줄 위의 것이든 마룻바닥 위의 것이든, 언제나 사표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는 잘 보여준다. 「줄」은 그의 예술가 소설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줄」의 허노인은 나중에 영화 「서편제」의 유봉이로 다시 우리 곁으로 온다. 그들은 모두 우리 세대의 ‘못난 아버지들’이다. 일제를 견디고, 동란(動亂)의 틈새를 헤집고 겨우 살아남은, 비겁하고 소심한 아버지를 가졌던 우리 세대에게는 아버지가 콤플렉스다. 그래서 우리는 ‘형제여, 자, 와서 나를 죽여라. 누가 누구를 죽이든 그건 내 알 바 아니다.’라고 외치는 아버지(『노인과 바다』)에 열광하고, 예술에 대한 집착으로 딸의 눈에 청강수를 붓는, 가진 것 하나 없이 미쳐 버린 아버지 앞에서 속절없이 전율하고 만다. 허노인이 자신의 삶을 하늘(줄) 위에서 마감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러한 맥락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는 예술가의 삶을 그 극한에서 보여주는 기표, 그저 이야기로만 떠도는, 텅 빈 시니피앙이면서, 동시에 우리 세대가 꿈에서나 만날 수 있었던, 당당하게 운명 앞에 자신을 던지는 아버지, 그 장엄한 대상 이미지였던 것이다. 그런 아버지, 하나의 표상으로 장엄한 대상이 되는 인간은 헤밍웨이의 소설에서도 언제나 화두다. 다음 장면은 가히 압권이다.
다음번 회전에서 그는 거의 고기를 손아귀에 넣을 뻔했다. 그러나 또 고기는 바로 서더니 유유히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네 놈이 나를 죽이는구나, 고기야 하고 노인은 생각했다. 그러나 너는 그럴 권리가 있다. 나는 지금껏 너보다 위대하고 아름답고 침착하고 고귀한 놈을 본 일이 없다. 형제여, 자, 와서 나를 죽여라. 누가 누구를 죽이든 그건 내 알 바 아니다.
자, 이젠 또 머리가 희미해지나 보다고 생각했다. 머리를 맑게 식혀야만 한다. 머리를 맑게 식히고 어떻게 하면 사나이답게 고통을 견디어 내느냐를 알아야 한다. 아니면 고기처럼이라도, 하고 그는 생각했다.
「정신 차려라, 머리야.」
그는 자기 귀에도 거의 안 들릴 만한 소리로 중얼댔다.
「정신 차려.」
고기는 두 번이나 더 회전했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모르겠다, 하고 노인은 생각했다. 그때마다 기절할 것만 같았다. 모르겠다, 그러나 한 번 더 해보자.
그는 한 번 더 해보았으나 고기를 엎어놓았을 때는 자신도 정신을 잃고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고기는 도로 자세를 바로 일으켜 거대한 꼬리를 물 위로 휘두르며 유유히 달아나 버렸다.
다시 한 번 해보자, 하고 노인은 다짐했다. 그러나 두 손은 부풀어서 물렁물렁해졌고, 눈도 가물거리며 순간적으로만 잘 보일 뿐이었다.
그는 다시 한 번 해보려고 했으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 하고 그는 생각했다. 시작도 하기 전에 기절할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다시 한 번 해보겠다.
그는 그의 모든 고통과 남은 힘 전부와 먼 옛날에 가졌던 긍지를 통틀어 고기에게 고통을 주도록 내던졌다. 고기는 그의 곁으로 다가와서 유유히 그 곁을 헤엄쳐 가며 주둥이가 뱃전에 닿을 정도로 다가왔다가 스쳐가기 시작했다. 몸집은 길고 넓고 자색으로 아롱진 은빛으로 빛나고 그 크기가 끝없이 크게 보이는 덩어리가 배를 지나쳐 가려고 했다.
노인은 줄을 밑에 놓고 그것을 발로 딛고 서서 작살을 들 수 있는 데까지 높이 쳐들어 있는 힘을 다하여, 아니 새로이 쥐어 짜 낸 마지막 힘을 다하여 고기의 옆구리를 향해 사람의 가슴 높이만큼 높이 솟아 있는 그 거대한 가슴지느러미 바로 뒤를 겨누어 고기 옆구리를 내리찔렀다. 쇠가 고기의 살 속을 뚫고 들어가는 감촉을 느꼈으며, 그는 작살에 몸의 중량을 의지하여 있는 힘을 다하여 더욱 더 내리밀었다.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중에서]
헤밍웨이가 주는 감동은 무엇보다도, 그가 묘사하는 ‘행동의 깊이’에서 나온다. 그 부분은 단연 압도적이다. 묘사의 힘이 모든 관념을 압도한다. 잡은 돌고래를 해체하는 대목을 한 번 보자. ‘그는 고물로 돌아가서, 몸을 틀어서 어깨 너머로 왼손에 줄을 잡고 오른손은 칼집에서 칼을 뽑아들었다. 이제는 별들이 나와 있어서 돌고래가 똑똑히 보였다. 그는 칼날을 고기 머리에 꽂아 고물 밑에서 끌어냈다. 그것을 발로 누르고 칼로 항문에서 아래 끝까지 재빠른 솜씨로 배를 쭉 갈랐다. 그 다음 칼을 놓고 오른손으로 내장을 깨끗이 긁어내고 아가미를 깨끗이 잡아뜯었다. 밥통이 묵직하고 미끈미끈하기에 갈라 보았다. 날치가 두 마리 그 안에 들어 있었다. 아직도 싱싱하고 단단하기에 두 마리를 가지런히 밑에 놓고 내장과 아가미는 뱃전 너머로 휙 던져 버렸다. 던진 것이 물속에 인광의 꼬리를 남기고 가라앉았다. 돌고래는 이제 별빛을 받고 싸늘해 보이고 문둥이처럼 희끄무레한 색깔이었는데, 노인은 오른발로 머리를 밟고 한쪽 껍질을 벗기었다. 그런 다음 뒤집어 가지고 나머지 한쪽 껍질을 벗기고, 머리에서 꼬리로 칼을 넣어서 두 쪽으로 갈라놓았다.’ 웬만큼 어부 생활을 해보지 않고서는 쓸 수 없는 경지다. 헤밍웨이는 수렵, 낚시, 복싱 등 자신의 관심과 취향을 행동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에 몰두했다. 그는 그러한 ‘행동의 깊이’를 통해 삶의 깊이를 측정한다. 그리고 자신만의 언어로 그것을 표현해 낸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차라투스트라가 말한 ‘황금의 말(言)’이 된다.‘황금의 말 - 말과 행동의 상호텍스트성 - 승리하는 인간’은 윌리엄 포크너의 화두이기도 했다. ‘기계는 오래 견디고 동물은 생존한다. 그러나 오직 인간만이 승리할 수 있다’라고 노벨문학상을 받으며 그는 말했다. 인간만이 지닌, 자비와 희생과 명예를 위하여 투쟁할 수 있는 영혼과 정신, 그리고 그것을 실어나르는 영원히 지칠 줄 모르는 작은 목소리, 그리고 그 양자 간의 상호텍스트성이야말로 위대한 모든 작가들의 관심사였음을 알 수 있다.
17.
아내와 나는 바야흐로 제2의 신혼이다. 과년한 큰 딸은 서울에서 아등바등 살고 있고, 한창인 둘째 놈은 군에 들어가서 푹푹 썩고 있다. 둘 만의 시간이 대체로 오붓하다.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듣고 싶은 노래를 튼다. 임희숙의 「첫사랑의 종」도 좋고 최백호의 「영일만 친구」도 좋고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의 「찬찬」도 좋고 니나 시몬의 「미시시피 갓댐」도 좋다. 식욕이 있으면 밥을 짓고 없으면 커피 한 잔, 적두병 하나로 끝이다. 참, 적두병은 이미 다 떨어졌고 지금은 며칠 전 개업한 아파트 앞 파리바케트에서 사온 팥도넛을 적두병으로 여기며 먹고 있다. 남들이 보면 여유가 넘쳐흐른다고 할 것이다. 생각해 보면 아내와의 이런 여유있는 부부생활은 난생 처음이다. 30년 만에 처음 맛보는 자유도 있다. 내가 내 방에서 무엇을 하던 아무런 간섭이 없다. 전 같으면 이쯤이면 누군가가 들어와서 ‘뭐 하세요?’라고 찝쩍될 것을 지금은 새벽부터 일어나 자판을 두들겨도 아무도 아는 체를 않는다. 제2의 신혼이라고 말을 꺼냈지만 사실은 우리에겐 신혼이란 개념이 없었다. 아무 것도 없이 군인이던 시절 결혼을 해서 처가에 얹혀살며 생활이란 엄한 시어머니 밑에서 혹독한 시집살이를 견뎌야 했다. 따로 산 기간도 신혼치고는 꽤 길었다. 겨우 합쳐서는 사랑으로 모든 것을 ‘건너가야’ 했는데 우리는 그러지 못했다. 아직 어렸다. 하루하루를 급급히 보냈다는 기억밖에 없다. 서울에서 살 때의 일이다. 공릉동 어디쯤이었던 것 같은데 신접살림으로 장만한 농짝이 문을 열 때마다 코앞으로 당겨져 나왔다. 연립주택이었는데 베란다를 확장해서 방을 넓힌 부분에 난방이 들지 않아서 얼음이 얼어 있었던 것이다. 그 사이에 농 바닥은 시커멓게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걸 보고 내 살이 썪어 문들어지는 느낌이었다고 말하면 지나친 과장일까? 한 번은 청계천에서 흑백 TV를 2만원인가 주고 사오던 때였다. 하루 종일 타향의 무관심 속에서 혼자 지내는 아내가 안쓰러웠다. 버스에서 내려 TV를 지고 철길을 건너는데 갑자기 폭설이 내리면서 사정없이 길바닥 위에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 큰맘 먹고 산 물건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몸을 제대로 사리지 못했다. 크게 구른 편 치고는 다행이 큰 부상은 없었지만 사나흘 호되게 아팠다. 아내는 누가 TV 보겠다고 했느냐며 된통 역정을 냈다. 어쨌든 우리에게는 신혼 시절 서울에서의 추억이 온통 꽁꽁 얼어붙어 있다.
돌이켜 보면 아무 것도 아닌데 그때는 사는 게 참 팍팍했다. 그 시절이 아마 소년 시절부터 줄곧 나를 따라다니던 세계와의 불협화음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그래서 그때 소설이 내게 왔는지도 모르겠다. 소설이 내게 온 것, 내가 소설가가 된 것은 그야말로 ‘사건 그 자체’였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내 주변의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그만큼 내가 세상을 팍팍하게 살아왔다는 거였다. 사람들은 내가 소설가가 된 이후로 많이 부드러워졌다고들 말했다. 요즘에 와서 또 그런 소리를 종종 듣는다. 얼굴에 나는 털을 깍지 않고 다니니까 그런 말들을 한다. 그것도 ‘사건 그 자체’인 모양이다.
나에게는 좋든 싫든 나에게 영향을 주는 모든 것을 ‘사건 그 자체’로 여기는 습성이 있다. 그것도 아마 어릴 때부터의 세계와의 불협화음이 가져온 나름대로의 생존전략이었을 것이다. 어떤 사건이든 그것을 두고 긴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뒤가 무르다. ‘사건 그 자체’는, 앞뒤를 제거하고 보면, 늘 받아들일 수 있는 그 무엇이다. 내가 보기에 사람들은 생각이 너무 많다. 그것이 오히려 병폐다. 그냥 넘기면 될 것을 넘기지 못해 병으로 만든다. 종종 단군신화를 예를 들어 그 생각의 허망함에 대해서 학생들에게 말하곤 한다. 먼저 묻는다. 우리는 환웅의 자손인가, 웅녀의 자손인가. 부계가 중요한가, 모계가 중요한가. 굳이 택하자면 어느 쪽을 택하겠는가. 대다수 학생들은 부계 혈통의 중요성을 말한다. 그러면 다시 묻는다. 굳이 하나만 택한다면 이야기의 진실성 차원에서 어느 쪽이 더 뻥인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인가, 아니면 굴속에서 튀어나오는 건가. 우리의 시작이 어디에서부터인가를 말하는 이야기이므로 일단 인간은 배제된다. 식물인가 동물인가 신인가. 어느 쪽이 현실적으로 우리와 가장 가까운가. 학생들은 그때서야 내 의도를 알아채린다. 본디 아비는 말이고 어미는 몸이다. 아비는 바람이고 어미는 땅이다. 그래서 어미는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고 아비는 없는 것을 통해 메타포하는 것이다. 곰 토템을 가진 부족이 호랑이 토템을 가진 부족을 누르고 이주민 세력과 연합해 나라를 세운 것이라는 둥,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그를 수장으로 한 이주민이 바로 기마민족이었음을 뜻한다는 둥, 별의 별 생각들이 너무 많다. 그것들은 이제 다 허랑된 이야기들이라는 것이 밝혀진 상태다. 그런 생각들은 이야기를 해석할 당시의 필요일 뿐 사건의 진실은 아니라는 것, 그러므로 사건의 진실은 항상 그 ‘사건 그 자체’일 뿐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적두병이 ‘사건 그 자체’일 뿐이라는 것이 명백해진 이상 내가 할 일은 분명해졌다. 그것을 통해 우회하지 않고 나에게 ‘사건 그 자체’였던 것들을 간추리는 일이 필요하지 싶었다. 단도직입(單刀直入), 직설의 화법 이외에 내가 가진 것은 이제 없는 것이다.
18.
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원초적 장면은 몇 장이나 될까? 바닷가로 내려서자 진하고 낯익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일행들 속에서 비위가 약한 사람이 있는지 ‘이게 무슨 냄새지?’라며 작은 어촌의 체취를 타박하는 소리도 새어나왔다. 해초와 생선 썩는 냄새가 마치 병자(病者)의 오래된 땀내처럼 후각을 자극했다. 그러나 방파제 위로 올라서자 이내 그 고린내들은 시원한 해풍에 실려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는 등대. 확 터진 망망대해를 앞에 두고 서 있는 내 모습이 갑자기 수 십 년은 거슬러 올라가 유년의 어느 한 때를 맞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건 환각이다.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마치 원점으로 돌아온 느낌이다. 이전에는 마산의 바다 냄새가 내 바다에의 향수를 독점적으로 통치하는 것으로만 알았다. 그런데 요즈음 생각은 다르다. 연전에 울릉도로 대학사(大學史) 자료 수집을 위한 인터뷰 여행을 떠났을 때 어렴풋이 그런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3박 4일 동안 나는 고향에 온 듯한 착각 속에서 차분하게 일정을 소화했다. 어디에서도 파도 소리를 듣지 않고는 잠을 잘 수 없는 곳이었다. 그때는 그저 ‘왠일이지?’하는 정도의 의아심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 지리산으로 대학사 편집위원회 M.T.를 갔을 때 비로소 나도 영일만 친구처럼 ‘바다가 고향’이라는 것을 알았다. 고작 1박 2일의 여정이었는데 갑갑해서 혼이 났다.
그것이 제주도 태생이기 때문이라고, 마당 앞까지 바닷물이 철썩거리는 궁벽한 어촌에서 태어난 까닭이라고 굳이 우길 생각은 없다.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신 지금, 내가 태어나서 그곳에서 몇 년이나 머물렀는지, 그리고 어떤 체험이나 사건이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길이 전혀 없다. 짐작하기로는 태어나서 2~3 년 머물렀지 싶다. 이건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태어나서 처음 육지에 올라 기차를 타고 상경할 때의 기억이 지금 나에게는 남아 있다. 목포역이었지 싶은데 기찻길이 엿가락처럼 휘어지면서 기차 밑으로 들어오던 것을 인상 깊게 본 적이 있다(그래서 지금도 ‘목포의 눈물’을 들으면 그 기억이 새롭다). 엄마 품에 안겨서였다. 그 후 서울과 대전에서의 기억, 그리고 대구에 내려와서의 기억 등을 종합해 보면 세 살 이상은 될 수 없는 나이다. 대구에 내려와서도 한참을 학교에 입학하지 못하고 ‘절대적인 고독’ 속에서 보낸 기억이 생생하다. 형이 같은 학년을 세 번 다닌 적이 있다고 증언한 것을 토대로 역산해 보면 그런 나이가 나온다. 그러니 고작 2, 3년의 시간이, 그것도 기억도 없는 시간이 평생을 통치하는 원초적 장면이 된다는 것은 프로이트의 심복이 아닌 한 승복하기 어려운 이야기라는 것도 인정한다. 그러나, 지금의 심정은, 기억은 내가 모르는 것까지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바다와는 달리, 내가 뚜렷이 기억하는 원초적 장면도 하나 있다. 그것이 원초적 장면이라는 것은 이미 청년기에 깨달았다. 누가 나보고 스타일상으로 종교적, 특히 기독교적이라고 그랬다. 그가 나의 어떤 면을 두고 그렇게 표현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여튼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그는 통찰력과 감성을 겸비하고 좋은 글을 많이 쓰던 사람이었다. 내가 함부로 그의 말을 흘려들을 수는 없는 처지다. 그래서 당시 종교를 등지고 살고 있었지만, 그의 말을 듣고 한 번 뒤를 돌아다 본 적이 있다. 그 때, 문득 떠오른 것이 어머니의 성경책이었다. 다섯, 여섯 살 때의 기억이다. 자줏빛이던가 누런 색깔이던가, 어쨌든 두꺼운 가죽으로 싸여진 책이었고, 우둘투둘한 촉감이었고, 상당히 큰 편이었으며, 표지 안쪽에 그림이 그려져 있는 책이었다. 내가 원초적 장면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 그림이다. 낯선 복장에 마치 터번 같은 것을 쓴 이가 그것도 없이 피흘리며 기진맥진 쓰러져 있는 사람을 무릎 위에 누인 채 물을 먹이고 있는 장면이었다. 배경은 마치 사막과도 같은 느낌을 주는, 군데군데 돌인지 바윈지가 불협화음을 내는 황량한 벌판이었던 것 같다. 물론, 그 전에도 교회도 따라 다니고 심방온 사람들과의 가정예배도 자주 보고 해서 기독교적 아우라가 낯선 것은 아니었다.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는 애창곡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그 그림을 보는 순간 나는 왜 이런 고통스런 그림이 있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치 뾰족한 쇠붙이로 무언가를 깊게 후벼파는 듯한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며칠을 두고 그 그림은 나를 괴롭혔다. 그 그림에 대해서 어머니에게 어떤 질문을 했는지는 기억에 없다. 다만, 어머니가 한 말은 기억에 남아 있다.
“서기 2000년쯤이면 예수님이 재림하실거야. 그러니까 그때까지는 착하게 살아야 돼.”
피흘리던 사람이 예수라는 것, 그는 부활하여 재림하는 구세주라는 것, 내가 어른이 되는 어느 시점에 그 사건이 일어날 지도 모른다는 것 등이 그때 어머니한테 들었던 내용이었다.
그것이 원초적 장면이라는 것은 이번 천주교 입교에서도 확인이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교리공부를 하고 영세를 받는 6개월 동안이나, 성가대에 들어와 신참으로 이것저것 익히고 있는 과정이 나에게는 마치 예정이나 되었던 일처럼 아무런 스스럼이 없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냥 ‘사건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래서 혹자가 “힘들긴 힘든 모양이지. 하느님을 다 찾고” 식으로 나의 천주교 입교를 ‘사건화’해서 말할 때에는 그저 빙긋 웃고 만다.
성가대에 들어와 처음 가지는 M.T.였다. 보경사가 있는 포항의 청하 내연산을 오른 뒤, 화진 해수욕장으로 나와서 점심식사를 하고 바닷바람을 쐬었다. 보경사는 대학 1학년 때 처음으로 M.T.를 갔던 곳이다. 반나절 동안이나 이리저리 차를 갈아타고 온 곳이었는데 한 시간여 만에 뚝딱 도착했다. 몇 년 전에 아내와 함께 훌쩍 다녀가기도 했던 곳이라 낯이 많이 익었다.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또 공갈빵 이야기를 꺼냈다.
“적두병 가게는 몇 시에 문을 닫나?”
일전에 실패를 본 것을 이번에는 만회하고 싶다는 투였다.
“밤 열 시까지는 할껄?”
얼핏 그런 문구를 어디선가 본 것 같았다.
“그렇게나 오래? 공갈빵이나 사러 갈까?”
“그럴까?”
“아냐. 어린이날이라 무진 복잡할거야. 오늘 같은 날은 재료도 일찍 떨어질지도 몰라. 어제 사놓은 빵도 있잖아.”
아내는 그렇게 자신의 제안을 거두어들였다. 그러자고 했다.
19.
그러나, 원초적 장면이라는 것이 과연 있기나 한 것일까? 문득 그런 의문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프로이트는 그것들이 후일 반복적 장면으로 다시 나타난다고 했다. 그래서 때때로 그 주인을 들볶는다는 것이다. 나는 인간이 그렇게 무엇에 묶여있는 존재라는 것이 좀 미심쩍다. 그것도 생후 몇 년 안쪽의 경험에 말이다. 만약 그런 가설이 ‘마땅하고 옳은 것’이라면 우리는 모두 수인(囚人)이다. 스스로 마음의 감옥에 갇혀 사는 죄수다. 자신의 죄목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우리는 평생 갇혀 사는 자들이다. 한 때는 그럴 것이라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요즈음은 그런 식으로 ‘사소한 것에서 찾아내는 심오한 의미’의 역할에 대해 믿음이 덜 간다. 인생 자체가 그렇게 심오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다. 다만 ‘사건 그 자체’일 수밖에 없는 것들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때도 많다.
적두병만 해도 그랬다. 인터넷 검색 이후로 최근 몇 년간의 ‘빵쟁이 형님’의 활약상을 알게 된 지금, 그것이 어떤 원초적 장면이 다시 가면을 쓰고 내 앞에 나타난 것이라는 가설은 아예 설 자리를 잃고 만 듯했다. 그에게 적두병에 얽힌 원초적 장면이 있었고 알고 보니 그것이 내 안의 어떤 것, 즉 나의 원초적 장면에 대한 동심원과 같은 메타포가 되더라는 것이 이 글을 처음 쓸 무렵의 내가 꾸민 음모였다. 그러나 그러한 플롯은 이미 오래 전에 물 건너간 상태다. 당연한 일이었다. 팥떡 하나에 의미가 있다면 얼마나 있겠는가. 그렇게 호락호락 세상 일이 마음먹은 대로 되어줄 리 만무했다.
향수 사건 이후로 거의 의절(?) 상태인 딸아이에게 미국 대학에서 장학금을 주기 어렵다는 회신이 왔다. 미국 경기가 좀 안 좋다는 것이 그런 결과를 빚게 된 모양이다. 딸아이가 가겠다는 대학은 등록금과 생활비가 너무 비싸 장학금이 없이는 아예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지금 다니는 대학에서 학위를 받든지 아니면 국내의 기업 장학금을 받아서 유학을 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딸아이도 그렇게 아등바등 미국 유학에 매달리지는 않을 심산인 모양이었다. 학부 때 하와이에 일 년 다녀오더니 황량한 시골에 대학 하나 덩그러니 있는 데로는 가지 않겠다고 했다. 그래야지, 나는 그게 우리 팥쥐족들이 취할 당당한 태도라고 생각해서 즉석에서 동의해 마지않았다. 마지막 학기까지 코스를 다 밟은 상태이니 그냥 국내 박사로 방향을 선회할 수도 있다는 태도가 바람직한 것이라고 거들었다. 그만하면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자기 안에서 최선을 다해서 안 되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자기를 넘어 어디로 건너간다는 것은 언제나 모험이다. 모험은 마지막 수단이다. 그리고 그런 수단은 벼랑 끝에 몰린 자들에게만 필요한 것이다. 콩쥐들이나 할 짓이지 팥쥐가 할 일은 아니었다.
조만간에 상경해서 화해를 해야 될 것 같다. 다소 의기소침해 있을 아이에게 약간의 격려도 필요할 것 같다. 엄마와 함께 하는 대청소와 밑반찬 장만(아내의 밑반찬 솜씨는 정평이 나 있다), 그리고 쇼핑 나들이 같은 것이 필요할 것이다. 향수 사건 이후, 딸아이가 아버지의 신경증(딸아이의 관전평이다)을 3개 항목으로 자세히 나누어 자기 엄마와 문자행위를 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미숙한 팥쥐들의 일반적인 속성이 자기는 팥쥐가 아닌 줄로 안다는 것이다. 딸아이는 외모만 그럴 뿐 속은 아버지를 전혀 안 닮은 것으로 자부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딸아이는 거의 나와 판박이다. 팥쥐 중에서도 상 팥쥐다. 그러니, ‘아빠는 싸이코다’라고 문자행위를 하면 할수록 자신도 싸이코가 되어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혹은, 괴물과 대항하다 괴물이 되고 마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형과 오랜만에 통화를 했다. 고모님네 혼사에 대한 보고도 겸해 전화를 걸었다. 형의 목소리는 늘 그렇듯이 밝았다. 형은 마산에서 칩거 생활을 하고 있다. 주일에 교회 나가는 것 빼고는 사람 만나는 일이 거의 없다. 취미생활도 없고 술 담배도 하지 않는다. 그러니 건물 주인은 평생 건물을 맡기겠단다. 눈만 뜨면 나와서 구석구석 챙기니 누가 좋다고 하지 않겠는가. 자청해서 감옥을 하나 만들어 사는 셈이다. 형은 군인 간 조카 소식을 전했다.
“군산에 가 있다. 비행전대 법무관이란다.”
간단하게, 그러나 당당한 어조로 형은 말했다. 조카도 형을 그대로 빼닮았다. 머리 좋은 것도 물려받았다. 한 학기 휴학을 해서 3.5학년에 고시에 합격했다. 언젠가 출장 관계로 조카가 다니던 대학에 가서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다. 마침 친구가 학장이던 사대와 법대가 가까이 있어서 사대 학장실로 불렀다. 그 해에 1차에 합격했다고 말하는 조카에게 말했다.
“그럼, 내년에 2차를 해야 되겠다. 그런 일은 미루면 안 되는 것 아니겠니?”
“그래야죠, 삼촌.”
대답이 시원시원했다. 조카지만 아들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놈도 팥쥐군, 그 당시 그런 분류기준이 있었다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이제 와서 밝히는 일이지만(아내가 알면 속상해 할 것 같다) 나는 ‘한 가지는 꼭 들어주는 소원’을 빌 때 조카의 영달을 빌었다(팔공산 갓바위에 두 번 올라갔었다). 우리집 아이의 입시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도 형의 몰락을 보상해 줄 수 있는 조카의 고시 합격이 더 급했다. 지금도 나는 그 일에 후회가 없다.
나도 아들 아이 소식을 전했다. 우리는 모두 육군이었는데 아들들은 모두 공군이다. 장교와 사병으로 나뉘었던 것은 반대로 바뀌었다. 그렇게 오락가락 하는 것이 인생인 것 같다.
형의 원초적 장면은 어떤 것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형의 몰락, 그리고 형의 수감(收監), 그것들을 ‘사건 그 자체’로만 보기에는 우리 인생이 너무 우연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닌가라는 염이 치고 올라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형에게 어떤 원초적 장면이 있는지를 내가 알 수는 없는 일이었다. 형과는 다섯 살 터울이지만 늘 학교는 같이 다녔다. 형이 같은 학년을 서너 번 다녔기 때문이다. 아마 제주도에서부터일 것이다. 형이 학교만 들어가면 이사를 갔다. 전학 절차를 밟는 것이 아니라 기다렸다 또 새로 입학을 했다.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나는 자세히 모른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형은 그러니 자기 동기들보다 3년 정도 학교를 늦게 다닌 셈이다. 학교를 같이 다니긴 했지만 형과 함께 잠을 같이 자면서 생활을 같이 한 것은 고등학교 시절 1년뿐이었다(그것마저도 부산의 고모님댁에서 기숙해보려던 것이 좌절되면서 어쩔 수 없이 선택된 피치 못할 동거였다. 형은 내가 대구로 다시 오는 것을 극구 말렸다). 그 전에는 한 집에서도 각방을 쓰거나 이산(離散)을 당해서 따로 살았다. 1년간 같이 동거할 때도 형은 고3이라 나름대로 바빴고 나도 공부와 교회, 그리고 서클 활동으로 바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서로를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연탄불을 살리지 못해 밥을 짓지 못한 것을 두고 형이 야박하게 타박하는 것이 너무 야속해 크게 대들었던 일을 빼고는 형과 ‘터놓고 한 대화’가 거의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형과 나는 가깝고도 먼 사이였다.
그런 형과 대화를 가지기 시작한 것은 형이 마산에 정착한 이후였다. 둘 다 가정을 이루고 바쁘게 살 때였다. 비로소 나는, 형이 ‘강철로 된 무지개’가 아니란 걸 그 때 알았다. 형은 생각보다 여렸고 생각이 많았다. 다행히 아이들이 착하고 공부를 잘해주어 주로 그쪽에서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다. 아마 그때부터 형이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것 같다. 형은 아버지가 교회 일을 볼 때에도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사찰 아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고 사람들이 수군대더라. 눈 딱 감고 한 시간만 앉아 있으라우.”
형은 회사에 나가지 않는 일요일에도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무엇에 쓰려는지 카타카나니 히라카나니 하는 일어공부에만 열중이었다. 형은 아버지의 권고를 따르지 않았다. 정작 교회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부터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늙은 형에게서 아버지를 본다. 형은 아버지를 닮았다. 외모보다 분위기에서 더 그렇다(외모는 내가 더 닮았다). 말년의 아버지가 다시 재림하신 것 같다. 그래서 더 그의 노년이 쓸쓸하지 않기를 빈다. 지나간 모든 것을 그냥 ‘사건 그 자체’로 놓아주고, 정말이지 남해 땅 어느 곳에서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 있기를 빈다.
형이 기독교에 입문한 것을 어머니와 연관지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 동안은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만 생각해 왔다. 그런데, 형의 원초적 사건은 무엇이었을까라는 염이 뇌리를 맴돌면서 문득,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그게 아마 어머니가 형과 나에게 남긴 마지막 그림일 것이다. 그 그림이 성화(聖畵)가 되어 형을 교회로 불러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때였다. 어머니와 형, 그리고 나는 ‘판사 할아버지’의 관사로 오르는 오르막길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그 길은 지금 차로 올라도 여전히 가파르다. 그 길을 어머니는 망연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엄두가 나지 않으셨던 것 같다. 자세한 것은 몰랐지만 어머니는 폐에 문제가 있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의사의 진단을 이미 받아놓은 상태였다. 형은 다음 학기 등록금을 마련하러 마산에 내려왔지만 아버지가 가진 돈은 겨우 내일 당장의 호구지책 정도만을 마련할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다. 마산 지원장으로 있던 ‘판사 할아버지’가 유일한 출구였다. 어머니는 우리를 데리고 관사로 향했다.
그 관사에서의 아침을 나는 잊지 못한다. 울타리처럼 집을 둘러싼 향나무들, 작은 연못 안의 잉어들, 작은 배들이 오고가는 맑고 푸른 합포만, 눈부시게 떠오르는 태양, 오랜만에 맡아보는 뜨거운 쌀밥과 고깃국 냄새, 그 모든 것이 지금도 하나의 3D 영상의 입체 그림처럼 순서 없이 재생된다. 할머니는 다정하고 인자한 모습으로 우리를 맞았다. 할아버지는 별다른 내색이 없으셨다. 할아버지 할머니라고 불렀지만 촌수가 그런 것이고 실상은 이제 막 중년에 접어든 분들이셨다. 수원 고농(지금의 서울대 농대)을 나온 외할아버지가 황해도 도청에 근무하면서 자식처럼 데리고 다니며 공부를 가르친 배다른 동생이 바로 ‘판사 할아버지’였다. 그러니까 어머니에게는 오빠 같은 삼촌, 그리고 우리에게는 외삼촌 같은 작은 외할아버지였다.
형은 무사히 그 다음 학기를 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마지막 어머니의 그림은 나에게 지워지지 않는 큰 파열음으로 남아 있다. 어머니는 관사로 향하는 그 가파른 오르막길을 채 열 걸음도 오르지 못해서 피를 토했다. 주저앉아 선혈을 쏟아내는 어머니를 보는 순간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캄캄했다. 나는 거기서 어머니가 영영 우리를 떠나는 줄 알았다. 아, 이렇게 어머니가 죽는구나. 어쩔거나, 어쩔거나, 안절부절 울음을 터뜨리는 나를 보고 형은 인상을 찌푸렸다. 어머니는 그렇게 한참을 주저앉아 있다가 다시 일어섰다.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올라가는 어머니를 형은 앞에서 조심스럽게 이끌었다.
우리가 관사에서 하루를 머문 것은 피를 토하던 어머니의 자리보전 때문이었다. 그 관사에서의 아침. 그 찬란함을 기억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었는지, 아마 형과 나를 빼고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 누구도 모를 것이다.
20.
형이 어머니의 아들 연인(son lover)이었다는 것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 되고 있었다. 언젠가 쿠로자와 아키라의 영화 「라쇼몽(羅生門)」을 대학원생들과 같이 본 적이 있었다. 그때 우리가 인상적으로 접했던 것이 “진실은 없다. 있는 것은 현실(사실) 뿐이다”라는 한 영화 평자의 해설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 입장에서 각자의 현실을 가질 뿐이라고 영화는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랬다. 우리가 가진 지상의 것으로는 누구에게나 통하는 보편적인 진실을 만들어 낼 수가 없는 법이다(나는 ‘카톨릭’이란 말에 그런 이념이 들어 있다는 것을 입교 후에 비로소 알았다). 내가 요즘 즐겨 쓰는 ‘사건 그 자체’라는 말과도 어느 면에서는 통하는 것 같았다. 형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가 어머니의 아들 연인이었다는 것이 분명한 현실이었다.
현실을 증명하는 증표는 얼마든지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애국가 지휘 사건’이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형이 4학년 때의 일이다. 하루는 선생님이 나를 불러 애국가 지휘를 하라고 말씀하셨다. 불행히도 그 때는 내가 애국가가 4분의 4박자라는 것을 모르고 있던 때였다. 엉거주춤 하고 있는데, 선생님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반장이 그것도 못하느냐는 거였다. 거기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다.
“어떻게 자기 형 반도 못 따라가냐?”
선생님은 역정을 내었다. 그 일이 그렇게 역정을 내어야 하는 일인지는 지금도 잘 이해가 안 간다(어머니는 우리 교실에는 오지 않았다). 결과는 참혹했다. 부반장으로 강등되고 그 해 내내 기가 죽어지내야 했다. 그러나, 더 섭섭했던 것은 어머니의 태도였다. 자초지종을 들은 어머니는 그냥 그랬냐는 투였다. 항의도 동정도 없었다. 그것을 나는 어머니에게는 아들 하나면 충분했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악의적이라고 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또 있다. 역시 같은 해 일어났던 일이다. 형과 내가 학교 대표로 백일장 대회에 출전했던 때의 일이다(교내 백일장에서 최연소 산문 가작 입선자가 나였다). 대학에서 주최하는 백일장이었다. 공교롭게도 담임 선생님이 지도교사였다. 운문부로 출전한 나는 시제를 보고는 실망을 금할 수가 없었다. 고구마, 달밤, 전깃줄. 그런 제목들을 칠판 가득 적어놓고는 하나 선택해서 시를 지으라고 했다. 그건 좀 아니다 싶었다. 그래서 아무렇게나 써서 내고 나왔다.
“아직 교실 못 찾았니?”
어머니는 그렇게 물었다. 다 쓰고 나왔다고 하니까 피식 웃으셨다. 그러고는 그만이었다. 가타부타 말씀이 없었다. 시간을 채우고 나온 형은 3등을 해서 대학 마크가 새겨진 메달을 전체 조회시간에 교장선생님에게 전달받았다(아마 그 때 내가 들어갔던 교실이 지금 내 연구실 아래 어디쯤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대학에서 그런 백일장을 주최하는 일이 없어졌다. 시제를 낼 일도 심사를 할 일도 별로 없다. 다만, 치과협회에서 주관하는 건치 주제의 글짓기 대회 같은 데서 심사위원으로 오라는 전갈은 가끔 받는다). 그때도 나는 어머니의 시선 안에 없었다는 것이 확실하다. 하는 일마다 탈락하는 아들에게, 승승장구하는 아들을 앞에 두고, 눈길을 줄 어머니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 정도만 가지고 내가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자식, 혹은 앞으로 버림받을 자식이라고 생각했다면, 당시든 훗날이든, 지나친 자학이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어머니에게 형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한 것은 대구에서 마산으로 내려간 그 해 여름이었다. 아버지는 시장에서 과일 노점을 열었다. 대자(大慈) 유치원인가 하는 절에서 운영하는 유치원 담장 아래서였다. 자리보전을 하고 누워 있던 어머니도 한번 씩은 노점으로 바람을 쐬러 나왔다. 그런 어머니에게 하루는 유치원 원장이 청을 넣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아버지 일을 돕고 있던 나를 그 유치원의 하우스보이로 달라는 것이었다. 잔심부름이나 하면서 절이나 유치원에서 하는 일을 거들면 숙식은 물론 야간학교도 보내주겠다는 제안이었다. 그렇게 들어온 아이가 지금은 어엿한 선생님이 되어 있다고 선례도 들어 설명하였다. 하루하루 연명하는 일도 버거운 데 입 하나 더는 일이 어딘가? 더군다나 학교까지 보내준다고 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나에게도 그편이 좋아 보였다. 그런데,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와서 아버지가 난데없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오랜만에 들어 보는 아버지의 큰 목소리였다.
“굶어 뒈져도 남의 집 종살이로는 보낼 수 없는 일 아니갔어?”
아마, 그 사건 이후로 나는 언젠가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을 수도 있다는 각오를 남몰래 해 왔던 것 같다. 그러나, 형에게는 그런 기회가 없었다. 형이 어머니의 죽음 후에 급격한 몰락을 겪은 것은 어머니가 그에게는 ‘위대한 어머니(great mother)’였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세계를 호령하던 한낱 어린 왕자, 총명한 마마보이였을 따름이었다. 어머니가 죽고 세계가 무너지자 그는 어떤 삶의 준거도 가지지 못한 채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조회할 곳도 인정받을 곳도 투정부릴 곳도 없는 어린 왕자에게 세상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될 수 있었겠는가. 대충 그런 플롯이 짜여진다. 그 플롯 안에서는 개인의 무능이나 일탈 혹은 나태와 실수 같은 것들은 몰락의 어떠한 원인도 될 수 없다. 오직 원인은 어머니다.
성공도 마찬가지다. 형은 언젠가 조카의 말투가 나를 닮아간다고 말했다. 담담하게 말했지만 그것이 무엇을 메타포하는 것인지 나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너희들 성공한 자들은 말투마저 같구나, 형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중이었다. 형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나의 성공은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탓이다. 형이 몰락한 것도 내가 성공한 것도 모두 어머니 때문이다. 어머니의 자궁을 형에게 빼앗긴 동생은 세상의 자궁을 향해, 그 사랑을 위해 온몸을 던진다. 모험도 좋고 도전도 좋고 약탈도 좋다. 어머니의 자궁을 잃고 벼랑 끝에 선 그는 더 이상 몰릴 곳도 없으므로 과감히 ‘건너 간다’. 대충 그렇다.
그러나, 머리로만 생각하는 인간은 얼마나 우매한가. 그 편이 형을 오마쥬하는 나의 정성과 노력을 좀더 실감나게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결국은 머릿속 작은 생각에 불과하다. 오히려 현실은 형이나 나나 모두 우주의 작은 한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 즉 하나의 작은 ‘사건 그 자체’에 불과하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만한 아픔도 없는 인생이 어디 있느냐고, 그나마 자식들 그렇게 잘된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이냐고, 항상 고마운 줄 알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라고, 한 생명으로 이 세상 한 귀퉁이에서나마 반짝 한 번 살아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한 존재였다는 것을 알라고, 그렇게 가르친다. 그게 현실이다.
나는 현실주의자다. 내가 가진 현실 이외의 것에는 눈을 돌리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삶에 만족도 불만족도 없이 그저 푹 젖어 살 뿐이다. 아니 그렇게 산다고 생각하며 산다. 다만, 요즈음 들어 생긴 허영심이 하나 있다. 작은 가게를 하나 가지고 싶다는 욕심이다. 아마 늙어가면서 노후 준비도 할 겸, 사람 만나는 나만의 공간을 하나 만들고 싶은 욕심이 생긴 것이리라. 그래서 달성공원 앞을 얼씬거릴 때면 그와 연관된 한 가지 불만족, 돌이킬 수 없는 후회가 한 번씩 속을 뒤집는다.
“반찬 가게 하나 차려라. 앞으로는 그게 돈 된다. 일본에 가보니 그렇더라. 니 신랑도 사람이 꼼꼼해서 잘 하지 싶다.”
처형이 아르헨티나로 최종적으로 들어가기 전, 당시 시댁이 있던 일본에서 몇 달 머무르다 와서 아내에게 한 말이다.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반찬 가게라니, 나보고 시정의 장사치가 되라는 말인가? 속으로는 불쾌하기까지 하였다. 군대에서 제대하면 금방 대학에 자리가 생겨 대학교수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반찬 가게 주인이 되라니, 그건 좀 심한 농담이었다. 더 싫었던 것은 아내가 노상(路上)에서 당하는 모욕적인 대접이었다. 젊은 여자가 장사를 하면 이놈 저놈이 찝적댄다. 그건 업종에 관계없이 이루어지는 노상 불변의 법칙이다. 교수 사모님이 될 여자가 겪을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나중에는 집을 팔아서 주택가로 이사를 가버렸다(가자고 졸랐다). 그건 콩쥐들이나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권고를 무시했던 것이 요즈음 들어 후회가 된다. 오히려 그런 선택을 한 것이 콩쥐 같았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죽으면 썩어 문드러질 몸, 행여 어떤 잡놈이 계산을 핑계로 슬쩍 마누라 손을 한 번 만진 들 그게 무엇 대수이겠는가. 반말 섞인 농담 두어 마디 듣는다고 사람 몸 어디가 상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렇거니 하면 될 것을, 콩쥐들처럼 융통성 없이 살았다. 그 때는 그런 것을 건너가는 일이 어려웠다. 아마 그것도 내가 곧잘 만들어내던 ‘세계와의 불협화음’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내가 적두병 가게에 집착하는 것도 어쩌면 그런 심사가 바탕 화면으로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적두병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없었던 일을 하고 있는 ‘빵쟁이님’ 에 대한 선망과 질투가 그것을 부추기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적두병 맛에 그렇게 열광적인 반응을 보인 걸까?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입맛은 기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니 함부로 논할 것이 못된다’는 아내의 지론이 지당한 말씀이 되는 셈이다. 적두병을 두고 아내는 이 정도면 황남빵보다 나은 것 아니냐라는 말 한 마디만 했을 뿐이다. 콩쥐의 입장에서 한두 개는 먹어줄 만하다는 것이었지 경탄할 만큼 그 맛이 대단하다는 것은 아니었다.
꼭 달성공원 앞이 아니더라도 가게를 하나 내어서 따끈한 커피도 내려주고 맛있는 쿠키도 구워내고 싶은 것이 내 장래의 희망사항이다(가능하면 적두병도). 근력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때 형편만 되면 그 일로 나서고 싶다. 실습도 두어 번 했다. 마침 방송국에 있다가 퇴직한 친구가 시골 분교를 얻어 제빵제과 실습 코스를 운영하고 있었다(그 친구도 시골생활을 정리하고 시내로 진출해서 카페를 하나 열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결론은 간단했다. 좋은 재료와 정성만 있으면 기술은 절로 터득된다. 연전부터 그런 이야기를 자주 해서 주변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현실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일반 주택을 하나 사서 살립집 겸해 가게를 하나 연다고 했을 때에 몇 억 단위의 돈이 들어갔다. 늘그막에 여는 가게를 돼지우리같이 할 수는 없는 일, 온 재산을 털어 넣어도 될까말까한 일이었다. 그러니 달성공원 앞의 상가주택이었던 처가를 팔고 주택가로 이사간 일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후회가 된다. 그때 장사를 시작했으면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 일을 꼭 그런 식으로 덧셈과 뺄셈으로 계산할 수는 없는 일이라는 것도 잘 안다(물론, 애초에 그것을 몰라서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아니다). 지금은 팔자가 늘어져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만약 장사를 했다면, 그래서 콩쥐로 늙어버렸다면, 아예 이런 생각도 못하게 팔자가 쪼그라들었을 수도 있는 일 아니겠는가. 모든 것이 팔자소관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21.
“피자만 한 판 사오라네, 좋은 걸로. 햄버거랑 도넛은 아무거나 몇 개 챙기고. 왠일로 치킨은 빼라네. 그렇게 먹어대더니 그건 왜 빼라는지 모르겠네.”
아내의 휴대폰으로 콜렉트콜로 걸려온 전화는 몇 번의 난산(難産) 끝에 그런 메시지를 남겼다. 집에서는 잘 되는데 밖에 나오면 이렇다고 아내가 투덜거렸다. 성당에서 막 나오는 중이었다. 다음 주로 면회 일자가 잡혔다. 아들놈이 면회 올 때 먹을 것으로 사가지고 올 품목을 전해 왔다. 먹는 것 이외에는 가져갈 게 없었다. 정든 세상과의 오랜 격리생활을 보상하는 것 치고는 좀 시시한 메뉴였다. 아내는 탕수육이나 스테이크 햄버거, 그리고 좋아하던 **치킨 같은 것이 빠져 있는 것이 못내 섭섭한 모양이었다. 평소에 손수 수제품으로 해 먹이던 메뉴가 없어서 다행이라고, 그 메뉴가 빠졌으면 얼마나 섭섭했겠느냐고, 내가 약간 야지를 놓았다.
본디 그런 것 같았다. 세계와 격리되어 존재의 불안감이 극대화되면 인간은 동물적으로 먹을 것에 집착하게 된다. 그것이 무의식에 닿아있는 욕구인 탓에 때에 따라서는 좀 황당한 메뉴가 채택되기도 한다. 입대 후 달포 정도 격리되어 훈련을 받을 무렵의 나도 그랬다. 나는 흰쌀밥과 고깃국이 그렇게 먹고 싶었다(팥밥 생각은 그닥 나지 않았다). 짜장면 생각도 많이 났지만 밖에 나와서 혼자서 우정 중국집에 들어간 적은 없었다. 일정 기간이 지난 뒤 외출이 허용되어 주말마다 대구에 와서는 으레 집사람이 해주는 밥과 국만 먹었다. 보병학교에서의 훈련 기간이 끝나가면서 누군가가 사식(私食)을 사 먹을 수 있는 곳이 있다고 우리를 선동했다. 대대장반이나 연대장반의 교육생들이 주로 이용하는 학교 한 구석에 자리잡은 간이식당이었다. 마치 공사판의 이동식 식당 같은 곳에서 중년의 부부가 주로 교육받으러 온 군인 손님들을 받고 있었다. 군대가 하는 짓들을 보면 예나제나 재미있는 것들이 많다. 이를테면, 훈련 15주차 이후로는 그런 사제 밥을 먹여서 서서히 사회에 적응하도록 배려한다는 식의 사고구조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공식 채널을 통해서 하달될 성질의 것은 아니니까 구대장이 넌지시 누구에겐가 귀띔질을 해서 자연스럽게 일탈을 조장하고 지휘부에서는 모른 척 그것을 눈감아 주는 방식을 취한다는 것이다. 사제 밥이니까 전체적으로 보면 부대 급식비도 아낄 수 있는 일이었다. 어쨌든 우리는 아침 저녁으로 따끈따끈한 사제 밥과 입에 맛는 고깃국을 마음껏 먹으면서 보병학교에서의 마지막 2주를 연대장급으로 보낼 수 있었다. 주 고객이었던 연대장반 교육생들도 씩 웃고 들어가는 새파란 후보생들을 귀엽게 여기는 눈치였다.
“귀관들은 어떤 과정인가?”
연대장반 중 한 사람이 그렇게 물으면,
“특별히 간사한 장교를 양성하는 특간 과정입니다.”
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하였다.
“특수간부후보생이로군. 신부님이신가, 목사님이신가?”
교수 요원과 군종 요원, 항공 준사관이 봄철에 들어오는 특수간부후보생이었다. 교수 요원이 40여 명 군종 요원이 150여 명 그리고 항공준사관이 50여 명 정도 되었다. 항공 준사관들은 몇 주 같이 지내고는 이내 이동했다. 보병학교에서 간단한 절차를 거쳐 임관만 한 후 본격적인 교육은 병과학교에서 받는 모양이었다. 같이 있어도 서로 영역이 달라 교통은 없었다. 기수(基數)로만 연결될 뿐이었는데, 그쪽은 보기에 현역 중에서 뽑혀온 사람들 같았다. 움직임에 벌써 절도와 기품이 철철 넘쳐흘렀다. 막사도 다른 것을 사용했다. 남은 건 교수 요원과 군종 요원뿐이었다.
“교수 요원입니다.”
“그래? 우리 모교에 부임하실 교수님들이시군. 후배들 잘 부탁해요.”
대충 그런 분위기였다. 서너 달 전만 해도 상상도 못하던 장면이었지만 군대는 금방 또 그런 식으로 사람을 속성으로 키워주는 곳이기도 했다. 좋은 추억이었다. 아들에게도 그런 시간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 나의 세계와의 격리 체험은 입대해서 훈련을 받던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막막한 고립감, 절대고독, 세계와의 절연. 그런 것을 고통스럽게 느꼈던 경험은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에도 한 번 있었고(상사병이었다), 다섯 살도 채 되지 않았던 유년 시절에도 있었다(그때는 무엇이었는지, 지금 정리가 잘 안 된다).
대구에 처음 내려왔을 때 우리 가족이 머물렀던 곳은 도회의 최변방이었던 평리동 문둥이 마을 인근이었다. 애락원이라는 음성나환자 수용시설이 있던 곳이다. 물론 그 당시의 나는 그런 사정을 알 수 없었다. 다만, 동네 밖으로 나가면 거기가 문둥이들이 사는 곳이어서 행여 혼자 나갔다가는 문둥이들에게 잡혀서 간을 빼먹힐지도 모른다는 엄포만 누차 들었을 뿐이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것이 나를 묶어두기 위한 어른들의 간계(奸計)라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은 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잠시 학교를 쉬고 있는 형과 나를 두고 장사를 나갔다. 장사하는 곳이 달성공원 앞이라는 말은 들었다. 그러나 그곳이 어딘지는 몰랐다. 한 번도 따라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밤새 다음날 장사를 위한 준비에 몰두하였다. 찔 것은 찌고 묵힐 것은 묵히느라 방안은 온통 재료를 담은 대야와 알싸한 냄새로 넘쳐났다. 행여나 그것들에 가까이 가기라도 하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밤새 부산을 떨어 재료가 준비되면 이른 아침 리어카에다 그것들을 싣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총총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그럭저럭 시간이 흘러 형도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고 나 혼자 집에 있는 일이 많아졌다. 옆 집(옆방이라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의 아저씨가 한 번씩 말동무가 되어주곤 했지만 그 아저씨도 곧 일자리를 찾아서(인근의 빵공장이라고 했다) 집을 비우는 일이 많아졌다. 그런 날이 계속되던 어느 날 무슨 마음에서인지 나는 집을 뛰쳐나왔다. 달성공원을 찾아가겠다고 마음먹고 나온 것이다. 그 때 무슨 생각에서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지금 와서는 자세한 기억이 없다. 다만, 어린 영혼이었지만, 세상과 격리된 것이 야기하는 어떤 숨 막히는 공포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만 해 볼 뿐이다. 대구로 내려와서는 엄마가 없을 때 달려가곤 했던 고모님네도 없었다. “조근놈 오니, 배고파서 왔어?” 하며 끌어안아 주던 고모님만 있었더라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기억에는 없지만, 나는 사촌누이의 젖도 많이 뺏어먹었다고 했다. 그래서 누이가 나를 볼 때마다 적대(?)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집 밖으로 나온 뒤의 기억들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골목길을 나오면 야산이 있고 그 야산에 무덤 몇 기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한참을 걸어 신작로까지 나와서야 울창한 탱자나무들을 본 것 같다는 것 정도가 남아 있다. 신작로를 따라 먼지에 뒤덮인 탱자나무 길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간혹 합승버스가 지나가며 일으키는 흙먼지가 온몸을 뒤덮었고 날은 몹시 더웠다. 그것이 전부다.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다. 큰고개길이니 큰장 네거리니 하는, 지금은 10차선으로 넓혀진 대로들이지만, 당시로는 어른 걸음으로 걸어도 두어 시간은 족히 걸렸을 꼬부랑길들을 어떻게 넘고 돌았는지 아무런 기억이 없다. 그런 난코스를 어떻게 아장걸음으로 무사히 답파할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그저 신기할 뿐이다. 당시의 도로망은 지금의 동서대로와 같은 큰 아스팔트길이 아직 나기 전이라 그야말로 흙탕길 투성이었다. 비라도 오면 버스가 나다니는 길이라도 온통 흙탕물로 범벅이 되던 시절이었는데 그 흙먼지를 뒤집어 쓴 채 어린 아이가 어떻게 달성공원 앞까지 갈 수 있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사의한 일인 것이다.
마치 꼬마 유령처럼 나타난 막내아들을 보고 어머니는 먼저 내 주위를 살폈다. 누가 데려왔나 하는 표정이었다. 이내 혼자라는 것을 알고는 나를 끌어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하얗게 먼지를 뒤집어쓰고 나타난 나를 보고 놀랐는지 아버지는 하늘만 쳐다보며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그때 무슨 말을 했는지는 전혀 기억에 없다. 다만, 어머니는 크게 한 숟가락 적두병 안에 들어갈 팥소를 떠서 내 입에 안겼다. 평소에는 아예 근처에도 못 가게 하던 그 팥소였다. 입 안 가득히 향기로운 팥소의 향미가 흘러 넘쳤다. 먹어라, 아가야. 아마 어머니는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아가야, 먹어라. 이건 엄마의 몸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거나 사랑한 적이 없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아가야. 세상에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엄마는 없단다. 어떤 엄마도 자식을 버리지는 않는단다. 아마 어머니는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래요, 어머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 것도 아니죠. 그냥 쉬세요, 어머니….
이제 이 글을 그만 쓸 때가 온 것 같다. 적두병(赤豆餠)이 적두병(赤豆病-팥에 얽힌 병), 혹은 적두병(赤頭病-어릴 때 생긴 병)이었다는 것을 남김없이 다 밝힌 이상 적두병이라는 제목을 내걸고 중언부언 더 쓸 것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아쉬운 점 한 가지는 여전히 남아있다. 아버지가 노상의 적두병 장사로 돈을 모아 공원상회를 차린 것은 당연한 성공이었다. 아버지의 적두병은 공원 앞에서는 호가 난 명품 간식거리였다. 가격도 주변의 다른 풀빵들과는 비할 수 없이 고가였다. 그 앞에서 돌아서는 가난한 엄마들도 많았고 그런 엄마 앞에서 떼를 쓰며 울던 내 또래의 아이들도 많았다(가출 사건 이후로 동반 출퇴근 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그럴 때면 으레 맛보기로 하나씩 아이들에게 거저 주곤 했다. 그래서 더 장사가 잘 된 것인지도 몰랐다.
아버지가 주류도매업으로 업종을 바꾸지 않고 지금의 ‘빵쟁이님’처럼 버젓이 적두병이라는 간판을 달고 달성공원 앞의 명소로 자리잡을 빵가게를 하나 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면 아마 그 업을 물려받은 나는 지금 그 가게 안에서 느긋한 표정으로 “굽는 데 20분, 식히는 데 10분”이라며 줄서서 보채는 손님들을 달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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