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눈이 내렸다. 폭설이었다. 천천히 신천을 걸었다. 김광석을 만났다. 김광석 거리는 내 사무실에서 20분거리, 지척이다.
김광석 거리는 방천시장에 있다. 방천시장엔 춘천집이 있고, 내 사무실 곁엔 안동 칼국시 집이 있다. 춘천집 주인은 표정이 없고, 칼국시집 주인은 말이 많다.
그들은 한결같이 저마다의 표정으로 자신이 걸어온 삶의 뒤안길을 스토리텔링힌다. 김광석 골목이 그와 같듯이. 무슨 인연이란 말인가!
너풀너풀
세한도 ․ 14
오늘은 하루 종일 눈이 내렸다
너풀너풀
아랫마을 잔칫집에 갔다가 신발 바꿔 신고 저물게 돌아오는 옆집 아저씨 두루마기 자락처럼 너풀너풀은 너부러진 세월 같고 시간의 숨소리 같고 세월은 막걸리 같고 오래 취하는 동동주 같고 푹 퍼진 아줌마 엉덩이 같고 시간은 코냑이나 위스키 같고 토라진 열아홉 뜯어고친 입술 같고 세월은 시간의 숙주 같고 파 먹히는 어미 같고 시간은 세월의 서자 같고 집 나간 아이 같고 세월은 저만치 피어 있는 현호색 같고 시간은 당신이 심어놓은 매발톱 같고 김해경은 세월 같고 이상은 시간 같고, 오늘은 하루 종일 어제의 시간 같고, 오늘은 너풀너풀 내일의 세월 같고
김광석을 듣다가
세한도 ․ 6
태풍이 그의 일생을 신천 둔치에 버리고 떠났다
1에서 9까지 입에서 항문까지 낙숫물 소리에 내 몸이 다 젖었다
욕망의 꼴림도 그와 같아서 김광석을 듣다가 월요일은 월요일의 그리움으로라고 쓴다. 그리움이란 말의 아랫도리로부터 불끈 나무들의 그것들이 솟는다. 화요일은 화요일의 기다림이라고 쓴다. 기다림이란 말의 아랫도리로부터 아랫도리로 졸졸졸 시냇물의 그것들이 흐른다. 때론 가슴도 저미겠지 외로움으로 일요일은 일요일의 외로움으로라고 썼다가 지운다. 꼴림의 욕망도 그와 같아서 찔레꽃 하얀 흔적이 바람에 흔들리다 멎는다. 생명보험을 해약하기로 마음먹는다.
내려놓은 풍경
세한도 ․ 36
바위 밑에 멈춰 있던 이끼 낀 시간이 우루루
물소리를 따라 흘러내렸다, 하고 싶었던 많은 말들, 따뜻했다
이승에서 잠시 우리가 만난 눈부신 계곡의 아침 세월 속에 묻었다
한 컵의 바람에도 내 삶은 텅, 텅, 깡통처럼 울렸다
그 시절 동무들은 다 뿔뿔이 헤어져서 지금은 안부조차 모릅니다. 나는 게까지 가지 않고 걸상처럼 생긴 어느 나무토막에 가 앉아서 물속으로도 황혼이 오나 안 오나 들여다보고 앉았었습니다. 잎새도 다 떨어진 나무들이 거꾸로 물속에 가 비쳤습니다. 물은 그런 틈사구니로 잘 빠져서 흐르나 봅니다. 그 내려놓은 풍경을 만져보거나 하는 일이 없습니다. 바람없는 저녁입니다.(이상, “슬픈 이야기”)
'오래된 약속'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도에서 (0) | 2011.01.04 |
---|---|
[스크랩] 2011년의 여명 (0) | 2011.01.02 |
니치난의 추억2010. 12. 23-7 (0) | 2010.12.28 |
Hilmaru에서 (0) | 2010.12.18 |
동현이와 시골에서 (0) | 2010.1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