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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응접실

동사무소에 가자

by 고요의 남쪽 2010. 9. 18.

동사무소에 가자/이장욱

 

어제 죽은 사람들도 아직

떠나지 못한 곳

 

동사무소에서 우리는 전생이 궁금해지고

동사무소에서 우리는 공중부양에 관심이 생기고

그러다 죽은 생선처럼 침울해져서

짧은 질문을 던지지

동사무소란

무엇인가

 

동사무소란 그 질문이 없는 곳

그밖의 모든 것이 있는 곳

우리의 일생이 있는 곳

그러므로 언제나 정시에 문을 닫는

동사무소에 가자

 

두부처럼 조용

오후의 공터라든가

공터에서 혼자 노는 바람의 방향을

자꾸 생각하게 될 때

 

어제의 경험을 신뢰할 수 없거나

혼자 잠들고 싶지 않을 때

왼발을 든 채

궁금한 표정으로

우리는 동사무소에 가자

 

동사무소는 간결해

시작과 끝이 무한해

동사무소를 나오면서 우리는

외로운 고양이 같은 표정으로

왼손을 들고

왼발을 들고

- 이장욱 '동사무소에 가자' 일부(문학사상 2006년 12월호)

제가 좋아하는 시 중의 하나입니다. 왜 좋으냐고요?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아무튼 저는 이 시가 좋습니다. 곰곰 생각해 보니 이 시에는 질문이 있고 요구하는 대답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시의 화자는 우리네 권태로운 삶의 모순과 얼굴을 언뜻언뜻 내비치며 생각을 전개합니다. '동사무소란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던지는 이 사람이 얼핏 저인 듯도 합니다. 내일은 동사무소에 가서 두어 시간 멍하니 앉아 있다 와야겠습니다. '동사무소가 무엇'인지 느끼고… 와야겠습니다.
유홍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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