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뼈에 연보라색 불이 들어오도록 음악을 종일 들었습니다. 당신의 육체는 혹시 지금 불이 켜져 있나요. 당신 육체 한 구석이 환하게 빛을 내고 있는 것을 당신을 알아채고 있는가요. 육체 어디에 불이 들어와 있나요. 당신의 배인가요, 심장인가요. 이마인가요, 검지손가락인가요. - 당신은 혹시 ET가 검지손가락에 불을 켜고서 한 말을 기억하고 있나요. 혹시, 기형적으로 길쭉했던 그 손가락만을 기억하는가요. 불이 켜졌던 이미지만을 기억하는가요. ET는 소년과 작별을 하며, 검지손가락에 불을 켜 소년의 이마에 갖다댑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바로 여기에 있을게(I'll be right here)." - 기이한 손가락에 불을 켠 기이한 시인이 당신 곁에 있다면, 당신은 당신의 이마를 기꺼이 맡기며 시인의 한 마디 말을 경청할 수 있겠나요. 당신이 어린 시절 그 비슷한 말을 들었던 소년이었다 하더라도, 그 말을 당신은 지금도 기억하며 믿는가요. 당신도 소년 소녀였을 때에 누군가가 해준 그 말을 믿었던 사람이라는 걸, 시인은 당신에게 기이한 저의 손가락을 뻗은 채 지금 말하는 중이랍니다.
# 인간의 곁으로 가기 위해 나는 경(經)을 버렸습니다. 작년부터 내 책상 위에는 이런 책들이 놓여 있습니다. 휴머니티, 가치는 어디로 가는가, 우리가 정말 인간일까?, 바깥에서…. 이런 책들을 읽는 동안만 나는 잠시 분노를 내려놓는다. 아주 잠깐 동안, 분노라는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던 동물성으로부터 이해라는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식물성으로 교환된다. "휴머니즘을 무엇으로 정의해야 하는가? 휴머니즘을 언어로부터 가장 멀리 벗어나게 하는 것으로. 다시 말해 절규로, 궁핍의 절규 또는 이의제기의 절규, 단순한 침묵도 아니고 단어들로 표현되지도 않는 절규로, 비천한 절규로. (모리스 블랑쇼)" 같은 구절과 "우리는 아직도 정치 이전에 있다. 우리는 아직도 시민 이전에 있다. 우리는 아직도 인간 이전에 있다. (김수영)" 같은 구절을 사이에다 "시가 불멸을 말할 수 있는 것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경험을 언어가 껴안을 수 있다고 하는 믿음에서, 언어에게 스스로를 내맡기기 때문이다. (존 버거)"를 네 잎 클로버처럼 끼워둔다. 그리곤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러 나간다. 음악처럼 휴지(休止)를 기호적으로 갖추지 않았다는 점에서, 영화처럼 음악을 배경에 깔면서 운치를 보탤 수 없다는 점에서, 모든 걸 언어로만 해결해야 한다는 점에서 시는 참 가난하구나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온다. 이 가난한 장르가 기쁘다. 시는 사람의 곁으로 가지 않기 위해서 거의 모든 것을 버렸다. 언어만을 남기고. 사람들은 아무 것도 버리지 않음으로써 시의 곁으로 가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 언어만을 버려둔 채로. 잘된 일일지 모른다. 이토록 다른, 시와 사람이 어느 순간에는 만날 수밖에 없다. 프랑시스 잠처럼 말하자면, "오래된 급류 가의 어린 딸기처럼" 반갑게 만날 수밖에는 없다.
# 새장은 깃털을 모아두고 '날개'로 자신의 '혀'를 놀리다가 가는 또 다른 새일 겁니다. 오래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의 외곽에 자리잡은 반딧불이 공원에 찾아간 적이 있다. 그곳은 마을전체가 가로등조차 없는 칠흑이었다. 공원 주차장에 차를 세우니, 어딘가에서 안내원이 손전등을 들고 다가왔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기를 따라오라고 손짓을 했다. 연신 검지손가락을 입술 위에 세운 채로 우리에게 조용히 하라고,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걸음소리도 내지 말라고, 돌멩이를 밟을 때 소리가 나지 않게 천천히 걸으라고, 뒤를 자꾸 돌아보며 눈빛으로만 주의를 주었다. 우리 일행은 그의 단정하고 조용한 몸짓에 기가 눌려 수행자처럼 조용조용 그를 뒤따랐다. 한 시간을 넘게 걸었다. 반딧불이 공원에 가는 중인 건지, 어디 이상한 데로 가게 되는 건 아닌 건지 걱정이 될 만큼 걸었을 때, 작은 나무집 한 채가 있었고, 입장권을 팔고 있었다. 물론, 그 나무집에도 전등불 하나 켜 있지 않았다. 안내원이 손전등을 비춰주는 대로 우리는 입장권을 사고 줄을 서고 우리 앞에 도착한 카누를 탔다. 안내원의 지시에 따라 두 명이 한 배를 탔고, 발을 배 가운데에 모으고 두 사람은 일자로 누웠다. 사람 하나가 뱃머리에 서서 노를 저었다. 강을 따라 십여 분을 흘러가며 귓전의 물소리가 두개골까지 스미는 듯한 느낌이 들 때쯤, 반딧불이들이 나타났다. 수백 마리였을지, 수천 마리였을지. 꽁무니를 환하게 밝힌 벌레들의 믿을 수 없는 군무를 보았다. 그건, 모터를 달고 돌아다니는 온 계절의 별자리였다. 그건, 창세기부터 지금까지의 별의 역사를 요약해서 보여주는 현란한 다큐멘터리 같았다. 불빛 하나 없던 공원. 안내원 하나와 뱃사공 하나와 손전등 하나만 있던 공원. 1시간 거리에 주차장을 둔, 손님들의 편리함을 전혀 배려할 생각이 없었던 그 오만한 공원이 아니었다면, 누구도 반딧불이들의 경이로운 군무를 목격할 수는 없었을 거다. 그 공원은 칠흑을 모아두고 '침묵'으로 자신의 '소망'을 피력하는 또 다른 반딧불이였다.
# 허우적거린다는 것은 의식이 생활에 더 밀착해 있다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허우적거린다는 것은 사물을 더 이상 이런 방식으로는 표현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똑바로 걷고 있지만, 당신의 그림자는 허우적거려요. 당신의 그림자가 똑바로 걷고 있을 때에는 당신이 허우적거려요. 당신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허우적거리지 않은 적이 없어요. 당신이 부정을 할지라도 당신은 원래 그런 사람이에요. 우리 모두는 원래 그런 사람이에요. 세상이 이토록 잘못되었다고 손가락질하던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반듯하게 걸으며 살 수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에요. 우리의 허우적거림은 우리가 사람으로서 가능성이 아직은 있다는 뜻일 테죠. 허우적거리는 것만으로 우리는, 아직은 표현의 가능성이 있다는 표현을 하고 있고요. 허우적거림은 나의 자세를 헝클고 공기를 헝클지만, 나를 넘어지지 않게 하고 공기를 순환하게 하잖아요. 이렇게 허우적허우적거리는 표현들을 가장 따뜻하게 받아주는 우리들의 마지막 공간은 어쩌면 시의 공간일 거예요. 그러므로 시의 공간에서는 질서를 꿈꾸지 말아야죠. 허우적거려야죠. 혼돈을 혼돈으로, 불안을 불안으로, 공포를 공포로 말해야죠. 그렇게 해도 되는 마지막 공간이니까요.
# 이 꽃을 받아주시겠습니까. 당신의 미라로만 나는 사랑입니다. 모두가 허우적대는 세상에서, 아무도 허우적대지 않은 것만 같은 세상에서, 모두가 뼈에 불이 꺼져버린 세상에서, 아무도 뼈에 들어온 불을 바라보지 않은 세상에서, 오직 한 사람만이 우리를 어딘가로 끌고 갑니다. 그 자는 무서운 어둠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불편한 걸음을 한참이나 걷게 합니다. 자신의 입술 위에 검지손가락을 세운 채로 조용히 하라고 협박을 합니다. 오만합니다. 손님을 배려하지 않던 반딧불이공원의 안내원처럼 말입니다. 한밤중에, 등불조차 켜지 않은 채로, 어딘가로 흘러가는지도 모를 쪽배 위에 누워 별자리를 바라보며, 창세기부터 지금까지의 우주만물의 역사에 대해, 가만히 혼자 헤아리는 사람 하나가 있다 합시다. 그의 뼈에 연보라색 불이 켜집니다. 밤하늘을 날으던 반딧불이들은 그가 거대한 동족인 줄 착각합니다. 그는 천천이 팔을 뻗습니다. 팔은 팔천 킬로미터로 늘어납니다. 이제 검지손가락을 길게 뻗습니다. 밤하늘의 별 하나에 갖다댑니다. 별이 불을 켭니다. 그의 검지손가락도 불을 켭니다. 별 하나가 그렇게 이 지구 상의 한 사람과 연결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를 대신해서 그는 밤하늘의 별 하나에게 말합니다. "바로 여기에 있을게(I'll be right here)." 그는 수천 년전부터 그렇게 누워 지금까지 살아온 우리시대의 미라입니다.
#의 문장들은 김경주의 시집 『기담』(문학과지성사, 2008)에 수록된 「프리지어를 안고 있는 프랑켄슈타인」에서 빌려왔다.
* 김소연, 「바로 여기에 있을게」 인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