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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응접실

그것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by 고요의 남쪽 2010. 9. 4.

『시와반시』 2010년 가을호를 열며
「그것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함돈균

올 여름 극장가의 최대 화제작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셉션(INCEPTION)」이었다. 꿈(무의식)의 세계로 침투하여 그 인간의 꿈에 새로운 이미지의 건축물을 심어놓고, 그 인간의 무의식을 지배함으로써 꿈 바깥의 ‘실제’ 의식(현실)을 지배한다는 것이 이 영화의 모티프다. 실제 현실인지 꿈의 한 장면인지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엔딩컷에서 드러나는 감독의 의도는 이런 점에서 비교적 분명하다. 꿈이 비현실인 것이 아니라, ‘실재’라고 믿는 현실이야말로 오히려 가상(환영)일지 모른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방식의 아이디어를 영화로 옮긴 이전의 더 유명한 실례들, 예컨대 「매트릭스」나 「공각기동대」와 같은 영화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영화들의 아이디어를 키치적이라고 얕잡아보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하겠으나, 어쨌든 이런 아이디어들의 바탕에 현실을 오인적 허구라고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론부터 하이브리드 시대의 철학인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 이론과 같은 것들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일천한 개인적 독서 체험에 근거하여 ‘꿈’이 주요한 철학적 화두로 제기된 세 가지 사례를 떠올려 본다. 기원전 3세기 전후의 장자의 경우다. 유명한 ‘호접몽(胡蝶夢)’ 이야기. 실재와 가상 사이를 넘나드는 이 시적 패러독스는, 가장 오래되었지만 존재론·인식론에서 제기될 수 있는 가장 급진적 형태의 ‘질문’이 제기된 경우다. 언급한 최근의 영화들이 바탕으로 하고 있는 현대철학의 사유들이 사실 이 가장 오래된 철학적 질문을 공유하고 있다. 17세기의 데카르트 역시 꿈의 문제와 관련하여 인상적인 인식론적 논거를 제기한 바 있다. 세계의 실재성 여부를 논증하는 철학적 회의의 과정에서, 그는 꿈을 매우 유용한 논거로 활용한다. 그의 논리를 요약하면 대체로 이렇다. 펄펄 끓는 물주전자가 있는 난로의 표면 위에 손을 댈 때 우리는 뜨겁다고 느낀다. 그러나 이 뜨겁다는 감각은 ‘정말’일까? 꿈에서 펄펄 끓는 물에 손을 댈 때도 우리는 뜨겁다고 느끼지 않는가? 그렇다면 뜨겁다(고 믿)는 이 감각도, 혹시 우리가 꿈을 꾸고 있으면서 속고 있는 것은 아닐까? 데카르트는 여기에서 그 유명한 ‘결론’을 도출한다. 비록 내(감각)가 꿈속에서 속고 있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래서 나의 감각과 그 감각에 의존하여 경험하는 세계가 의심스럽다(가짜) 하더라도, 속고 있는 ‘내’가 있어야 속을 수 있는 게 아닌가. 그러므로 ‘나는 속는다, 고로 존재한다’. 자명하게 주어져 있다고 생각했던 객관 세계, 신이 애써 만들어 놓은 세계는 데카르트의 의심을 통해 존재의 논리적 근거를 상실하게 되었으며, 이제 유일하게 (의심하는) 인간(의 사유)만이 ‘자명하게’ 남는다. 1900년에 출간되어 20세기를 연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은 꿈에 새로운 위상을 부여했고 그 효과는 엄청났다. 프로이트의 꿈은 은폐된 욕망(무의식)의 다른 이름이라는 점에서, 사유하는 주체로서 인간의 능동적 지위는 심각하게 격하된다. 주체의 실천은 나(의 사유)의 능동적 의지의 소산도 아니며, 따라서 그 실천에 의해 구성된 세계는 투명하지 않다. 라캉의 말대로 이제 “나는 내가 있지 않은 곳에서 생각하고,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 있다. Je pense ou je ne suis pas, donc je suis ou je ne panse pas”. 내가 모르는 ‘나’와 그 ‘나’의 실천에 의해 구성된 세계는 이제 ‘해석’ 되어야 할 ‘그것’을 숨기고 있는 깨림직한 창고로 변질된다. 은폐된 욕망에 의해 발화된 언표는 해석되어야 할 의미를 숨기고 있는 은유와 환유의 매개체(기표)가 되었으며, 기억은 현재에 의해 왜곡·재구성되고, 환상과 실재, 가상과 현실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주체’라는 이름은 이제 금기와 억압의 담지체이며, 왜곡과 자기기만의 최종심급이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주체는 이제 앓고 있는 환자이며, 세계는 거대한 병원이 되고 만 것이다. 여기에서 궁극적으로 사라진 것은 ‘객관 세계’의 실재성 또는 ‘진리’의 가능성이다. 니체(를 추종하는 들뢰즈)에 따르면, 이제 고정된 실체는 없으며 ‘사건’과 ‘의미’만이 남는다.
의문의 여지없이 자명한 것으로 주어져 있던 객관 세계의 실재성에 어퍼컷을 날린 이 꿈에 관한 사고들에 의해,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땅의 근거는 이제 모호해졌다. 설령 우리가 지구의 역사가 46억년 동안 지속되었다는 사실을 ‘상식’으로 안다고 하더라도,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땅이 내일 아침 해가 뜰 때도 100% 온전히 존재하리라는 확신은 근거가 없어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꿈에 관한 질문들은 그 자체로 ‘히스테리적’이다. 이 질문들은 ‘양식(bon sens)’적 세계의 자명한 물음에 ‘좋은 답’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다시/새롭게) 던지는 방식으로만 대답하기 때문이다. 가장 첨예한 철학적 질문들이 바로 이 지점에서 가장 유연한 문학적 질문들과 경계 없이 만난다. 이 지점에서 세계에 대한 ‘객관적’ 지식은 상식적이고 사전적인 정의에서 풀려나, 유동하는 현실의 장에서 운동하며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의미(sens)가 된다. 비로소 의미(sens)는 (모든 곳으로 열린) 방향(sens)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0년 전에 태어난 시인 이 상(李箱)을 떠올리는 것은 이 대목에서다. 이 상의 데뷔작이었던 ?이상(異常)한 가역반응(可逆反應)?(원텍스트는 일문시다)에는 다음과 같은 수수께끼 같은 구절이 있다.

임의의반경(半徑)의원(圓)(과거분사의시세〔時勢〕)

원내(圓內)의일점(一點)과원외(圓外)의일점을결부(結付)한직선

두종류의존재의시간적영향성
(우리들은이것에관하여무관심하다)

직선은원을살해하였는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이상의 이 수수께끼 같은 텍스트에 대한 해석을 이 자리에서 진행하는 일은 난망한 일이다. 다만 이 구절에 담긴 이상의 문제의식을 ‘축자적으로’ 그러나 좀 더 문제적으로 부각시켜 읽어보면, 여기에는 ‘존재의 다의성(관계)’에 관한 그의 문제의식이 엿보인다. 그의 생각은 간단히 말해서, 그동안 “우리들은이것에관하여무관심했던” “두종류의존재의시간적영향성”에 관해 관심을 가져보자는 제안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분사의시세”(이미 완료된 과거시제로서의 사건)로서 존재했던 “임의의반경의원”이 지닌 ‘의미’는, “원내의일점”이라고 하는 다른 차원(시제)의 사건과 “원외의일점”이라고 하는 또 다른 차원의 사건이 하나로 ‘계열화’ 되는 순간(“결부한직선”)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미 완료된 시제로 존재했던(“과거분사의시세”) “임의의반경의원”은 현재시제의 사건으로 전화될 수도 있다. “원을살해”한 “직선”이란 그런 뜻에서 ‘의미’를 새롭게 전화시키는 ‘사건’이라고 할 만하다. 이상이라는 기표가 의미심장한 것은, 그가 이 사건의 수행을 해답이 아니라 오직 ‘히스테리적 질문’의 형식으로만 수행했다는 사실이다. 그의 목소리는 단 한 번도 ‘나는 이것을 알고 있다’는 방식으로 발화된 적이 없으며, 언제나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세계의 의미가 무엇인지 정말 모르겠소’라는 식으로만 발화되었다. 자명한 것으로 주어진 세계의 지식들이 하나의 독사(doxa), 오인에 근거한 이데올로기적 산물로 전락하는 순간은 이 순간이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그의 히스테리적 질문은 가장 시적인 것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시’는 말들이 만들어 놓은 세계와 ‘시’의 통념에 질문을 던지는 ‘반시(反詩)’의 자리에서, 말들이 만들어 놓은 세계를 다시 의미화 하는 ‘사건’ 그 자체였다고 할 것이다. ‘이상한 가역반응’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언표는 그런 의미에서 일방향성을 통해 사물을 고정화 시키는 세계가 아니라, 거스르는(가역〔可逆/反 reversible〕) 운동을 통해서만이 존재의 다의성이 드러나며, 그 자리에서만 ‘(반)시’가 가능하다고 보았던 이상의 무의식이 반영된 증후적 언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호 기획의 제목을 ‘이상(異常)한 가역반응(可逆反應)’이라고 붙인 것은 이 때문이다. 그것은 이상이라는 한 개인에 대한 오마주라기보다는, ‘원을 살해하는 직선’이 되고자 했던 ‘이상’이라는 일반명사, 죽을 때까지 히스테리적 질문만을 통해 시의 ‘의미’를 쇄신하고자 했던 ‘반시’의 담지자로서의 이상에 대한 오마주라고 하는 것이 옳을 터이다. 시간적으로 “원외(圓外)”에 있는 그의 문제의식을 2000년대라고 하는 “원내(圓內)”의 시간과 “결부”시키는 “직선”을 통해, 오늘의 텍스트들과 과거의 텍스트들을 다시 계열화 하고 새롭게 ‘사건화’ 하려는 것이 이 기획의 목적이다. 『시와반시』의 기획편집위원 세 명과 조재룡 평론가가 이 기획에 필자로 참여해 주셨다. 박상수의 ?무한(無限)의 주인-신형철의 ‘윤리 비평’과 2천년대 “뉴웨이브”를 둘러싼 외설적 보충물에 관하여?는 2천년대 문학장에서 ‘비평의 귀환’을 선도하고 있는 신형철의 비평에 대해 첨예한 쟁점적 반론을 제기하고 있는 글이다. 박상수는 이 글에서 신형철 비평관의 핵심이 되는 ‘윤리 비평’이 ‘자아에서 주체로의’ 논리에 근거한 ‘주체의 윤리학’이지만, 그가 옹호하는(했던) 텍스트들이 실제로는 ‘자아의 무한한 팽창과 확산’을 보여주는 것들이었다고 반론한다. 이 관점에 따르면, 신형철이 열성적으로 옹호했던 2천년대의 텍스트들은 “무의식의 세계가 아니라 초자아가 주도하는 외설적 쾌락의 세계였는지도 모른다”. 그와 결부지어 그는 2천년대 문학을 지탱하였던 ‘윤리 비평’ 역시 “자신의 반상품성〔“우린 지금 저항하고 있습니다”〕을 또 하나의 독특한 상품성으로 포장하여 유통시키는 모더니즘의 저 오랜 전략을 여전히 답습”한 혐의가 있다고 진단한다. 송승환의 ?언어의 파노라마와 감각의 확산-2000년대 젊은 시인들의 시와 언술 방식?은 분석하기가 녹록치 않은 2000년대 시인들의 개성적 화법을 세밀하게 분석한 논증적 비평의 모범적 사례라 할 만하다. 송승환의 관점에 따르면 2000년대 젊은 시인들의 발화에 나타난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은유에서 환유로, 풍자와 상징에서 알레고리로의 이동, 그리고 ‘감각’의 확산이라는 현상이다. 그의 해석에 따르면 이러한 언술 현상은, 유토피아 부재 인식과 가시적 형태의 적대적 대상의 소멸, 육체적 감각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근거 상실의 시대적 상황의 미적 증후들이다. 2000년대 시현실에 대한 이러한 전반적 진단 하에 김경후·정재학·이기성·신영배·박판식·박상수 등의 텍스트가 각각 사실의 재구성과 초현실, 추상과 극사실, 아이러니와 몽상 등의 카테고리로 묶여 치밀하게 분석되었다. 함돈균의 ?부조리(극)를 상연하는 시들-포스트 2008에 관한 한 스케치?는, 그동안 주된 비평적 관심이 되어 왔던 2000년대 텍스트들의 지형을 조금 더 현재의 시점으로 이동시켜 보기를 권하고 있다. 그의 조심스러운 관찰에 따르면 2000년대의 시단의 풍향계는 2008년을 전후하여 조금 변화하는 것으로 보인다. 송승환의 관점을 일부 공유하면서도 그것과는 다른 견해차를 드러내면서, 그는 2008년 이전 ‘선배 시인’들의 시가 ‘능동적 니힐리즘’에 근거하는 면이 있었다고 파악한다. ‘부조리’라고 하는 불모성의 철학에 근거하면서도 ‘1인 전쟁’으로 세계를 ‘돌파’하려는 시적 의지가 있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그러나 2008년 이후 ‘후배 시인’들의 텍스트들은 선배들과 불모성의 철학을 공유하면서도 ‘닫힌 연극’을 상연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면에서 이 텍스트들은 바로 앞의 선배들과 부조리의 철학을 공유하지만, ‘부조리극’의 형식적 완결성 추구를 위한 언어적 퍼포먼스 자체에 집중하는 것처럼 읽힌다. 조재룡의 ?정치적 사유와 그 행위로서의 시-왜, 시, 그리고 비평은 필연적으로 정치적인가??는 문학사에 대한 계보학적 인식과 문학 형식의 ‘본질’에 관한 철학적 질문을 통해, 시의 ‘필연적’ 정치성을 깊이 탐문하는 도전적인 글이다. 조재룡에 따르면, ‘시인’의 ‘말’에는 ‘재현’하는 말이 지닌 위험성, 즉 “최대치의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 이 ‘재현’의 위험성을 그는 ‘다시-제시한다’는, ‘만듦(poiesis)’의 의미와 결부짓는다. 이런 관점에서 ‘사건’과 ‘역사’는 ‘(시적인) 발화’를 통해서만 존재하고 운동한다. ‘역사는 요약되지 않을 권리를 갖고 있다’는 명제에 의거하여, 그는 시의 정치성을 “자기 동일성에서 미끄러지는 차이, 이 차이에서 빚어지는 새로운 관계, 이 관계의 새로운 가치를 역사의 실질적 구성물인 순간과 그 순간의 틈입 속에서 포착”해 내는 것으로 규정하는 한편, “그것 없이 지낼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는 언표의 실천으로 파악한다. 이러한 관점에 따라 60년대 김수영, 80년대 황지우, 90년대 이원과 2000년대 황병승의 텍스트가 지닌 ‘위험성’을 사유한다. 네 편의 의욕적인 평론에 독자 여러분의 관심을 부탁드리며, 후속 반론(?)이 있다면 그것도 대환영이다.
이번 호 「우리 시대의 시인」은 올해 세 번째 시집 『눈물이라는 뼈』를 상재한 김소연 시인을 주인공으로 택했다. 우리 시에서 ‘여자의 시간’과 ‘육체의 시간’에 대한 천착을 매혹적이고도 진지하게 수행하고 있는 김소연의 고유한 자리를, ?눈물에 대한 한 연구?라는 제목으로 장은정 평론가가 정성껏 자리매김해 주셨다. 두 번째를 맞는 「풍크툼」은 ?나무와 바퀴?라는 제목으로 이근화 시인이 써주셨다. 이 글을 읽으면서 독자들도 시인의 바람대로 “오늘도 안 보이는 나라로 굴참나무”와 더불어 “넘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 「발견, Neos」는 2009년 『한국일보』로 등단한 이우성 시인을 택했다. 이 원 시인이 “이미지를 가지고 이미지를 지우는” 이우성 특유의 언술 직조 방식에 초점을 맞추어 이우성의 시를 분석했다. 이 분석에 따르면 이러한 이미지 직조의 방식은 “견고한 것은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는 그의 인식에서 비롯된다”. “가능을 다시 불가능으로 바꾸는 힘”을 가진 이우성의 시세계를 주목해 주기를 바란다.
한편 오랜 시간 고대해 왔던 새 코너, 「황현산의 한국 현대시 산고」가 드디어 연재를 시작한다. ?한용운-이별의 괄호?라는 제목으로 황현산 평론가께서 문을 열어 주셨다. “조국광복에 대한 염원”과 “높은 지혜의 체득을 향한 한 선사의 희구”와 “한 연인의 열정”이 포개어져 있으면서도, 그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는 한용운의 『님의 침묵』의 해석적 ‘신비’를, 황현산은 어떤 “절대적 성의의 기운” 속에서 찾는다. 인간의 정신으로 온전히 파악하고 인식될 수도 없는 ‘절대’라는 말이 그렇듯이, ‘만해의 이별’은 “‘어떤 것’을 무한하게 드러내면서 가리는 ‘어느 것’들이 차례차례 그리고 동시에 들어오는 괄호다”. 하나의 텍스트를 통해 말과 세계의 깊이를 찬찬히 헤아려 볼 기회를 주신 황현산 평론가께 감사하며, 계속될 연재에 독자들의 성원을 부탁드린다.
이번 호 「탐구」 코너는 ‘진리와 주체의 죽음’이 선포된 오늘의 시점에, ‘진리-보편성’과 ‘주체’의 복권을 선언하고 있는 지적 거인 알랭 바디우(A. Badiou)의 ‘정치철학’을 소개한다. 알랭 바디우의 제자이기도 한 서용순·홍기숙 두 박사께서 귀한 글을 보내주셨다. 서용순의 ?바디우와 혁명적 정치의 주체성?은 오늘날의 정치적 상황에 근거하여 바디우의 ‘진리-주체’ 철학의 의미를 짚어주고 있는 시의성 있는 글이다. 바디우적 의미의 ‘정치’는 ‘진리’를 생산하는 계기로서 이전의 모든 정치적 질서에 구멍을 내는 ‘정치적 사건’을 통해 새롭게 전개되는 ‘혁명적 정치’이다. 이 ‘정치’가 문제삼는 오늘의 현실은 ‘세계화된 세계’, ‘민주주의(제도)’라는 이름의 ‘하나의 세계’이다. 그러나 ‘하나의 세계’에서 ‘자유’는 자본 이동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에 불과하며, 거기에서 ‘민주주의’라는 기표는 자본주의의 확장과 보장을 위한 관리체계로 전락해 있다. 바디우는 이 ‘하나의 세계’에 대해 ‘오로지 하나의 세계가 있다’는 테제로 맞선다. 바디우에 따르면 “세계의 존재 방식인 무한한 차이는 역시 무한한 동일성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오로지 하나의 세계가 있다’는 테제는 “우리는 모두 같아질 수는 없지만, 그 다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의 세계에 존재한다는 것, 그 하나의 세계에서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다”. 필자에 따르면 이러한 ‘선언’은 오늘의 세계자본주의 질서에서 상징적 질서가 불가능하다고 금지하는 것을 가능한 것으로 선언하는 일이며, 그 선언을 끝까지 견지하는 충실성의 윤리 속에서 바디우적 의미의 ‘해방적 정치학’이 탄생한다. 홍기숙의 ?라이프니츠를 바라보는 들뢰즈와 바디우의 철학적 차이?는 라이프니츠를 상이하게 전유하는 들뢰즈와 바디우의 관점 대비를 통해, 그들의 철학적 ‘선택’과 ‘개입’의 실천적 의미를 헤아려 보게 하는 글이다. 라이프니츠의 철학적 개념을 ‘생성’, ‘효과’, ‘사건’ 등 자신의 철학적 개념으로 전유하는 들뢰즈의 입장과는 달리, 바디우에게 라이프니츠는 싸워야 할 철학적 투쟁의 대상으로 해석된다. ‘우연성’, ‘공백’, ‘불안정성’ 등을 통해 사유되는 바디우적 의미의 ‘진리’와 ‘사건’ 개념에 라이프니츠의 ‘모나드’, ‘무모순성의 원리(모순율)’, ‘충분이유’, ‘식별불가능의 원리’ 등의 개념은, ‘사건’의 불가능성을 암시하는 ‘구성주의’ 철학의 근거들이 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그것은 ‘정치’를 우연적 사건을 동반한 진리의 절차로 사유하는 바디우에게서 보수적이며 닫힌 체계의 근거로서 해석된다. 필자는 철학을 ‘개입’과 ‘선택’의 문제로 사유하는 바디우의 관점을 소개하면서, 이러한 관점들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독자들의 (실천적) ‘개입’에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조언하고 있다.
한편 「리뷰:서평」 코너의 텍스트는 2000년 『문학동네』로 등단한 이영주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언니에게』와 2006년 『시와반시』로 등단하여 첫 시집을 출간한 김지유의 『액션페인팅』이다. 각각의 시집을 김경인 시인과 백지은 평론가, 신동옥 시인과 황정산 평론가께서 정독해 주셨다.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가을호부터 『리뷰:계간평』은 채호기 시인과 강동호 평론가께서 맡아 주시기로 했다. 일품이 많이 드는 코너를 흔쾌히 수락해 주신 두 분께 감사의 말씀을 올리며, 지난 호까지 이 코너를 맡아주셨던 김영승 시인과 김나영 평론가께 역시 고마운 말씀을 전한다. 이번 호 「화보-마드리드에서 읽는 한국시」는 이하석 시인이 맡아주셨으며, 송종규 시인의 연재도 변함없이 계속된다. 무엇보다도 『시와반시』의 가을호는 다채로운 시인들의 신작시로 풍성한 계절을 맞이했다. 청탁에 응해주신 시인들께도 감사드린다.

프로이트는 ‘증상(무의식)’이 있는 자리를 염두에 두면서, ‘당신은 그것이 있는 곳으로 가야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라캉의 해석에 따르면 증상(무의식)이 있는 곳이야말로, 주체에게 가장 알려지지 않은 곳이기 때문이다. 시인이 앓고 있는 증상이 ‘시’라면, 그 시의 자리 역시 알려지지 않은 곳일 터이다. 『시와반시』는 그곳으로 가는 모험을 게을리 하지 않으리라. 이번 호 「탐구」에 나오는 용어를 빌리면, 이 모험이야말로 ‘불가능’을 견지하려는 시인의 ‘충실성’일 터이다.

* 함돈균, 「그것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