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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응접실

벌레 먹은 시

by 고요의 남쪽 2010. 9. 26.

  

 

벌레 먹은 시/최호일

 

 

이제, 무거운 가방을 내려놓고 이걸 봐

 

열무김치가 놓여 있네

길모퉁이에서 가늘고 여린 열무김치

공장에서 찍어내지 않은 제품

정직하게 말하면 김치가 아니라 벌레 먹은 열무지만

열무김치로 소리내어 읽네 아무려면 어때

시니까

벌레가 먹다 남긴

이걸 롯데 껌처럼 씹어 봐

 

아이들은 종국에는 벌레 먹기 위해 푸성귀처럼 태어나고

장난감을 만지며

거짓말을 습득하기 위해 무럭무럭 자란다

 

저 나뭇가지는 그림자를 복사하네

아무렴 어때 오늘은 이 골목에서 사람의 말을 버리고

발목을 자르고 노란 풍선을 날리자

 

자전거를 타고 가다 오후엔 담배를 끊고

모퉁이를 돌아나와 열무 구멍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자

아무려면 어때 이 구멍으로 보면 모두

벌레 먹은 시인 걸 담뱃불을 붙이기 전까지 나는

사람의 눈을 가졌을 뿐

 

*시인은 언어적 자의식으로 충만한 사람이다. 그는 '언어'를 찾아 헤매고 궁극에는 사물들 속에서 '언어'를 발견하고 경험하려는 존재이다. 다시 말하면 '언어'의 도구적 기능을 넘어 '언어' 자체에 대한 탐색에 공을 들이는 이가 바로 시인이다. 하지만 그 언어가 신성함과 선명함을 동시에 잃고, 병들고 벌레 먹고 있다면? 이러한 의식이 '시'에 메타적으로 다가간 다음 시편!(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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