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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의 빈터

맑은 행복을 위한 345장의 불교적 명상

by 고요의 남쪽 2010. 7. 21.

97.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백척간두라면 얼마나 대단한 높이의 장대일까? 1척이 30센티미터이니 30미터 정도의 장대이다. 그러나 여기서 숫자는 하나의 환유적 수사일 뿐 그 자체의 지시적 의미는 허약하다. 다만 백척간두가 임계지점 혹은 임계지점 직전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존재와 세계의 질적 비약은 임계지점을 통과할 때만 솟구치듯 나타나기 때문이다. 임계지점에서 한 발짝만 내디디면 애벌레가 나비가 된다. 그 지점에서 한 발짝을 내디디면 액체인 물이 기체인 수증기로 돌변한다. 더군다나 그 지점에서 두어 발짝 내디디면 보통사람도 천재가 된다. 그런 원리라면 죽었다 다시 사는 심정으로 두 눈 질끈 감고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하는 것도 해볼 만한 일이다.

▣백척간두는 아무에게나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꿈꾸는 자에게 혹은 선택 받은 자에게 주어지는 어떤 상태, 어떤 상황이다. 백척간두는 멎을 듯한 하강의 위기이자 가파른 상승의 기회이다.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하기 위해서는 장대의 재질과 장대가 꽃혀있는 지세와 장대를 감싸고 있는 풍향을 제대로 읽지 않으면 안된다. 뿐만 아니라 몸을 가누는 지헤와 허공에 발 딛는 용기와 약속한 세계에 대한 믿음 없이 진일보는 불가능하다. 이토의 가슴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안중근에게서, 기왓조각으로 악창을 긁고 있는 구약성경 속 욥에게서 그것을 본다. 그렇다 하더라도 정작 중요한 것은 '백척간두진일보'를 생활인의 일상사 속에서 살아가는 지혜이다. 생은 고해이므로 우리는 누구나 자기 나름의 백척간두를 산다. 그렇게 느꼈든 무심히 지나쳤든, 되돌아보면 지나온 세월은 백척간두의 연속이었다.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는 지팡이의 진일보 없이 어찌 허물 벗은 나비가 될 수 있으랴.(2010. 7.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