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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시의 곳간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by 고요의 남쪽 2010. 6. 28.

한도 ․ 41

 


겨울바람이 이유도 없이 내 모자를 벗겼다. 이유도 없이가 한 짓이다. 아버지의 일생과 맞바꾼 모자이었으나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검은 뻘밭이 막무가내로 내 신발을 삼켰다. 막무가내가 한 짓이다. 어머니의 기도와 맞바꾼 신발이었으나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든 유곽이 느닷없이 내 속옷을 벗겼다. 느닷없이가 한 짓이다. 먼저 간 누이의 영혼을 팔아 산 속옷이었으나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발바닥으로부터 머리끝까지 바람과 뻘밭과 유곽의 해일이 쳐들어왔다. 도둑의 행방이 묘연하다. 깻단을 털듯 누가 물푸레로 내 몸을 두드렸다. 물푸레가 한 짓이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소금 기둥으로부터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못한 문자들이 이 빠진 전갈처럼 새까맣게 새까맣게 쏟아져 내렸다. 그러나의 소행이다.

                                                    

해는 지고, 그 마을

이목구비 문드러졌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