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
無上正等覺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풀이말이다. '위 없는 바른 깨달음'이란 뜻이다. 이 최고의 깨달음은 어떻게 가능할까. <<반야심경>>은 반야바라밀다에 의하여 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三世諸佛도 이 반야바라밀다에 의하여 무상정등각을 얻었다는 것이다. 삼세제불처럼 반야바라밀다에 의거하여 무상정등각에 이르는 것을 초등학교 학생기록부의 '장래희망란'에 고딕체로 써넣으면 어떨까.대통령도, 과학자도 다 무상정등극에 이르기 위한 수행의 길이라고 여기는 세상이 다가오면 어떨까. 내친 김에 수행으로서의 삶, 수행으로서의 일상, 수행으로서의 직업, 수행으로서의 글쓰기를 구현하자고 제안해 보면 어떨까. 비본질적인 것에 목숨 걸며 낭비되는 삶이 안타까워 허황한 듯한 제안을 내놓는다.
▣ 고요는 가볍고 적막은 무겁다. '고'는 마른 소리이고, '적'은 젖은 소리이기 때문이다. 적막은 문명과 제도와 욕망의 우울을 먹고 살고, 고요는 흰 구름, 산들바람, 느리게 흘러가는 강물소리의 혈육이기 때문에 그렇다. 수행이란 적막에서 고요로 옮겨 앉기 위한 안간힘이 아닐까. 그러나 어찌하랴. '위 없는 바른 깨달음'은 지붕이 없어 비가 새고. 위가 없는 인간세는 자주 발 밑까지 젖는다. 가령 이런 일이 있었다. 그곳 서해안 안면도의 푸른 소나무 숲에는 태초의 고요가 살고 있었다. 젊은 날 죽은 고등학교적 친구의 시비 제막식은 헌화로 시작되어 미망인의 인사로 끝이 났다. 슬퍼할 것, 추억할 것 저마다 챙겨들고 훌훌 떠난 뒷자리를 나는 오래 지켜보고 있었다. 고요가 적막으로 변하는 바람의 빛깔과 만져질 듯 아려오는 시간의 두께 앞에서 얼마나 망연했던가. 이승의 삶이란 고요와 적막 사이 가건물 지어 놓고 마른 풀잎처럼 부대끼는 것;(2010. 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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