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혹은 김춘수와 김수영
나는 한 번도, 그리고 아직도 그 길의 끝까지 가보지 못하였다. 입영하기 전날 밤이었을 듯하다. 작은 도시의 한 여인숙;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와 “떨어진 가랑잎에서 들리는 지난여름 풀무치 소리”를 뒤적이며 밤을 지샌 기억이 있다.
김춘수를 만나고 연이어 김수영을 만나게 되었다. 김춘수를 읽으면 김수영이 풀밭처럼 다가왔고 김수영을 읽으면 김춘수가 바람 부는 호밀밭 풍경처럼 어른거렸다. 다음 글(80년대를 바라보며 선후배 시인의 書信을 통한 詩의 論議, 1980년 『심상』1월호 특집)에 그때 내 마음의 음영이 잘 드러나 있다. 그대로 옮겨 본다.
八公山의 빛깔이 아름다운 겨울입니다. 봄도 그렇듯이 大邱의 가을은 퍽 짧은 듯합니다. 언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웃하여 살면서도 이렇게 적조하였습니다. 건강은 어떠하신지요.
저는 지난 일년 동안 줄곧 金洙暎과 모더니즘과 에리히 프롬과 疎外問題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것은 힘겨운 일이었고 절망과 회의와 한없는 짜증스러움이었습니다.
제가 기실 金洙暎에게 관심을 갖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선생님의 詩世界를 이해하고자 하는 욕구와 무관하지 않은 듯합니다. 선생님으로부터 문학수업을 받고, 추천이란 것을 받고, 선생님의 작품에 익숙한(선생님의 작품을 애독하였다는 뜻으로)저에게 無意味詩는 별다른 저항 없이 수용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無意味詩論이 당대에 진행중이라는 사실만큼이나 오히려 객관적 이해를 그르치는 것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해방후 한국 시단에, 선생님과 맞은 편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을 하다 간 시인이 金洙暎이었고 맞은 편이라는 선생님과의 대립적 관계는 無意味詩論의 이해에 필요한 거리를 유지하는데 다소의 도움이 되리라 믿었습니다.
60년대 말부터 선생님께서 진행하고 계시는 無意味詩에 대해 제가 알고 있는 지식은 퍽 상식적인 것임을 미리 말씀 드려야 하겠습니다. 따라서 지금 말씀 드리고자 하는 몇 가지 궁금함은 우매한 것이 되리라는 것을 예측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최근 어느 칼럼에서 無意味詩에 대한 견해를 명쾌하게 지적하고 계십니다.
<나에게 있어서 무의미란 무엇일까.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文字를 쓰면 存在次元에서 사물을 보자는 것인데 이것은 일상생활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시는 일상생활에서의 경험과는 다른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사물을 대할 때는 認識이나 감정이 우리의 관습이나 旣成觀念을 떠날 수가 없다. 이것을 우리는 타파해야 한다. 그러니까 무의미의 시는 관습이나 기성관념의 입장에서 보면 虛無가 된다. 허무는 일체의 의미를 거부한다. 그것은 이 세계를 의미 이전의 원점으로 돌리는 일이 된다. 다만 사물이 있다는 감정으로 사물을 볼 따름이다. 이것은 시에서만 가능한 일이다.......의미는 그러니까 論理고 論理의 結論이고 그 체계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런 일련의 사실들을 시에서 거부한다. 사물은 논리나 논리의 그물인 체계에 얽매일 수는 없다. 그 자체 자유로운 것이다. 그러니까 시는 자유로워야 한다. 시는 絶對自由에 대한 동경으로 태어난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시는 상대성을 떠나고 있다. 이런 입장은 시에 대한 하나의 極限的 認識이라 할 수 있으리라. 남들도 나의 이러한 생각을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나는 그것을 시인한다. 그러나 散文을 대하는 내 입장은 다르다.>
우선 여기에서 느껴지는 것은 인간보다 사물을 앞세운 듯한 태도입니다. 시는 인간의 知的行爲의 소산이고 인간의 행위는 인간을 위한 것이라고 할 때, 사물을 意味 이전의 세계로 환원시킴으로써 기성논리의 사슬로부터 해방된 절대자유의 공간을 획득하려는 무의미시의 노력은 인간의 편에서 보면 우회적으로 보이고 우회적이라는 점에서는 소극적인 자세가 아닌가 여겨집니다.
또한 궁금한 것은 무의미시의 어떤 한계입니다. 시가 언어를 매제로 하는 숙명적인 사항과 함께, 논리를 파괴하려는 無意味詩의 논리도 종국적으로 하나의 보편적 관념이 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상기할 때 예상되는 한계는 불가피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러한 점에서 무의미시론의 시에 대한 극한적 인식은 하나의 실험으로 이해됩니다. 실험은 항상 전위적이며 전위적 행위는 反大衆的 속성일 듯합니다. 현대의 위기를 분별없는 대중의 분별없는 권리주장에서 찾고 있는 오르테가가 현대예술의 기능에 대해 예술을 이해하는 부류와 그렇지 못한 부류를 구분하는 것이라 말할 때 그것은 범속한 인간들에 대한 적의의 표현으로 보이고 또한 선생님의 무의미시의 이념과도 유사한 점이 있는 듯합니다. 과연 우리와 같이 미숙한 사회, 頂點에 의해 이끌려 가는 대중이 소외된 사회에서도 오르테가적 관점이 얼마만한 설득력을 가질까 하는데는 의문이 생깁니다. 오일쇼크로 대변되는 자원난, 이념의 흔들림, 산업공해로 빚어지는 인간소외, 물질문명의 횡포와 정신문화의 간단없는 붕괴 등의 보편적 사항 이외에도 우리는 3.8선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는 남다른 어려움에 처해 있기 때문입니다. 눈치를 살핀다는 것은 이미 근본적으로 창작의 차원이 아님을 명심할 때 우리의 상황은, 특히 시인에게 있어서 그것은 아무리 궁핍하다하더라도 지나치지 않을 미숙한 사회로 여겨지며 시로서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할 수 있다는 것인가를 회의하기 이전에 눈 돌릴 수 없는 위급함으로 인식됩니다. 김수영이 그의 생애를 통틀어 고민한 것 중의 하나로 우리와 같이 미숙한 사회에서의 시인은 시의 技術에만 치중할 수 없다는 애로와 불행의 각성이었는 듯합니다. 이러한 김수영의 고민에 대한 도식적인 이해가 허락된다면, 그것은 詩人意識과 市民意識, 藝術性과 社會性의 갈등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시인이면 누구나 한번쯤 겪는 갈등이겠지만 해결하기 힘든 것으로 느껴집니다. 김수영의 표현을 빌린다면, 시는 예술성의 편에서 보면 예술성이 자기의 전부이고 사회성의 편에서 보면 사회성이 자기의 전부이기를 주장하는, 즉 그것들의 반반이란 있을 수 없다는데 그 어려움이 있는 듯합니다.
많은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대체로 60년대 한국시가 시의 예술성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70년대는 그 사회성에 치중한 듯하고 史的논리로 볼 때 80년대의 시는 그것들의 초극적 지점의 확보와 전개가 요청된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그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닌가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가능한 것인지요. 가능하다면, 이미 시문학사의 거대한 산맥을 이루신 선생님의 무의미시론의 입장에서 어떤 암시를 받을 수는 없을는지요.
어느 지면에선가 선생님께서 <處容斷章>과 관련하여 섹스와 테러리즘을 말씀하신 것을 본 기억이 납니다. 그것이 실제 작품에서 어떻게 수용되고 극복되는가에 대한 저의 관심은 <處容斷章>3부를 기다리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저의 개인적인 관심이 아니라 한국문단 전체의 기대이리라 봅니다.
저는 요즈음 테러리즘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폭력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듯합니다. 테러리즘은 어딘가 모르게 감추어진 세련된 기교와 같은 뉘앙스가 있지만 저를 억누르며 압도하는 것은 노골적이며 거친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지난가을 저는 제 무릎이 하염없이 부러지는 하룻밤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날 당한 고통과 울분은 육교를 오르면서도 문득 생각이 나고 잠자리에서도 저를 괴롭히곤 합니다. 마음 같아선 좀더 굵고 큰소리로 시를 쓰고 싶었습니다. 그것만이 저를 구원해 주리라는 희망은 아직도 쓸쓸한 유보사항으로 남아 있습니다.
횡설수설이 되었습니다. 저의 두서없는 글이 선생님께 누가 되지 않을지 염려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카렌다를 갈아 걸며 지난날을 반성하고 부픈 꿈에 설렙니다. 풀렸던 태엽을 감으며 80년대를 맞이하겠습니다. 뭐 그리 속시원한 일이 있을 리 없겠지만......삶의 진실이 영원함으로 남을 노래, 聖書처럼 인간에게 비전을 주는 한 行의 빛나는 시, 절실한 아픔의 절실한 표현을 찾아 한눈팔지 않고 헤매겠습니다. 저의 젊음에 대한 신뢰와 오만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선생님의 작업이 필경 험한 상황의 고독한 양심임을 믿고 있듯이 이것이 선생님께서 제게 주신 사랑에 보답하는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20여년 전의 내 생각은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정교하지 못하다. 그러나 소박한 대로 김춘수와 김수영 사이를 머뭇거리는 심리의 음영은 얼비쳐 보인다. 그 길의 끝까지 가 보지 못한, 그 길의 끝까지 갈 수 없는 날들의 우유부단한 태도와 엉거주춤한 의식이 <~인 듯하다, ~일 것이다, ~느낌이 든다> 등등의 어사가 빈번히 사용되고 있는데서 새삼 확인된다. 문체심리를 들여다보건대 나는 단정과 확신의 햇볕 속으로 나서지 못하고 늘 추정과 유보의 그늘 아래 숨어 있는 것이다.
어줍잖은 나의 편지에 선생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답장을 주셨다.
姜군에게,
언덕 하나를 사이하고 이웃에 살고 있으면서 정말 만나보기가 힘드네. 오늘은 자네에게서 조금 색다른 편지를 받고 얼마큼은 생각을 가다듬어야만 했네. 답을 쓰지 말까 하다가 결국은 답을 쓰게 되었네. 이 글이 우리 두 사람 사이에서 오고가는 사사로운 것이 아니라, 공개될 성질의 것이라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네. 그러나 어차피 이런 기회가 아니면 쓰지 못할 것 같은 물음을 자네가 해왔기 때문에 몇 자 내 생각을 적어보기로 했다네.
자네가 인용한 글에 나와 있는 그대로 <無意味詩>란 그런 것이라네. 물론 더많은 설명을 해야 하겠지만 지금은 적당한 자리가 아니라서 생략하네. 다만 왜 그런 詩觀과 입장을 취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설명을 좀 해두는데 그치기로 하겠네. 나에 대한 오해랄까 이해부족이랄까 하는 견해들이 있는 것 같아서 말일세. 그리고 자네의 글 속에도 내 詩觀과 입장에 대한 궁금증이 있는 것 같기도 해서 그런다네.
자네도 말하고 있다시피 나는 金洙暎을 늘 의식하고 있었다네. 그가 「우리와 같은 미숙한 사회에서의 시인은 시의 技術에만 치중할 수 없다는」고민을 했다고 자네가 말하고 있는 것은 옳은 말이네. 그는 그랬었고, 나아가서는 60년대의 한국에서는 시가 필요없다고까지 생각하고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네. 이 때의 시는 물론 예술을 지칭한 것이라네. 그는 결국은 예술을 부정했지만, 그는 生理的으로 예술을 저버릴 수 없을 뿐 아니라, 現代의 여러 前衛藝術에 대한 관심과 소양이 있었다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다 버리더라도 그는 60년대의 이 땅에서 뭐가 필요한가를 짐작한 사람이라네. 그것은 良心-道德的 覺醒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네. 그의 시의 난삽함과 混沌相은 그의 生理 및 藝術的 素養과 道德感覺과의 갈등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 끝내 그는 어느 쪽으로도 자기를 청산하지 못하고 말았다네. 그러나 그의 고민-갈등을 밀쳐두고 그의 한쪽만을 날카롭게 전개시켜간 그의 후배들이 수없이 나타나고 그들의 詩作을 비호하는 이론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네. 이 사실을 자네는 잘 알고 있겠지. 그것은 도덕적 각성의 문제라네. 이것이 우리의 역사적 現場에서는 무엇보다도 시급하고 거의 유일한 문제라고 판단한 사람들의 과장에 가까운 표정이요 주장이었다네. 지금도 이런 표정과 주장은 그 密度를 더해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네. 나는 이 사실 자체는 매우 고무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네. 그러나 歷史의 어떤 시기에 있어서도 하나의 표정과 하나의 주장으로 굳어진다는 것은 그 표정과 그 주장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현상은 아닐 것일세. 나는 그 점에 있어 하나의 반성의 자극제가 되고 싶었다네. 藝術에의 모험과 感性의 모험이 그래서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네.
金洙暎식으로 藝術을 技術-더 나아가서는 技巧라고 해도 상관없지만-이라고 하더라도 그 기술을 통하여 우리는 形式意識을 가지게 되고 文化意識으로까지 그것은 연장될 수 있다네. 예술을 버릴 때 우리는 문화의 중요한 속성을 놓치게 된다네. 洙暎의 도덕에의 志向性이 고조될 때는 反形式的 어떤 표정이 드러난다네. 그의 시의 난삽성이나 混沌相을 이런 측면에서도 바라볼 수가 있을 듯하네. 한편 우리가 도덕 쪽으로 너무 기울어지게 되면 만년의 톨스토이처럼 民謠와 같은 旣成의 가장 소박하고 自然發生的인 형식에 의식적으로 접근해가서 이 또한 形式的 無感覺 상태에 빠지게 된다네. 새로운 형식에의 각성은 예술의 부단한 任務라야 하네. 그것이 또한 예술의 創造性의 일변이 아닌가? 다다이즘의 傳統破壞도 그것은 형식으로부터 시작되었고, 그 운동 자체가 새로운 형식에의 意識을 밑바닥에 갈고 있었다고 봐야하네. 藝術의 展開란 形式의 전개라고도 할 수가 있을 것이네. 내가 하고 있는 시에서의 論理의 破壞도 실은 새로운 형식에의 의지와 관계가 있다네.
그 다음으로는 詩가 지나치게 道德的이게 되면 生의 實相(Reality)을 놓치게 된다는 그것이 문제라네. 시는 그래서 存在次元-의미(도덕)이전의 원점을 응시하는 노력을 잊어서는 안된다네. 善이니 惡이니 하는 가치(의미)이전의, 의미가 새롭게 떠오르는 方向感覺이 있어야 된다는 말이네. 그러니까 無意味-즉 虛無와 늘 對面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일세. 이것은 시의 자세를 말한 것일세. 그런 일을 우리 시단에서 누군가가 해 주어야지, 그렇잖으면 사태를 안이하게 처리하는 타성이 詩壇에까지 만연할 것일세. 나아가서는 劃一化된 어떤 의미가 혼자서만 판을 치게 될 것일세.
姜군, 물론 나는 孤獨하네. 그러나 누군가가 고독하지 않다면 이승에서의 우리들의 진짜 連帶와 참다운 意見傳達은 不可能하게 될 것이네. 나는 孤獨했던 사람들의 얼굴을 내 意志가 해이해지려고 할 때는 떠올리곤 한다네. 그럼 오늘은 이만 하세. 한번 들리게나.
문학에 대한 노 시인의 고뇌가 베어있는 선생님의 글 속에는 무의미시론을 떠받치고 있는 고독, 허무, 형식, 모험 같은 어휘들이 벽돌처럼 단단하게 박혀 있다. 고독이 두렵고 모험이 무서워서일까. 나는 형식 쪽으로도 도덕 쪽으로도, 역사 쪽으로도 허무 쪽으로도 그 길의 끝가지 가보지 못하였다. 김수영과 김춘수가 내 의식 속에 공생하고 있었다. 예술과 사회가 내용과 형식이 길항하고 화해하기를 바랐다. 화해와 길항의 자장이 내 시의 에너지이기를 꿈꾸었다. 두 번째 시집인 『절망의 이삭』이 출간되었을 때 부산의 『오늘의 비평』팀이 나를 찾아왔다. 그들은 내 시에서 김춘수와 김수영이 만난 자리를 읽는다고 했다. 감각은 김춘수에게서 배우고 삶에 대한 시각은 김수영에게서 배운 것이 아닌가라는 그들의 진단에 나는 그렇다고 쉽게 동의했다. 엉거주춤을 옹호하기로 했다.
쟈크 샤보가 누구인지 나는 잘 모른다. 잘 모르는 그의 한 구절이 자주 나를 찾아와서 위로하고 격려하고 때로는 나무라곤 하였다. “......진정한 작가란 事物과 言語, 現實과 想像, 이승(神話, 文化)과 저승......이 양자 사이의 경계에 천막을 치는 유랑인으로 남아 있는 자이다. 그의 주된 덕은 (그의 유일한 덕은 아닐지라도)이 양자의 어느 쪽에도, 사물에도 언어에도, 현실에도 상상에도, 이승에도(放棄에 의해서) 저승에도(豫期에 의해서)자리를 잡지 않으려 하는 데 있다.” 문학청년 시절 애독했던 『바슐라르 연구』(곽광수, 김현 저)의 날개에서 나는 이 구절을 만났다. 경계라는 말, 천막이라는 말, 유랑인 이라는 말은 매혹적이었고 지금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 길의 끝까지 간다면 이미 경계는 없다. 경계란 끝과 끝의 이음 부분이니까. 천막이란 이동 중인 집이니까. 그 길의 끝은 유랑의 끝이기도 할 테니까. 내 시의 엉거주춤은 경계에 천막을 치는 유랑인의 자세라고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면 나는 그 길의 끝까지 가 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 가보지 않은 것이다.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해 보라. 선 것도 아니고 앉은 것도 아닌, 화장실에서 용무를 끝내고 혁대를 잠그기 직전의 속옷을 추스르는 자세를 떠올려 보라. 그것은 인체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힘든 자세임이 틀림없다. 하늘과 땅을 떠받치고 있는 모습이니까. 하늘과 땅의 무게에 짓눌리고 있는 형국이니까. 그러나 엉거주춤에 대한 옹호는 반거충이라는 자괴감과 맞물린 정서이자 유사한 감정이다. 그 길의 끝까지 가지 않은 엉거주춤함에 대한 옹호조차 엉거주춤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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