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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의 빈터

거기 실개천이 흐르네1

by 고요의 남쪽 2009. 4. 30.

-거기 실개천이 흐르네-


                                                                          하늘까지 70리

 

  나는 한 번도, 그리고 아직도 그 길의 끝까지 가보지 못하였다. 그때 왜 나는 코피를 내거나 코피를 흘리거나 끝장을 보지 못하고 울음 속으로 도망치고 말았을까.


  단기 4288년 3월 어느 날 나는 상주군 화북면 평온리 조그만 국민학교 운동장에 서 있다. 한쪽 가슴에는 붉은 점박이 천으로 만든 콧수건을 달고, 다른 한쪽 가슴에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문맹퇴치세금잔납의달이라고 쓴, 뜻을 안다해도 잉크가 번져 판독할 수 없는, 광목을 오려 만든 패찰을 달고 뻗뻗하게 굳은 자세로. 자연에서 문명으로 들어서는 입문의 순간, 낯선 세계와 처음으로 관계를 맺는 자리, 제도와 사회 속으로의 편입을 위한 의식, 아마도 입학식 날이었으리라.

  의식이란 무거운 것, 무거운 분위기에 가위눌려 한결같이 주눅들고 한결같이 긴장한 생후 8년 혹은 10년 안팎의 아이들 중에 오직 한 아이만이(곧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학교 근처에 사는 그 아이, 신현수의 아버지는 순사였고 그의 형은 몸집이 큰 상급생이었다)기세 등등하다. 기선을 제압하겠다는 듯 처음 보는 아이들의 얼굴을 향해 호드기로 후후 아주 기분 나쁘게 침을 튀기며 오고 있다. 덤비면 그냥 두지 않겠다는 듯, 두 눈을 부라리며. 아무도 만류하지 않는다. 누구 하나 꿈쩍하지 않고 착한 강아지처럼 차례차례 꼬리를 내리고 있다. 어찌할 것인가. 내 차례가 다가오고 있다. 가슴이 쿵쿵, 얼굴이 화끈 화끈 달아오른다. 꼬리를 내릴 것인가, 맞설 것인가. 생땀나는 갈등의 시간. 꼬리를 내리자니 명예와 자존심이 말이 아니고 맞서자니 부라린 눈알이 너무 무섭다.

  여덟 살 짜리 까까머리 꼬마가 무슨 명예? 무슨 자존심?  화북면 남부출장소 소장을 지내신 아버지는 딸자식을 도시로 유학 보낼 만큼 개명한 분이셨고, 내가 입학한 국민학교의 사친회 회장이셨고 뼈대있는 집안의 종손이신 아버지는 고을의 유지이자 상주군 일대의 지명 인사 이셨고, 따라서 나는 언제나 아버지의 후광과 동네 사람들의 기대로부터 자유스럽지 못했던 것.

  명예와 자존심에 떠밀려 불쑥 솟구쳤다 캄캄한 낭떠러지로 떨어져 혼비백산하는 느낌. 두 주먹을 불끈 쥔 그 순간의 낭패스러움을 이와 달리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다. 짧은 순간의 눈싸움이 있었지만 상대방의 기세는 더욱 등등하였고 두 팔을 걷어 부치고 기마자세를 취한 그는 넘을 수 없는 거대한 파도처럼 나를 압도했다. 어쩌면 싸우지 않고도 상대방의 기를 꺾어 주위의 찬사를 한 몸에 살수도 있으리라는 기대는 터무니없는 오판이었고 마침내 나는 울음 속으로 도망침으로써 부끄러운 패배를 자인하고 말았다. 힘세고 싸움 잘하면 대장이 되고 영웅이 되던 시절 처음으로 겪은 처참한 좌절의 경험이었다. 나는 그렇게 이 세상과 조우했다.


  문병 온 사람들에게 팔순이 훨씬 넘으신 어머니는 묻지도 않은 고향 이야기를 꺼내셨다. 하늘까지 70리 밖에 되지 않는 하늘 아래 첫 동네라는 요지의 말씀이셨다. 지금의 행정구역상으로 경북 상주시 화남면 임곡리를 어머니는 그렇게 소개하셨다. 짐작컨대 그렇게 불쑥 고향 이야기를 하시는 어머니의 의중에는 험난하고 가파른 삶의 비탈을 들추어내고 싶은, 들추어내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어떤 강박관념이 있었던 게 아닐까. 산비탈을 타고 내려온 고난의 여정, 그 끝간데가 바로 여기 당신이 누워 계신 병상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싶으셨으리라.

  그곳에 오려면 25번 국도를 이용해야 한다. 승용차가 없으면 북부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화령 장터에서 내려 시골 택시에 고단한 몸을 맡기면 된다. 당신의 출발지가 대구나 서울이라면 세 시간, 혹은 네 시간쯤이면 하늘 아래 첫 동네에 닿을 수 있다. 호드기 사건의 현장인, 지금은 폐교가 되어버린 평온국민학교 근처에서 신작로를 버리고 산 속을 향해 십리 길을 더 오면 된다. 아마도 당신은 하늘 아래 첫 동네로 접어드는 그 십리 길이 포장된 도로임을 의아해 할 것이고, 산을 깎고 암석을 깨부수는 채석장을 수시로 드나드는 덤프터럭 군단에 놀랄 것이고, 晉州姜氏世居地라고 쓴 표석이 서 있는 성황당을 넘어 범죄 없는 마을을 기리는 입간판을 지나 그곳에 이르면 너무도 똑 같은 여느 시골 마을임에 실망을 금치 못할 것이다.

  진주 강씨, 인동 장씨, 김해 김씨 성을 가진 세분의 할아버지가 임진왜란 때 피난 와서 정착한 마을이라고도 하고, 그 지형과 지세로 보아 전설 속의 우복동이 바로 이곳이라고도 하고 동학의 접주들이 피신했다 잡혀가기도 한 마을이고 보면 한때 얼마나 두메산골인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한국의 알프스로 불릴 만큼 경관이 수려한 구병산이 아홉 폭의 병풍을 북쪽 멀리 두르고 있는 모습이 하늘 아래 첫 동네를 꿈꾸었던 당신의 기대를 충족시키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그곳은 여전히 내 어머니에게는 하늘까지 70리 밖에 되지 않는 하늘 아래 첫 동네이고 적어도 그곳은 내 생의 출발점이자 내 삶의 근거임을 어쩌랴. 산과 들의 빛깔로부터, 바람의 표정과 태양의 기울기로부터 흐르는 개울물 소리로부터 세시풍속의 체취로부터 말씨와 말투로부터 우리들의 의식이 자유롭지 못하다면 다시 그곳은 내 문학적 상상력의 한 가운데임이 분명하다.   

  솔직히 말하건대 25번 국도를 따라 열에 열 시간을 달린다하더라도 하늘까지는 여전히 구만리이고 우리 나라 지도를 이 잡듯 쥐 잡듯 뒤진다 하더라도 하늘 아래 첫 동네는 이제 없다. 그곳이 그립다면 당신은 자동차를 버리고 낙타를 타야한다. 언어의 낙타를 타고 맨발로, 그리고 아주 느리게 흑백필름 같은 세월을 거슬러 와야한다.

  20년 가까이 되었으리라. 하늘 아래 첫 동네에 대한 그리움을 나는 이렇게 쓴 적이 있다.


  퍽 오랜만에 고향집에 들러 나는 깊고 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대구에서 3백 리, 먼 여행길의 피로와 속리산 세미나로 밤잠을 설쳐 몹시 지쳐있었기 때문이었다. 잠에서 깨어나니 깊은 시골 밤이 빗소리에 젖고 있었다. 아마도 내 곤한 잠을 일깨운 것은 봄비 소리였을 것이다. 뼈 속 깊이 스며드는 풋풋한 고향의 흙 냄새였을 것이다. 야단이 난 듯한 개구리 소리였을 것이다. 저토록 애절한 소쩍새 울음 소리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 저들이 지키는 적막한 공간, 등불을 들고 몽상의 작은 숲길을 걷고 싶어 나는 잠에서 깨어났을 것이다. 모두다 어디로 사라져 갔을까. 사라진 것들이 한없이 그리웠다. 칠성님이 살던 떡갈나무 성황당, 산신령이 잠자던 후미진 산신각, 청아한 바람 불던 소나무 숲, 깊이를 알 수 없던 미궁의 늪, 논둑 길 누비던  꽹과리 소리, 궂은 날 울던 앞산 능구렁이, 산 고양이 새끼치던 외양간 다락방, 북 치며 귀신 쫓던 눈먼 참봉, 진달래 하늘대던 아저씨의 나무지게, 이들은 이제 사라지고 없었다. 사라져 그리운 것이 어디 그 뿐이랴. 먼저 간 누이의 환한 얼굴, 보리밥 먹고도 배부르던 행복, 사서삼경 가르치던 선비들의 푸른 이마, 옹달샘 물맛처럼 끝없이 좋은 인심, 난리도 피해 간다는 내 고향의 전설이 사라지고 없었다. 돈벌기 위해서, 편하게 살기 위해서, 출세하기 위해서 쓸만한 사람들은 도시로 떠나고 병약한 사람들만 애처롭게 사는 마을, 도시생활에 실패한 사람들이 비료값도 안 되는 농사나 지으러 어깨 풀 죽이고 찾아오는 곳, 마을의 빈집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춘궁의 지난날이 차라리 그리웠다.


  돈 벌기 위해서, 편하게 살기 위해서, 출세하기 위해서 나도 고향을 떠난 사람들 중의 한 사람. 지금 나는 돈도 출세도 나의 것인 아닌 백면서생이 되어, 무명 시인의 침침한 눈으로 하늘 아래 첫 동네, 춘궁의 그날을 되돌아보고 있다.

  까까송이 어린 날 나는 왜 찻길까지 가 보려는 모험을 했던 것일까. 차를 타고 멀리 멀리 가면 아름다운 동화 속의 나라가 있다고 믿었던 것일까. 똑같은 하늘, 똑같은 골목길, 똑같은 배고픔이 지겨웠던 것일까. 산길을 벗어나 드넓은 신작로를 끝없이 가면 맛있는 음식, 예쁜 스웨터 눈바람을 막아주는 방한모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아니다,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바깥 세상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 심심한 날의 부질없는 나들이었을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군용 트럭이었지만 마당가에 땔감으로 쌓아둔 소나무 더미가 도망치는 광경이 신들린 듯 무서웠다. 우리는 그 길의 끝까지 가지 못하고 멀리 신작로가 바라다 보이는 황서방네 묘지까지 갔다가 되돌아왔다. 날 저문 동구 밖을 향한 어머니의 눈길이 잦았으리라. 그때 나는 처음으로 미루나무 끝에서 푸르게 반짝이는 바람을 보았다.

  아버지에게도 그랬고 어머니에게도 그랬다. 나에게도 마찬가지로 춘궁의 그날, 하늘 아래 첫 동네는 버리고 떠나야할 곳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꿈의 기와집을 지었다 부수고 부수었다 짓는데 한 평생을 보내셨고 어머니는 창출을 고아 만든 한약을 이고 포항으로 동해로 열흘이나 보름씩 떠돌다 되돌아오는 게 고작이셨다. 아버지는 소심한 가장이자 선산의 조상을 지켜야할 책무 때문에, 어머니는 한 인간이기 이전에 아내이고 어머니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셨다. 가난한 시절 이 나라 부모들이 다 그와 같았겠듯이 아버지 어머니는 내게 삽과 괭이 대신 연필과 필통을 쥐어주셨고 나무지게 대신 책가방을 등에 메어주심으로 언젠가 그날 하늘 아래 첫 동네를 벗어나려 하셨다. 나는 자랑스런 대학생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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