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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응접실

수평선

by 고요의 남쪽 2009. 11. 24.

수평선/이규리


세상에서 가장

긴 자(尺)가 수평선을 그었으리라

허리나 목을 백만 번 감아도

탱하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푸른 현,

내 눈에도 수평선이 그어졌다

바다를 떠나와도 자꾸 세상을 이등분하는,

저 높낮이의 명암들

수평선 건져내어 옥상에 걸면

오래 젖어온 생각도 말릴 수 있겠다


*바다에는 파도가 있고, 횟집이 있고, 갯바위가 있고, 갈매기가 있고, 돛단배가 있고, 백사장이 있고 수평선이 있다. 수평선에는 다시는 올 수 없는 그 사람이 있고, 그대 한 숨이 있고, 윤심덕이 부르다 죽은 사의 찬미가 있고, 탱! 하고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 허리나 목을 백만 번 감아 콱, 콱, 숨막히는 너와 나의 지병이 있다. 오래 젖어 온 지병도 수평선 건져내어 옥상에 걸면 탱! 하고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마 그럴 것이다. 우리는 저마다 세상에서 가장 긴 자를 가진 사람들이니까. 푸른 현은 높낮이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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