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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응접실

유홍준 시인의 시

by 고요의 남쪽 2009. 11. 19.



 

* 묵뫼 위에 나무가 - 유홍준

그의 눈은 붉고 컸다
흡입구처럼 열려 있었다
뻘건 구름이 눈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잎사귀 뻘건 나무가 눈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살을 모두 발라낸 뼈다귀가 이승을 돌아봤다
살점을 모두 버린 손가락은 길고
허공을 가득 채운 눈구멍은
더 깊다

잎이 뻘건 나무가
눈 속에 뿌리를 박는다

어떤 기억은
썩지 않는 뼈다귀처럼 크고 단단하다
묵뫼에서 뻘건 구름이 자꾸 피어난다
그의 주검을 빨아 먹고 입이 뻘건
내가 묵뫼 위에 서 있다



* 31일 - 유홍준

걸게 그림을 뗀다 그림을 걸었던 자리, 하얗다 하얗다 선탠한 여자의 브레지어 속처럼, 어루만지면 딱딱해지는 벽이 유두를 돋우어낸다 나는 외투를 벗어 유두 위에다 건다 얼굴도 내장도 없는 거죽이 유두를 물고 빤다 내 거죽은 서서 유두를 물고 내 거죽은 서서 둔부를 들썩거린다 유두를 물고 빠는 입을 떼는 순간, 거죽은 방구석에 쭈그러진다 거죽은 곤한 잠에 빠져든다 거죽만이 매달릴 수 있는 절벽, 절벽,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거죽이 거죽을 입고 私娼을 빠져나간다



* 깊은 발자국 - 유홍준

봄가뭄 보름에 그만
물 가둬놓은 못자리, 논바닥이 때글때글 말랐다
못자리 만든다고 내 맨발이 딛고 다닌 발자국 옴폭한 곳에
올챙이 새끼들이
오골오골 말라죽었다
아! 내 몸뚱어리 무게를 싣고 다녔던 발자국 속이
저 올챙이들의 生死가 걸린
궁지였다니,
울음으로 밤 하나 새워보지도 못한 저것들이
떡잎 같은 발꿈치 여린 울대 더 이상 적시지 못하고 죽어 갔다니,
봄가뭄 보름 끝에 기어이
후드득 비가 듣는다 금방, 깊은 발자국 속을 채운다
반갑다 어미개구리 哭소리......
봄가뭄 보름이 저 울대 저렇듯 맑게 단련시켜 놓다니,
바람 자는 내일 아침이면 무논 가운데 멍하니 서 있는 백로처럼
죽음이 지나간 물 속의 내 발자국
물끄러미 들여다 볼 수 있겠다
무논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는 백로가
내 발자국 속의 주검 집어 올려 삼키는 것, 볼 수 있겠다



* 노란 주전자 - 유홍준

그날, 누이는 누런 주전자를 들고 뙤약볕 속을 가고 있었다 아버지의 거시기가 달린 주전자를 들고 가고 있었다 목마르고 못말라 아버지의 거시기를 빨며, 불볕 속을 가고 있었다 누런 아버지의 거시기가 흘러 얼룩이진, 검정 무명치마를 입고 가고 있었다 옆구리 찌그러진 주전자 되어, 한 됫박 눈물 찔끔거리며 돌아올 수 없는 길 가고 있었다 이놈의 주정뱅이, 이놈의 아편쟁이, 이놈의 개망나니, 어머니가 주전자를 마구, 마구 짓밟으며 울부짖었다 주전자만 보면 지금도 나는, 긴장을 한다 주전자처럼 어깨를 오므리고, 파르르 떤다 나는 노란 주전자의 노란 주전자, 머리뚜껑이 들썩거리는



* 들깻잎을 묶으며 - 유홍준

추석날 오후, 어머니의 밭에서
동생네 식구들이랑 깻잎을 딴다
이것이 돈이라면 좋겠제 아우야 다발
또 다발 시퍼런 깻잎 묶으며 쓴웃음 날려보낸다
오늘은 철없는 어린것들이 밭고랑을 뛰어다니며
들깨 가지를 분질러도 야단치지 않으리라
가난에 찌들어 한숨깨나 짓던 아내도
바구니 가득 차 오르는 깻이파리처럼 부풀고
무슨 할말 그리 많은지
맞다 맞어, 소쿠리처럼 찌그러진 입술로
아랫고랑 동서를 향해 거푸거푸 웃음을 날린다
말 안 해도 뻔한 너희네 생활,
저금통 같은 항아리에 이 깻잎을 담가
겨울이 오면 아우야
흰 쌀밥 위에 시퍼런 지폐를 얹어 먹자 우리
들깨 냄새 짙은 어머니의 밭 위에 흰 구름 몇 덩이 머물다 가는 추석날
동생네 식구들이랑 어울려 한나절 푸른 지폐를 따고
돈다발 묶는, 이 얼마만의 기쁨



* 자전거 체인에 관한 기억 - 유홍준

눈이 없는 사람이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에 시선을 둘지 모르는 개가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일치감치 부모의 눈알을 후벼 먹은 후레자식들이 휘파람을 불며 모여 들었다 제멋대로 각목이 쟁여져 있었다 훔쳐온 자전거가 벌겋게 썩어가고 있었다 개만도 못한 자식들이 자전거 체인을 벗겨 흉기를 만들고 있었다 담배를 돌려 피우며 팔뚝을 지지고 있었다 비린내가 풍겼다 고기는 팔고 비린내만 달고 온 어머니,돈에도 비린내가 난다 돈에도 비린내가 나 빠지지 않는 사람냄새에 진절머리 쳤다 눈 없는 아버지 말없이 듣고 있었다 손목에 체인을 감아쥐고 무엇을 후려치고 싶은 시절이 흘러가고 있었다



* 절편 - 유홍준

떡집에 가서 떡 뽑는다
떡방앗간 기계 헐떡거리며 혓바닥을 내민다
떡집 여자 가위를 들고
쉴새없이 혓바닥을 자른다
혓바닥 위에
수레바퀴 문양을 찍는다 뜨끈뜨끈한
혓바닥 담은 상자 넘겨받고 떡집 나서면
세상 모든 길이 검은 절편, 검은 혓바닥
망상 위에 기름 발라가며 떡 싣고 돌아가는 길
떡살무늬 바퀴를 끼운 자동차들 죽음을 향해 어깰 겨룬다
더러는 잘못 찍은 절편의 문양처럼
뭉개지고 찌그러지고



* 오동도로 가는 問喪 - 유홍준

남해고속도로 위를 달리는 관광버스 안에서 한 떼의 늙은이들이 몸을 흔들고 있다 늙음마저도 한때, 제 늙음을 탕진하기 위하여 지랄, 발광을 해댄다 늙어빠진 것이 무슨 바다를 뛰어들겠느냐 늙고 병든 것이 무슨 염병할 계단을 올라가 동백을 보며 한숨을 쉬겠느냐 진작 술이 올라 시뻘게졌다 단숨에 뚝 떨어져버리면 그만, 呪文도 呪術도 없이 금방 한 무더기 진달래군단이 되어 어라, 냅다 동백 무찌르러 달려나간다 후문으로 왔다 후문으로 빠져나가는 불륜 같은 삶, 섬진강 휴게소에 들러 화장실마다 늙은 항문 늙은 후문 뭉텅뭉텅 피동백을 피워 놓고 동백 다 봤다 동백 다 피웠다 제 몸 속의 동백을 다 흘려보낸 늙은이들, 귀청 때리는 트로트 메들리가 장송곡으로 들려오는 남해고속도로, 죽음도 한때, 나는 속도를 늦추고 관광이라고 쓴 영구차를 따라 천천히 조문을 간다



* 물고기꿈 - 유홍준

내가 태어나고 자란 낡아빠진 기와집이
한 마리
검은 물고기 같다

노을에 물드는 옛집 기왓장들, 비늘처럼 반짝이는 때

잡초 우거진 마당에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면
아가미 같은 부엌문 덜컹거리고
헐어빠진 옆구리로 저녁바람은 빠져나간다

살을 모두 발라먹고 남긴 생선 뼈다귀처럼 앙상한 옛집 서까래들

피라미처럼
떼지어 뭉쳐놀던
육남매의 좌심방 우심실 두 칸 방은 허물어졌다

둥근 물고기 눈 흡뜨고, 옛집 멀거니 바라보고 돌아온 날

꿈을 꾸었다 지느러미 같은 용마루 곧추 세우고

옛집이
한 마리 물고기 되어 유유히 헤엄쳐 가고 있었다

보름달처럼 환한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근심걱정 없이 옛집 물고기 등에 올라타시고
아득하고 먼 茫茫
大海, 흘러
흘러가고 있었다



* 내 눈 속의 하루살이 - 유홍준

하루살이 떼 자욱하다
저 하루살이 떼를 통과하지 않고
석양의 나는 이곳을 벗어나지 못한다
가늘게 실눈을 뜨고
하루살이 떼 너머 가야할 길을 노려본다
(어느 틈에)
하루살이 한 마리가
네 실눈 속으로 날아 들어왔다
(이 조그만 것도 날개가 있고 속도가 있다니, 그것도
하루만에 종착지까지 도달하는!)
나는 하루살이를 뱉어내려고 눈꺼풀을 실룩거린다
(눈도 풍경을 먹었으니까 풍경 속의 미물을 먹었으니까)
눈꺼풀을 끔벅거린다
내 눈 속의 주검 내 눈 속의
죽음(호랑이가 씹었다
먹지도 않고 뱉을 놈, 이라는 욕이 있지)
주검을 뱉어내느라 벌개진 눈으로 나는
아랑곳없는 하루살이 떼를 휘젓는다 막무가내
죽음 앞에 두고 群舞 추는 저것들이
나를 에워싼다 저희랑 어울려
춤추자 한다



* 베개 - 유홍준

지푸라기가 든 베개를 베고 잤다
베개를 던지며 놀았다 지푸라기가 튀어나왔다
지푸라기처럼 푸석한 아이였다 가벼운 아이었다 쓸모 없는
아이었다 머리가 아팠다 늘 6교시를 다 채우지 못했다
뒈져버려, 아버지 목침을 던졌다
아버지 목침이 내 머리를 깼다 더 이상 머리가
아프지 않았다 가슴이 아팠다 베개가 늘 젖었다
젖은 베개를 그냥 농속에 집어 넣었다 싫었다
베개 위에 얼룩꽃이 자랐다
어머니 메밀이 든 베개를 만들어 주신다
참숯이 든 베개를 사 오신다
가설무대 약장수가 파는 바이오 磁力베개를 사 오신다
아직도 뒷골이 아프냐 큰애야
제 윗도리를 벗어 둘둘 말고 자는 인부처럼
잠이 달아야 한다 큰애야 뭐라 해도 베갯속은
잘 말린 人肉이 최고라더라 큰애야
머리 아픈 건 말 할 수 있지만 가슴 아픈 건 말 할 수 없어요
어머니,
허벅지 베어낸 살을 말려 내 베개 지으신다
어머니 또 내 베개 지으신다



* 자반 고등어 - 유홍준

얼마나 뒤집혀 졌는지
눈알이 빠져 달아나고 없다
뱃 속에 한 움큼 , 소금을 털어 넣고
썩어빠진 송판 위에 누워있다
방구석에 시체를 자빠뜨려 놓고
죽은 지 오래된 생선 썩기 전에 팔러 나온
저 여자, 얼마나 뒤집혀 졌는 지
비늘, 다 벗겨지고 없다



* 앉아서 오줌 누는 남자 - 유홍준

내 친구 재운이 마누라 정문순 씨가 낀 여성문화 동인 살류쥬 홈페이지에 들어갔더니 앉아서 오줌 누는 남자 동국대학교 사회학과 강정구 교수에 대한 기사가 있었다 어이쿠, 했다 나도 앉아서 오줌 눈 지 벌써 몇 년, 제발 변기 밖으로 소변 좀 떨구지 말아요 아내의 지청구에, 제기럴 앉아서 오줌 싸는 거 습관이 된 지 벌써 수삼 년, 날마다 변기에 걸터앉아서 나는 진화론을 곱씹는다. 이게 퇴화인가 진화인가 퇴행인가 진행인가 언젠가 여자들이 더 많은 모임에 가서 이 이야기를 했더니 박서영은 배를 잡고 웃고 강현덕은 그것이야말로 진화라고 웃지도 않고 천연덕스럽게 되받았다 역시 여자는 새침데기들이 더 무섭다 그건 그렇고 강정구 교수 전화번호라도 알아내어서 수다 좀 떨까 난 앉아서 오줌 싸니까 방귀가 잘 뀌어지던데, 낄낄낄 캑캑캑 앉아서 오줌 누는 남자끼리



* 수평선 - 유홍준

막막하다, 가늘고 길다
어떤 굵은 목숨의 모가지라도
목 매달 수 있겠다
질기디질긴
이 명줄
끊어버릴 수 있겠다
봐라 저 수평선 끝 한 토막 잘라 머리 동여매고 한 사흘
이 무거운 머리 밑에 아주 작은 섬 하나 고쳐 베고
나 이렇게 즐겁게 앓아 누울 수 있겠다
이것이 정말 죽었나
살았나
이름 모르는 조개들
내 얼굴에 달라붙어 살점을 파먹어도 뜯어먹어도



* 배추벌레 - 유홍준

배춧잎을 갉아먹는
배추벌레를 잡으려면
배추 앞에 쪼그리고 앉아야 한다
배추 밖에서 배추 속의 배추벌레를 잡으려면
배추밭에 배추처럼 엉덩이를 땅에 붙이고
(사타구니 속 무엇이 땅 속에
뿌리를 박도록) 쪼그려
앉아야 한다

(나도 배춧잎이 되어) 생각 위에 생각을 겹겹으로 싸며 생각해야 한다

잎 위에 잎을 쌓아 (입 위에 입을 쌓아)
내가 들어가 찾을 수 없는
푸른 배추 속 푸른 배추
벌레 몇 마리



* 오이꽃 - 유홍준

별자리를 기억하는 방법은
별과 별을 잇는
상상의 넝쿨을 뻗치는 것,

대청마루에 누워 늘어지게 낮잠 자고 난 해거름에는
발가락 사이사이 묵은 때 같은 것이나 뜯게 된다

멍하니, 굳은살 박힌 생각의 뒤꿈치나 찝어 뜯게 된다

그러다가 개밥별 뜨는 초저녁이 오면
나에게도
무슨 그리운 게 남아 있는가

그리움 없는 것도 불치병이라, 자가진단을 해보게 된다

마당가에 심어 놓은 오이덩굴에
노란 오이꽃들이
별처럼 점점이 박힌 것 바라보게 된다

별자리를 기억하는 방법은
별과 별을 잇는
상상의 넝쿨을 뻗치는 것,

하늘에도 노란 오이꽃들이 하나 둘 피어나는 것
바라보게 된다, 확인하게 된다



* 한 아름의 실감 - 유홍준

빨래를 너는 아내의 등 뒤로
살금살금 다가가
안고 싶다 안아. 보고 싶다
실감, 한 아름의 실감이여
(허공은 백 번 안아 보아도 허공!)
고백하노니
가늘고 날씬한 여자는 싫다
아름에 꽉차는 오동포동한 여자가 좋다
마흔 셋 드디어 나도 실감을 느끼는 나이 실감을
좋아하는 나이가 되었다(너무 조숙한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한 아름, 한 아름의
실감이여
흐믓하다 안아 줄 수록 좋아하는 실감이
지금 나의 곁에서 살고 있다 나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아름답다 실감이 입었던 옷을
하얗게 빨아 너는 아내여



* 어머니 독에 갇혀 우시네 - 유홍준

어머니 커다란 독에 갇혀
우시네 엉덩이가 펑퍼짐한 어머니
텅 빈 독 속에 갇혀 우시네
또아리 틀고 들어앉아
우시네 자식을 일곱이나 낳은
어머니 아랫배가 훌쭉한 어머니
배암으로 우시네 두꺼비로 우시네
마른 바람의 혓바닥으로 우시네
텅 텅 독을 빠져나갈 수가 없어서
텅 텅 텅 텅 빈 독 두드리며 우시네
속절없이 먼 하늘 바라보며 우시네
일흔 살 어머니 두드리면
댕그랑 댕그랑 맑은 울음 울리는 빈 독
나, 손마디로 두드리며 묻네

간장 같은 된장 같은 어머니, 거기 계셔요?



* 해변의 발자국 - 유홍준

얼마나 무거운 남자가 지나갔는지
발자국이, 항문처럼
깊다

모래 괄약근이 항문을 죄고 있다
모래 위의 괄약근이 똥구멍처럼, 오므려져 있다

바다가 긴 혓바닥을 내밀고
그 남자의
괄약근을 핥는다

누가 바닥에 갈매기 문양이 새겨진 신발을 신고 지나 갔을까?

나는 익사자의 운동화를 툭, 걷어찬다
갈매기가 기겁을 하고 날아오른다



* 안경 - 유홍준

이런
너는 두 다리를
귀에다 걸치고 있구나 아직
한 번도 어디를 걸어가 본 적이 없는 다리여
그러나 가야할 곳의 풍경을 다 알아서 지겨운 다리여
그렇구나 눈(目)의 발은
귀에다 걸치는 것
깊고 어두운 네 귓속
귀머거리 벌레 한 마리가
발이란 발을 모두 끌어 모으고 웅크리고 있구나
눈에서 귀로 발을 걸치는, 보고 듣는다는 것의 고역이여
얼마나 허우적거렸기에 너는
눈에서 귀로 발을 걸치는 법을 배웠을까
콧등 훌쩍이는 이 터무니없는 생각들
콧등 아래로 자꾸만 흘러내리는
이 형편없는 나의
眼目들



* 直放 - 유홍준

아아 이 두통 지금
나에겐 직방으로 듣는 약이 필요하다

그렇다 얼마나 간절히 직방을 원했던지
오늘 낮에 나는 하마터면 자동차 핸들을 꺾지 않아
직방으로 절벽에 떨어져 죽을 뻔했다

직방으로 骨로 갈 뻔했다

오, 직방으로

다가오는 연애, 쏟아져 내리는
눈물, 폭포

안다, 미친 자만이 직방으로 뛰어간다

십오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몸을 날린 直放人처럼
바닥 밑의 바닥, 과녁 뒤의 과녁을 향해 뛰어내리고 있는

이렇게 40년 동안을 뛰어내리고 있는 나는



* 수도관 속의 뱀장어 - 유홍준

새벽 세시에 나는 또 듣는다
꼭지를 틀어막아 놓은 수도관 속에서
오늘밤도 무엇이 흐느끼는 소리,
온 몸이 너덜너덜해진 뱀장어 한 마리가 대가리를 쥐어박는 소리......

얼마나 멀리서 흘러 들어온 걸까, 지상 15층
이 작은 아파트 수도관 속의
뱀장어는?

나는 불도 켜지 않고 어둠 속에 눈을 감고 누워 생각한다
꼼짝없이 빨려 들어갈수록 좁고 가늘어,
미끈거리고 날렵한 뱀장어들도 뒤돌아나가지 못하는

그 속에서 나는 지금
틀어막힌 출구를 대가리로 쥐어박으며
몸부림친다, 몸부림치는 뱀장어의 비린내를 듣고 있다

그렇다 뱀장어의 주검이 틀어막고 있는 우리 집
수돗물은 찔찔찔 나온다 날마다
뱀장어의 비린내가 난다



* 아스팔트 속의 거북이 - 유홍준

이 아스팔트 밑에 거북이 산다
분명하다 갑골의 등짝처럼 딱딱한 이 길바닥이
저렇듯 쩍 쩍 금이 간 것은
원칙을 지키지 않은 공사 탓이
아니다 짧고 뭉특한 발목에 질끈 힘을 주고
끙차, 아스팔트 속의 거북이 등짝을 밀어 올렸기 때문
확실하다 초과 적재한 저 화물차의 중량 탓이
아니다 저 균열, 거북의 등을 보라
이 비루먹을 길들을 다 갈아엎을 심산으로
해안이 가까운 거제나 남해
해남이나 진도의 캄캄한 밤에
아스팔트 속으로 제 대가리를 밀어 넣었을 거북이들!
보아라 이 망할 놈의 나라 도로 곳곳에
오늘도 롤러를 단 공사용 차량이
갈라터진 길바닥에 새 아스콘을 붓고 다지는 걸
아스팔트 속의 거북 수천 마리가 떼죽음, 압사를 당하는 걸



* 흉터 속의 새 - 유홍준

새의 부리만한
흉터가 내 허벅지에 있다 열다섯 살 저녁 때
새가 날아와서 허벅지에 갇혔다

꺼내줄까 새야
꺼내줄까 새야

혼자가 되면
나는 흉터를 긁는다
허벅지에 갇힌 새가 꿈틀거린다



* 하품하는 책 - 유홍준

이 책은 주둥이가 지퍼로 잠겨져 있다
이만오천오백오십 페이지의 이 책은
말할 수 없이 고독하다
허리춤이 단단한 쇠단추로 채워졌다
이 책은 두껍고 이 책은 무겁다
이 책은 가죽을 둘러쌌다
이 책은 가장 많이 팔리고
가장 오래 읽힌다 이 책은
표지만 보아온 자들도 내용을 다 안다
행간의 징.검.다.리 밟고
강은 건넌다 이 책의
화자는 늘 잠언을 섞어 말한다
잠의 언어들로 가득 찼다 이 책은 게으르고
멍청한, 하품하는 개 같다 이 책은
눈물이 없다 웃음이 없다 눈곱만 가득하다
영원한 잠 속으로 들어가는 자들의 무덤에
산 자들은 이 책을 넣어준다 이 책은 검은 활자들로
가득 차 있다 이 책은 매장된다 영원히
주둥이가 지퍼로 잠겨진 채.



* 저울의 귀환 - 유홍준

쇠고기 한 근을 샀다
하얀 목장갑 낀 정육점 여자의 손이
손에 익은 한 근의 무게를 베어 저울 위에 얹었다
주검의 一部를 받아 안은
저울바늘이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저울이
내게 물었다 인간들의 약속이란 고작
이 한 근의 무게가 모자란다고 보태거나 넘친다고 떼어내는 것?
맞아 저 쪽 봉우리에서 더 먼 저쪽 봉우리로
주먹만한 고깃덩어리들이 고단한 날개를 저어 날아가는 황혼녘
국거리 쇠고기 한 근 담아 들고
부스럭대는 비닐봉지 흔들며 늙은 어머니를 찾아가면
저울을 떨게 만든 이 한 뭉텅이 주검의 무게가
왜 이렇게 가벼운가 문득
저울대가 된 나의 팔이여
모든 것을 들어냈을 때 비로소 평안을 얻는
빈 저울의 침묵이여 나는 제로에서 출발한 커다란 고깃덩어리
주검을 다는 저울 위에 올라가 보고서야 겨우
제 몸뚱어리 무게를 아는 백열 근 짜리
四肢 덜렁거리는人肉


* 구두 속의 아버지 - 유홍준

아버지 구두 속에 꽃 심는다 얘야 나는 구두 신을 일이 없구나 아버지 구두 속에 흙 채우신다 아버지 구두 속에 물 부으신다 아버지 창가에 구두 옮기신다 아버지 손가락으로 검은 구두 속 파신다 아버지 구두 속에 눈알 빠뜨리신다 아버지 씨앗은 빨리 썩어야 싹이 나죠 나도 아버지 구두 속에 물을 붓는다 아버지 구두 속에 오줌을 싼다 구두 속에 빠뜨린 아버지 눈알 싹이 난다 창가에서 턱을 괴고 아버지 떡잎을 바라본다 구두 속에서 아버지 넝쿨 뻗어나온다 나는 아버지 꽃잎을 닦는다 구두 속의 넝쿨이 내 목을 조인다 나는 도끼로 아버지 발목을 힘껏 내리친다 아버지 밑동이 잘린다 아버지 나자빠진다 어머니 울면서 구두 속의 아버지 발목을 뽑아낸다 아버지 구두를 내다버린다 아버지 사라진 베란다엔 화분이 없다



* 고기 삶는 여자 - 유홍준

주검을 빨던 파리가
산 자의 음식 위에 날아와 앉는다

죽음 맛을 보라고,
송장 위에 앉았던 파리가
밥상 위에 날아 와 앉는다

쫒아도,

쫒아도,

죽음 맛을 아는 고양이 喪家의 담벼락에 웅크리고

고기 삶는 여자,
喪主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린다

무쇠솥 속의 살덩이를 뒤집지 못해
뿌연 수증기 속에 머리통을 집어넣고 끙끙거린다
핏발 가시지 않은 살덩어리에 고기 삶는 여자
푹, 푹, 칼집을 넣는다



* 검은 관 위의 흰 백합 - 유홍준

저것은 죽음을 불러내는
트럼펫

어디를 눌러야 할지
저것은
눌러야 할 피스톤이 없다

그런데도 저것은 있는 대로 목구명을 열어젖히고
소리가 나지 않는 비명을 지른다
저것은 트럼펫의
주둥이다

나는 조곡을 연주했다

누가 저것을 주검에게 바쳤나, 검은 상복을 입고

하얀 장갑을 끼고
나는 검은 관 위의 흰 백합 트럼펫을 불었다



* 喪家에 모인 구두들 - 유홍준

저녁 喪家에 구두들이 모인다
아무리 단정히 벗어놓아도
문상을 하고 나면 흐트러져 있는 신발들
젠장, 구두가 구두를
짓밟는 게 삶이다
밟히지 않는 건 亡者의 신발뿐이다
정리가 되지 않는 喪家의 구두들이여
저건 네 구두고
저건 네 슬리퍼야
돼지고기 삶는 마당 가에
어울리지 않는 화환 몇 개 세워놓고
봉투 받아라 봉투,
화투짝처럼 배를 까뒤집는 구두들
밤 깊어 헐렁한 구두 하나 아무렇게나 꿰 신고
담장 가에 가서 오줌을 누면, 보인다
北天에 새로 생긴 신발자리 별 몇 개



* 아홉시 - 유홍준

나는 아홉시 방향으로 나아갔다 목적이 없는 아홉시, 앞으로 나란히 아홉시, 아홉시를 향해 나는 아홉시를 밀며 나아갔다 아홉시를 뚫고 나간 육체의 흔적으로 내 시계는 찌그러졌다 터져나갔다 내 인생의 아홉시는 시계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아홉시 방향에는 목화밭이 있다 가시울타리가 있다 새 떼가 울고 있다 길쭉한 저수지가 있다 땡볕 아래 익사한 송아지가 눕혀져 있다 성황당이 있다 한 해에 한 명씩만 넘어가는 고갯마루가 있다 커다란 소나무 가지에 동아줄이 덜렁거리고 있다 동아줄에 달린 시체가 덩그렁 덩그렁 아홉시를 알리는 종을 치고 있다 아직도 아홉 살짜리 형이 그 종을 치고 있다



* 내 눈 속의 하루살이 - 유홍준

하루살이 떼 자욱하다
저 하루살이 떼를 통과하지 않고
석양의 나는 이곳을 벗아나지 못한다
가늘게 실눈을 뜨고
하루살이 떼 너머 가야 할 길을 노려본다
(어느 틈에)
하루살이 한 마리가
내 실눈 속으로 날아 들어왔다
(이 조그만 것도 날개가 있고 속도가 있다니, 그것도
하루 만에 종착지까지 도달하는!)
나는 하루살이를 뱉어내려고 눈꺼풀을 실룩거린다
(눈도 풍경을 먹으니까 풍경 속의 미물을 먹었으니까)
눈꺼풀을 끔벅거린다
내 눈 속의 주검 내 눈 속의
죽음 (호랑이가 씹었다
먹지도 않고 뱉을 놈,이라는 욕이 있지)
주검을 뱉어내느라 벌게진 눈으로 나는
아랑곳없는 하루살이 떼를 휘젓는다 막무가내
죽음 앞에 두고 群舞 추는 저것들이
나를 에워싼다 저희랑 어울려
춤추자 한다



* 나무의자 - 유홍준

마당 가에 버려진
나무의자
뿌리를 내린다 푸른 이파리가 돋는다

서까래 내려앉는 백 년이 흐르면
빈집은 꽃 피는 의자들로 가득 차리라

엄마의자는 엄마의자를
낳고 아기의자는 아기의자를
빈집 가득 낳으리라 어떤 의자는 지붕 위에 올라가 있으리라

지붕 위의 의자는
龍床보다 더 높이 오, 의자 앞에
나는 무릎을 꿇고 한 말씀 내리기를 기다리는데

당신이 버리고 간 빈집
의자
용문사 은행나무 뿌리를 내린다



* 우리 집에 와서 다 죽었다 - 유홍준

벤자민과 소철과 관음죽
송사리와 금붕어와 올챙이와 개미와 방아깨비와 잠자리
장미와 안개꽃과 튤립과 국화
우리 집에 와서 다 죽었다

죽음에 대한 관찰일기를 쓰며
죽음을 신기해하는 아이는 꼬박꼬박 키가 자랐고
죽음의 처참함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듣는 아내는 화장술이 늘어가는 삼십대가 되었다

바람도 태양도 푸른 박테리아도
희망도 절망도 욕망도 끈질긴 유혹도
우리 집에 와서 다 죽었다

어머니한테서 전화가 왔다
별일 없냐


별일 없어요

행복이란 이런 것
죽음 곁에서
능청스러운 것
죽음을 집 안으로 가득 끌어들이는 것

어머니도 예수님도
귀머거리 시인도
우리 집에 와서 다 죽었다



* 상가(喪家)에 모인 구두들 - 정진규


1998년 데뷔한 젊은 시인 유홍준의 첫 시집이다. 대체로 좋은 시들은 읽는 이들에게 첫 라인을 수평선처럼 그어놓는 어떤 무엇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새로운 발견 깨달음 놀라움 흥겨움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오지만 결국 몸과 감각에 물살을 만들어내는 감동을 지니고 있다. ‘감동’이란 말과 현대시를 별개의 존재로 알고 있는 독자들이 없지 않은데, 그건 괜한 선험적 판단이다. 시는 감동이다. 그것이 지적인 데서 나왔든, 서정적인 데서 나왔든 시는 감동이다.

유홍준 시들에 대해 어떤 이는 삶의 치욕을 너무 일찍 보아 버린 육체와 영혼이 해부학 실험실의 뜨겁고 흥건한 죽음 이미지로 가득 차 있다고 지적한다. 너무 소멸지향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시가 어둡고 칙칙하게 갇혀 있지만은 않다. 여기에 그의 시가 지니는 맛과 개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시집의 제목으로 삼은 시인 ‘喪家에 모인 구두들’이 왜 이토록 밝고 친숙하게 우리에게 다가오는가. 이 시는 ‘저녁 喪家에 구두들이 모인다/아무리 단정히 벗어 놓아도/문상을 하고 나면 흐트러져 있는 신발들/젠장, 구두가 구두를/짓밟는 게 삶이다/밟히지 않는 건 亡者(망자)의 신발뿐이다’로 시작한다. ‘밤 깊어 헐렁한 구두 하나 아무렇게나 꿰신고/담장 가에 가서 오줌을 누면, 보인다/北天(북천)에 새로 생긴 신발 자리 별 몇 개’로 끝난다.

이 시를 읽고 나면 그 첫 라인으로 두려움과 어두움의 대상인 죽음이 오히려 일상의 한 풍경으로 수평선을 긋는다. 그 친화의 이미지는 문상객을 대유(代喩)하고 있는 구두들에서 나온다. 또한 어수선한 상갓집 현관의 비속한 풍경과, 다음에 이어지는 개탄의 소리 ‘젠장’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데서도 나타난다. 그러한 맛을 내게 하는 시인의 솜씨가 만만치 않다.

그 다음 이어지는 ‘구두가 구두를/짓밟는 게 삶이다/밟히지 않는 건 亡者의 신발뿐이다’ 같은 개탄도 잘 맞아떨어진다. 구두들의 풍경에서 끌어낸 그럴싸한 이미지 아닌가. 시인은 그런 발견을 하나의 경구 형태로 써놓아 자못 세상을 꾸짖고 있는데, 읽는 이로 하여금 슬며시 미소 짓게 한다.

이 시의 마무리 또한 죽음이라는 엄숙한 풍경을 해학적인 여유로 바꿔놓고 있다. 밤 새워 화투라도 했으리라. 오줌 누는 풍경이 다시 ‘北天에 새로 생긴 신발자리 별 몇 개’로 상승한다. 초월 공간을 빚어낸다. 그것도 ‘신발자리’다. 이러한 의식과 표현의 시적 운용은 유홍준 시의 한 패턴을 이룬다.

이 시집의 ‘자루 이야기’ ‘노란 주전자’ ‘자전거 체인에 관한 기억’과 같은 시들은 삶의 치욕, 그 상처의 흔적들로 이어져 있지만 구성과 표현은 결코 굳어있지 않다. ‘자루’라는 상징어를 따라가노라면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입에서는 웃음이 나온다. 밝음과 어두움을 삶의 실체로 동시에 수용할 줄 아는 초월적 통합 의지가 보인다. 우리 현대시의 새로운 한 모습이다. 정진규 시인(동아일보)
 
 
 
* 유홍준

1962년 경남 산청 출생
1998년 <시와 반시>로 등단
시집 <상가에 모인 구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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