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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응접실

조용한 이웃

by 고요의 남쪽 2009. 12. 1.

조용한 이웃/황인숙



부엌에 서서

창 밖을 내다본다

높다랗게 난 작은 창 너머에

나무들이 살고 있다

나는 이따끔 그들의 살림살이를 들여다본다

잘 보이지 않는다

까치집 세 개와 굴뚝 하나는

그들의 살림일까?

꽁지를 까딱거리는 까치 두 마리는?

그 나무들은 수수하게 사는 것 같다

잔가지들이 무수히 많고 본줄기도 가늘다

하늘은 그들의 부엌

지금의 식사는 얇게 저며서 차갑게 식힌 햇살이다

그리고 봄기운을 한두 방울 떨군

잔잔한 바람을 천천히 오래도록 삼키는 것이다


*우리 집 부엌에는 싱크대가 있고, 가스레인지가 있고, 그릇이 가득한 찬장이 있고, 의자가 네 개 딸린 식탁이 있고...나무들의 하늘 부엌에는 까치집 세 개가 있고, 굴뚝 하나가 있고, 꽁지를 까딱거리는 까치 두 마리가 있고... 수수해서 나무들의 살림살이는 잘 보이지 않고, 수수하게 살아서 나무들의 일상은 말이 없고...우리 집 수도꼭지는 자주 수다스럽고, 삼겹살은 숯불 위에서 지글거리고, 왕소금이 없다고 투덜거리고...도대체 무엇을 위해 나는 오늘도 하루종일 커피 잔처럼 달그락거리나? 얇게 저며서 차갑게 익힌 햇살과 잔잔한 바람을 천천히 오래도록 삼키는 나무들의 웰빙. 창 밖 나무들과 조용한 이웃으로 살아가는 한 시인의 웰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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