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단상
소리는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가. 소리는 어디에서 잠자고 무얼 먹고 사는가. 이목구비도 없이, 몸도 없이, 소리는 무엇으로, 어찌하여 세계 내 존재가 되는가. 내 집무실 책상 위에는 청동으로 만든 종이 하나 있다. 두 손을 포갠 것 만한 초미니 에밀레종이다. 그 종소리는 때로 청아하고 자주 서늘하다. 종소리의 몸으로부터 흘러온 아침 햇살, 종소리의 이목구비로부터 불어오는 저녁 바람 속에 나는 자주 지친 시간을 앉혀두곤 한다.
침묵은 소리의 집이다. ‘내 시는 늘 무엇으로 채워지기를 바라는 배고픈 여백이거나 빅뱅의 내장을 감싸 안은 침묵이다’ 라고 쓴 적 있다. 침묵이 나이 들면 적막이 될 것이다. “잠 못 드는 적막이 벌떡 일어나 탕, 탕, 지팡이로 보름달을 두드렸다. 멀리 가는 강물의 팔다리가 쭉, 쭉, 내 몸에 가지를 쳤다.” 적막의 나뭇가지에 몸 찢겨본 적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사물의 소리를 볼 수 있고 소리의 맨몸을 만져볼 수 있는 사람. 그렇다면,
“울음이란 무릇 간절함뿐이므로 수염이 없고 모자가 없고 단추가 없고 단추 구멍이 없고 꿰맨 자국은 더더욱 없고 간절한 울음이란 맨몸이므로 손이 있고 발이 있고 코가 있고 콧구멍이 두 개 있고//개구리가 울었다 콧구멍 두 개가 슬픔을 둥글게 말아 올렸다 개구리가 울었다 콧구멍 두 개가 둠벙에 빠진 달을 노랗게 노랗게 밀어 올렸다 그리고 세상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는 당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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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를 기준으로 말할 때 고요와 적막은 소리의 화육(化肉)이라는 점에서 같고, 고요가 소리 이후라면 적막은 소리 이전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고요가 소리의 휘발 상태라면 적막은 소리의 앙금 상태라는 점에서 다르다. 고요가 텅 빈 소리라면 적막은 가득한 소리이다. 그러므로 소리의 구멍인 고요는 가이 없고, 한 시인의 어법에 기대어 말하자면 적막은 사각형의 기억으로 벅차다. 고요와 적막과 침묵; 얼마나 아름다운 소리의 혈육들인가.
우리는 그날 해인사에 있었다. 홍류동 계곡 산그늘을 거닐었다. 아픈 시인과 아프지 않은 시인과 물소리와 손잡고 우리는 그날 법고 소리를 들으러 갔다. 침묵과 적막과 고요의 등짐은 한결같이 무거웠다. 아픈 시인의 어눌은 적막했고 아프지 않은 시인의 미소에는 햇살이 튕겼다. 그 때 네 눈빛 고라니의 그것 같다고 느낀 적 있었다. 덫에 갇힌 고라니의 그 멀뚱거리는 눈빛, 그것은 불안과 초조, 두려움이었다. 체념이었다. 적막이었다.
아픈 중생을 위해, 아픈 사물을 위해, 아픈 세계를 위해 젊은 스님 두 분이 번갈아 법문을 외었다. 외우다 막히면 서로 쳐다보며 겸연쩍게 웃었다. 천진난만했다. 오로지 리듬뿐인 법문 소리는 아마도 아픈 중생과 아픈 사물과 아픈 세계를 데리고 서방정토까지 갈 것이었다. 서방정토를 데리고 올 것이었다. 법고 칠 시간은 아직도 20분이 남아 있었다. 최치원이 두고 간 전나무 아래에서 나는 침묵과 적막과 고요의 높이를 헤아렸다.
침묵;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시월의 마지막 밤을/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체/우리는 헤어졌지요/그 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한 마디 변명도 못하고 헤어져야 하는 건가요/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나에게 꿈을 주지만/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나를 울려요” 침묵은 이렇듯 그날의 쓸쓸한 표정을 가지고 있다. 그 때, 거기 무슨 일이 있었던가. 침묵은 이렇듯 돌아오는 계절의 장대 끝에서 저 혼자 목 메인다.
북을 두드렸다. 한 스님이 어루만지고, 두드리고, 폈다. 또 한 스님이 다시 아픈 세상을 어루만지고, 막힌 세상을 두드리고, 구석진 세상을 멀리 멀리 폈다. 또 한 스님이 다시 잃어버린 시간을 어루만지고, 잃어버린 시간의 벽을 두드리고, 검은 시간의 골짜기를 환하게 폈다. 북을 두드렸다. 또 한 스님이 다시 내 어머니 아픈 몸을 어루만지고, 내 어머니 막힌 세월을 두드리고, 내 어머니 이승의 논둑길을 조심조심 폈다.
적막; “어느 날 적막이/어느 날 적막에게 놀러 갔네/왼손이 오른손을 찾아가듯/내 마음의 집인 적막이/내 몸의 빈집인 적막에게 놀러 갔네/휴가 나온 병사처럼/어느 날 적막이 꽃그늘 아래/허벅지를 묻고 자고 있었네/자물쇠로 잠긴 미닫이 안에는/방아쇠 뭉치가 있을 거야 궁금해 하면서도/적막의 허벅지를 열어볼 수 없었네/열쇠를 잃어버려 어쩔 수 없었네” 그 때, 거기 무슨 일이 있었던가. 적막은 이렇듯 꽃그늘 아래서 심심하다.
소리는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가. 둥둥둥 북소리가 둥둥둥 어머니를 불러내었다. 둥둥둥 어머니가 둥둥둥 북소리를 불러내었다. 편하세요, 어머니? 침묵하셨다. 어디 계셔요, 어머니? 적막하셨다. 그곳도 비 오고 바람부나요, 어머니? 고요하셨다. 추녀 끝 풍경 소리가 고요를 흔들었다. 아니, 고요는 흔들리지 않는 것, 풍경 소리가 고요의 한 가운데 실금을 내었다. 소리는 무얼 먹고 사는가. 기러기 한 마리 가물가물 가장자리 하늘을 잡아당겼다.
고요; “가장자리 바람은/가장자리 바람으로 가득하듯이//바람에 밀려난 가장자리는/바람에 밀려난 가장자리로 가득하듯이//머나먼 오두막집/불 꺼진 심지처럼//얼어붙은 폭포는/얼어붙은 폭포로 가득하듯이//폭포 속 아버지는/폭포 속 아버지로 가득하듯이”에서와 같이 고요는 스스로 가득하고, “풀밭에 앉아 늦은 아침을 먹는다/개미와 함께 꿀벌과 함께 바람과 구름
과 함께/식탁 위에 툭, 떨어지는 감꽃과 함께”에서처럼 고요는 이렇듯 당신과 함께이다.
올 여름 장마는 지루했다. 장마 비 멎고 햇볕 났다. 기이했다. 장끼 한 마리 나뭇가지에 매달려 오래 울었다. 노래가 아닌 울음이었다. 장끼가 울 때마다 두텁고 무거운 햇볕이 꿩, 꿩, 뗏장처럼 무너져 내렸다. 지난 봄 그 마을 사람들은 새순 돋는 감나무 아래에서 고라니 수컷을 구워먹었다. 고라니 암컷이 슬피 울었다. 가까운 앞산에서 인가를 내려다보며 몇날 며칠 밤낮 없이 울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소리였다. 억장이 무너졌다.
무너진 억장 너머 전생이 보이는 듯했다. 억장 무너지는 소리는 전생의 소리이리라. 우리가 입고 있는 이승의 옷가지는 한 맺힌 전생의 천으로 만든 것일 테니까. “시인은 바람과 햇볕, 혹은 의자와 쇠붙이의 전생을 주목한다. 전생을 주목할 때 의자의 배꼽으로부터 시냇물 흐르고, 쇠붙이의 정수리로부터 피라미떼 솟구친다. 풍경이 일순 정경으로 바뀌는 날 것들의 축제, 우리는 그것을 시라 부른다.” 나는 지금 틱낫한의 명상음악을 듣고 있다.
“세월이 강물처럼 흘러갔다/고요의 남쪽이 다 젖었다”라고 쓴 적 있다. 고요의 남쪽에 잔디를 심었다. 금낭화, 도라지, 깽깽이풀, 쑥부쟁이, 나팔꽃, 찔레꽃, 분꽃, 물봉선화, 라일락, 두메양귀비를 심었다. 고요의 남쪽엔 메뚜기가 살고 사마귀가 살고 무당벌레가 살고 말벌이 살고 땅강아지가 살고 잠자리가 살고 지렁이가 산다. 침묵과 고요와 적막을 뜯어먹고 산다. 소리의 착한 새끼들! 보고 싶다. 세월이 강물처럼 흘러갔다. 고요의 남쪽이 다 젖었다.
내가 다룰 수 있는 악기는 없다. 안타깝다. 내가 제일 부러워하는 사람은 기타 치며 ‘이제 우리 다시는 사랑으로 세상에 오지 말기...’를 노래할 수 있는 당신. 피아노 건반 위에 흰나비 떼 휘날리는 당신의 손가락은 환상이다. 파이프 오르간 앞에 앉은 당신의 뒷모습은 얼마나 숭고한가. 바이올린의 현으로부터 튕겨오르는 가을 아침과, 첼로의 느린 현이 잠재우는 저문 들판을 나는 어찌하지 못한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불우한 악기이다.
고호는 왜 귀를 잘랐을까. 왜 소리로부터 도망치려 했을까. “한 고요가 벌떡 일어나 한 고요의 따귀를 때리듯/이별은 그렇게 맨발로 오고, 이별은 그렇게/가장 아름다운 낱말들의 귀를 자르고/외눈박이 외로움이 외눈박이 외로움의 왼쪽 가슴에 방아쇠를 당길 듯 당길 듯/까마귀 나는 밀밭 너머 솟구치는 캄캄한 사이프러스, 거기//아무도 없소? 아무도...”이 시의 소재는 별이 빛나는 밤을 그린 고호의 그림이지만 이 시의 모티브는 고요의 남쪽이다.
별이 빛나는 밤에 소리의 새끼들을 만나러 가리라. 감꽃 진지 오래이니 실눈 같던 메뚜기들 많이 자랐겠다. 옥수수는 벌써 익어 벌개미취 한창이다. 사마귀 앞발이 튼튼해졌겠다. 한 고요가 벌떡 일어나 한 고요의 따귀를 때릴 듯 아무도 없는 캄캄한 거기 가면 와인 한 잔 해야 하리. 나는 요즘 유리컵 가장자리로부터 천상의 소리를 불러낼 수 있는 법을 배웠다. 천상의 소리, 소리의 무지개! 고요의 남쪽에 걸어 두고 오리라. 별이 빛나는 밤에.
기형도를 읽었던가. 십년 전 어느 날 나는 ‘모든 이별은 세속적이다. 이제 추억은 쉴 곳을 잃었다.’ 라고 쓰고 있다. ‘버린다’는 것은 진정한 것을 맞을 준비라고 뒤이어 쓰고 있다. 사물의 정령인 소리여, 그대는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가. 세상의 경이며 법인 소리여, 그대는 어디에서 잠자고 무얼 먹고 사는가. 이목구비도 없이, 몸도 없이 소리여, 그대는 무엇으로, 어찌하여 세계 내 존재가 되는가. 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무심코 아니 유심코 손가락으로/책상을 탁탁 혹은 톡톡 두들긴 그 소리는/봄에 닿거나 여름에 닿거나 가을/겨울에 닿는다 순간 이 지구에서/수백년 동안 일어난 일이 없는/진동의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나비가 난다 아니 비가 오고/자작나무와 느티나무 잎이 썩는다//(중략)//내가 무심코 아니 유심코 손가락으로/책상을 탁탁 혹은 톡톡 두들긴 그 소리는/중국의 서안이나 미국의 텍사스나/인도의 갠지스 강에서도 순간/탁탁 혹은 톡톡 울린다 그래서/서안에서는 궁궐의 한 쪽 문이 열리고/텍사스에서는 주유소가 새로 생기고/갠지스 강에서는 시체 하나가 떠내려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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