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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의 빈터

나이를 먹는다는 것

by 고요의 남쪽 2009. 10. 21.

 

 

나이를 먹는다는 것



난데없이 폭풍우 들이닥쳤다. 저 산도 제 몸이 가려워 꽃 피우는 봄 사월. 전반 나인 마지막 호울 티샷을 끝낸 뒤였다. 그린 공략을 포기하고 카터에 오르면서 당신은 말했다. 환갑이 지난 이 나이에…!(그래 너는 나보다 몇 살 나이가 위였지) 나이를 먹는다는 것? 나이를 먹는다는 것! 그날 나는 40년 만에 처음으로 고등학교 동기들 골프 모임에 갔던 것인데, 충청도 중원 땅에서 낯설게, 아주 낯설게 맞닥뜨린 것은 시간의 굴레 혹은 세월의 감옥이었다.


세월의 비바람, 시간의 딱정벌레

세월이란 말은 아날로그이고, 시간이란 낱말은 디지털이다. 세월이란 말에는 비바람 불고, 시간이란 낱말 속에서는 온몸이 까만 딱정벌레가 기어 나온다. 세월이란 말의 서산 마을엔 찔레꽃 저 혼자 피었다 지고, 노을 지는 거기 우리 이모 기대 선 문설주 하염없다. 시간의 딱정벌레, 혹은 독일 병정들의 행렬을 따라가 보면 방수처리 잘 된 아라비아 숫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유리창이 보인다. 문설주는 자연이어서 아침 햇살 새털구름 쉬었다 가고 유리창은 과학이어서 달빛 별빛마저 미끄러진다. 세월에게서는 들풀 냄새가 나기도 하고 건초 타는 냄새가 나기도 한다. 아니 세월에게서는 첫닭 우는 새벽 뒷간을 다녀오시는 아버지 냄새가 나기도 하고 시골 장터 국밥집 아줌마 냄새가 나기도 한다. 시간은 무미 무취한 것이어서 1, 2, 3, 4, 5…는 언제나 1, 2, 3, 4, 5…이다. 유리창은 과학이어서 하루는 정확하게 24시간이고 한 시간은 빈틈없이 60분이다.

우리 이모 문설주에 기대 서 보면 그 때 그날은 어느덧이고 기다림은 언제나 아직도이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박인환, 「세월이 가면」 전문


소멸과 잔존의 문설주가 보인다. 없음과 있음, 실체와 흔적, 꿈과 현실, 뜨거운 그 때와 서늘한 지금 사이 문설주가 서 있다. 소멸의 대상은 몸을 가진 그 사람이고 잔존의 내용은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일 터. 기억은 몸이 없는 한낱 흔적일 뿐이므로 “내 가슴에 있네/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와 같이 잔존을 되풀이 확인하는 시인의 목소리는 가문 날 잦아드는 논바닥을 들여다보는 농부의 마음처럼 안쓰럽고 허망하다. 문설주에 기대서서 시인이 바라보는 세월의 뒷모습은 퍽 무정해서 무심해 보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비바람을 다독여 만든 무정, 저문 들녘 가는 연기 피어오르는 무심이므로 소멸과 잔존의 문설주, 그것은 환갑이 지난 이 나이에…!라고 한숨짓는 당신의 초상이다. 어느 날 문득 맞닥뜨리는 너와 나의 자화상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그 사람 이름을 잊는 것,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는 것. 나이를 먹는다는 건 흔적의 눈동자, 흔적의 입술, 흔적의 이름 가까이 불러 세워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이라고 귓속말 건네는 것.


가난했던 한 시절

정들면 지옥이라고 당신은 말한다. 졸업 후 30년이 되던 해 홈 커밍 행사 때도 나는 가지 않았었다. 30년 전 40년 전 그때, 거기에 다시 가서 어쩌자는 것인가. 잃어버린 시간 저편, 잃어버린 나를 만나 어쩌자는 것인가. 침침한 눈으로 볼 붉은 10대의 나를 만난다 한들 알아보기나 할 수 있을 것인가. 알아본다 한들 그 때 그 남루를 어찌할 자신이 없는 것이었다.

바람결에 들리는 바, 누구누구는 몹쓸 병을 얻어 죽었다 하고, 누구누구는 먼 나라로 이민을 갔다 하고, 누구누구는 고관대작이 되었다 하고, 누구누구는 사위를 본다 하고 며느리를 본다 하고,,, 내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는 40년 동안 귀 닫고, 입 닫고, 눈을 닫았었다. 정들면 지옥이라고 당신은 말한다. 시간의 딱정벌레가 없다면 지옥의 한철은 행복이리라.

대전은 내게 무엇이었던가. 내가 다닌 중학교 개교 이래 처음으로 그 학교에 합격했다고 기대와 부러움을 한 몸에 받게 했던, 이른바 한수 이남에서 제일간다는 명문 대전고등학교는 내게 무엇이었던가.

호롱불과 초가집과 오솔길로부터 형광등과 빌딩과 북적이는 시가지로, 우물에서 수돗물로, 흐르는 시냇물과 노오란 뻐꾹새 노래로부터 아아, 콰이강의 마치와 함께 하늘 높이 솟구치는 교정의 분수로 바뀐 문화적 충격, 따뜻한 이랫목의 나날과 온기로 가득한 어머니의 밥상으로부터 부처를 모시고 향을 피우던 그 방의 한기와 눈치 보며 빈 배를 채우던 외숙모의 밥상, 대전은 내게 무엇이었던가. 누이를 삼킨 대전, 쌀 판 돈으로 사 오신 책상 안 켠에 國要志學, 학문의 정진을 붓으로 당부하시던 아버지의 대전, 내게 술과 담배를 가르친 대전, 내게 그리움과 외로움을 가르친 대전, 목척교와 보문산과 식장산이 있는 대전, 식장산 가는 길에 포도밭이 있는 대전, 기적소리 슬피 우는 대전발 영시 오십분이 있는 대전, 한밭 체육관이 있는 대전, 죽은 최동수와 생과자가 있는 대전, 조외과 간호원과 박용래가 있는 대전, 빌어먹을 대전, 그것은 좌절과 열등감의 지옥이었다. 그 지옥을 벗어나는 데 40년이 걸렸다. 대학교 교장 선생님이 되어 그날 나는 짐짓 당당했다.


넷날엔 統制使가 있었다는 낡은 港口의 처녀들에겐 넷날이 가지 않은 千姬라는 이름이 많다

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굴껍지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이 千姬의 하나를 나는 어늬 오랜 客主집의 생선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저문 六月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방등이 불그레한 마당에 김냄새 나는 비가 나렸다

―백 석, 「統營」 전문


박인환은 세월을 노래하고 백 석은 시간을 말한다. 노래는 가슴으로 하고 말은 머리로 한다. 가슴은 언제나 아날로그 쪽이고 머리는 언제나 디지털 편이다. 그러므로 백 석의 통영엔 통제사의 역사가 있고, 객주집 천희의 서사가 있고 김냄새 나는 비의 과학적 현실이 있다. 당신의 통영엔 도다리쑥국으로 이름난 분소식당이 있고, 박경리 선생이 들렀던 통새미식당이 있고, 갈매기식당은 아무데도 없고, 김춘수 선생의 동호동 생가가 아무렇게나 있고, 여황산이 있고, 한려수도가 질펀하게 누워 있고.

환갑이 지난 이 나이에…!라고 당신이 말할 때 시간의 딱정벌레가 뜯어먹다 남은 머리털이며, 시간의 딱정벌레 발자국이 남긴 주름진 얼굴이며, 그날 그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침침한 눈이며,,, 그러므로 나이를 먹는다는 건 마침내 “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굴껍지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것.


한쪽 손에 죽은 바다를 들고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느끼는 것 다를 때 많아서 자주 괴롭다고 당신은 말한다. 아는 건 이성이고, 느끼는 건 감성이다. 이성은 왼쪽이고 감성은 오른쪽이다. 왼쪽은 시간이고 생업이고 현실이고, 오른쪽은 세월이고 꿈이고 당위이다. 어느 날 적막이 어느 날 적막에게 놀러 가보라. 휴가 끝난 병사처럼 어느 날 적막이 봄비 맞으며 허벅지를 드러내고 울고 있을 때 오른손이 왼손을 찾아가듯 내 몸의 집인 적막이 내 마음의 빈 집인 적막에게 놀러 가보라. 내 몸의 집에는 가득한 서류뭉치, 내 몸의 집은 얼어붙은 한겨울. 내 마음의 빈 집에는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그리움, 내 마음의 빈 집은 나이를 먹지 않는 한 떨기 외로움. 어찌할 것인가.

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있던 자리에

軍艦이 한 척 닻을 내리고 있었다.

여름에 본 물새는

죽어 있었다.

물새는 죽은 다음에도 울고 있었다.

한결 어른이 된 소리로 울고 있었다.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없는 海岸線을

한 사나이가 이리로 오고 있었다.

한쪽 손에 죽은 바다를 들고 있었다.

―김춘수, 「처용단장」 부분


죽은 바다는 세월인가, 시간인가. 죽은 바다를 들고 있는 한 사나이의 한쪽 손은 왼손인가, 오른손인가. 머리인가, 가슴인가. 아마도 죽은 바다는 세월과 시간의 저편, 아마도 바다가 없는 해안선은 서류뭉치도 없고 타는 목마름도 없는 왼쪽과 오른쪽의 소실점이리라.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느끼는 것 다를 때 많아서 자주 괴롭다고 당신은 말한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여름에 본 물새의 죽음을 십 년쯤 앞당겨 확인하는 것, 죽은 다음에도 울고 있는 물새에게 왼손과 오른손을 포개어 보는 것. 나이를 먹는다는 건 그야말로 한결 어른이 된 소리의 문설주, 그야말로 한결 어른이 된 소리의 딱정벌레 눈물을 닦아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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