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의 펜
340 사천왕문四天王門
사찰의 천왕문에 들어서면 만나게 되는 네 분이 있다. 그들 사천왕이 번뇌를 눌러주는 우리들의 수호신임을 알고 있어도, 그 앞을 지날 땐 어린아이처럼 무섭다. 어린 시절엔 왜 무서운 것이 그렇게 많은가. 스스로 자립할 자력自力과 지력智力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벌거벗은 빈 몸으로 나왔을 때, 우리는 엄마가 아니면 살 수 없는 무능력자다. 또한 이 세상의 학교에 들어갔을 때, 우리는 선생님이 아니면 아는 게 없는 무식자다. 이래저래 어린이에겐 무서운 자가 많다. 엄마도 선생님도 보호자를 자처하는 무서운 어른이다. 그 시절의 무서움증이 무의식 속에 깊이 웅크리고 있는지, 눈을 부릅뜬 어른들이나 무기를 든 남자들을 보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서움증이 찾아온다. 무서움증은 인간과 인류의, 끈질긴 유년시절의 업식業識 이다.(정효구)
▣펜으로 그림을 그리는 건 취미가 아니야. 삶이야. 언제나 잉크병과 펜과 종이가 있지. 커피는 없어도 돼. 복잡하게 그리는 게 좋아. 작은 점을 많이 찍는 게 좋아. 펜으로 색칠을 하는 게 좋아. 시간이 오래 걸려서 좋아. 오랫동안 평안할 수 있으까. 오랫동안 내가 나인 것을 잊을 수 있으니까. 오랫동안 내가 혼자인 것을 잊을 수 있으니까. 오랫동안 누가 보고 싶다는 것을 잊을 수 있으니까. 그러면서 잠시 이곳에서 사라지는 거야. 내가 무엇을 그리는 게 아니라 그려지는 무엇을 그리는 거지.(김개미)
개미의 사천왕은 개미의 펜이다.(강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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