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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약속

마당에 곡식을 늘다

by 고요의 남쪽 2016. 5. 21.

 

 

 

 

열매인 곡식들은 가을의 마당 위에서 여러 날을 뒤척이며 자신을 안팎으로 말리고 강하게 내면화시켜 간다. 마당은 그들의 뒤척임 소리와 그들의 움직임을 그들이 누워 있는 아래쪽에서 그대로 모두 듣고 느낀다. 마당은 그들과 살을 맞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당은 묵묵하고 의연하다. 이미 마당은 그 자체로 생장과 수장을 거듭하는 사계의 순환을 셀 수도 없이 반복한 고수에 속하기 때문이다. 마당의 사계 체험은 마을 앞 수백 년 묵은 당산목의 그것과 같아, 일년생 열매들의 가을앓이쯤을 보고는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괜찮다고, 아무 일 없을 것이라고, 마당은 그들의 한시적인 아픔을 지혜와 경륜이 있는 늙은 부모처럼 대수롭지 않게 보아 넘기며 그저 바라보고 때를 기다린다.

늙은 부모와 같은 마당은 수십 년에 걸쳐 마당에서 몸을 뒤척이며 가을 의식을 치른 열매와 곡식들을 해마다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열매들이 조금 힘들기는 하였지만 모두 무사히 그 앓이의 시간을 통과하고 나서, 더 단단하고 윤이 나는 얼굴로 겨울의 완숙한 씨앗이 된 것도 보았을 것이다. 그와 같은 마당의 체험과 지혜 속에서 열매들은 수장의 깊고 어두은 시간이 무엇인지를 아는 견고한 씨앗이 되었고, 그들은 겨우내 어른스럽게 기다림의 자세로 벽장 속에, 창고 속에, 땅속에 조용히 안겨 인내심속에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가을에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봄과 여름을 잘 지내왔다 하더라도 한 해 농사는 엉망이 된다.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가을은 그런 점에서 수행의 고비를 넘어가는 아슬아슬한 지점과 같다. 마당은 그런 수행을 돕기 위하여 가을의 열매들을 불러들이고 맞이하며 단련시킨다. 정신이 번쩍 드는 수행의 장소로서 가을 마당은 둘도 없이 좋은 도량이다.(정효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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