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깜한 밤에 어딘가 다녀오던 화자는 문득 썰매를 멈춥니다. 눈 내리는 고요한 숲이 너무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눈송이들은 마치 부드러운 깃털처럼 내려 쌓이고, 화자는 모든 것을 잊고 가만히 그 안에 드러누워 잠들고 싶습니다. 하지만 마을에는 가족이 있고 지켜야 할 약속이 있습니다. 화자는 다시 길을 떠납니다.
거대한 기계의 작은 톱니바퀴로 살며 늘 숨이 턱에 차서 제대로 생각할 틈도 없지만, 가끔씩 가슴 한가운데 구멍이 뻥 뚫린 허전한 느낌입니다. 분명 이건 아닌데…. 남이 안 보는 데서 실컷 울고 싶습니다. 아니, 아예 영원히 잠들어 버리면 너무나 편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귀한 생명 받고 태어남은 하나의 약속입니다. 내게 주어진 삶을 사랑하며 용기 있게 살아가리라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킬 때까지 가야 할 길이 아직도 꽤 멉니다. (장영희)
로버트 프로스트 [ Robert Frost ] (1874~1963)
로버트 프로스트는 1874년 3월 26일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뉴 잉글랜드 태생이었으며, 어머니는 스코틀랜드 여자로 에든버러에서 이주해 왔다. 어머니 이사벨 무디 프로스트는 오하이오 주 콜럼버스에서 상당한 교육을 받은 뒤 교사가 되었고, 펜실베니아 주 루이스타운 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 그 곳에서 같이 교편을 잡고 있는 윌리엄 프레스커트 프로스트와 결혼했다. 이사벨은 시 쓰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아들의 이름을 시인 로버트 번즈의 이름을 따서 로버트라고 지었으나 아버지는 남부의 탁월한 장군 로버트 E. 리의 이름을 따서 아들 이름을 짓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프로스트의 아버지는 고향인 뉴 잉글랜드에 강한 혐오감을 갖고 1872년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자 서부로 옮겨 루이스타운에서 1년간 교편을 잡다가 다시 행운을 찾아 샌프란시스코로 갔다. 로버트 리 프로스트는 11세 때까지 샌프란시스코에서 도시소년으로 자라다가 1885년 아버지가 그곳에서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 및 누이동생 지니와 함께 대륙을 횡단했다. 그러나 캘리포니아로 돌아갈 여비를 마련할 수 없어서 뉴 헴프셔에서 주 세일럼이라는 마을에 자리를 잡았다. 12세가 되기 전까지 공부를 싫어하고 책읽기를 싫어했던 그는 로렌스 고등학교에 4년간 다니면서 갑자기 공부에 굉장한 기쁨을 느끼게 되었다.
1892년 졸업생 대표이자 학급 시인으로 졸업한 후 다트마우스 대학에 들어갔으나 학문을 충분히 닦았다고 주장하면서 대학을 떠났다. 그후 몇 해 동안, 출세 같은 것에는 별로 야심이 없는 듯이 이것저것 밥벌이를 하면서 지냈다. 로렌스에 있는 공장에서 일하기도 했고, 신문 기자 노릇도 했고, 교편을 잡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한가할 때면 시작에 몰두했다. 1894년 유명한 문학지인 <뉴욕 인디펜던트>에 처음으로 "나의 나비"라는 작품을 싣게 되자, 그것을 자축하기 위해서 서정시 6편을 묶어 <황혼>이라는 제목으로 제 손으로 첫 시집을 프린트해서 냈다. 부수는 단 두 부였는데, 하나는 그의 약혼자 엘리너 화이트에게 주기 위해서 그리고 나머지 한 부는 자기 자신이 갖기 위해서였다.
1895년에 결혼한 그는 교편을 잡고 생활의 안정을 꾀하려 했다. 2년 이상을 그는 로렌스에서 사립학교를 운영하는 어머니를 도왔고, 대학에서 강의를 맡을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그 준비로 하버드 대학에 2년간 특대생으로 다녔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는 아카데믹한 분위기가 자기에게는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양계와 계란 판매를 수지 맞는 사업으로 키워볼까 하고 기도해 보기도 했다. 1900년 어떤 의사가 그의 재발한 병(주로 신경증)이 결핵일지도 모른다고 경고하자 그는 가족과 함께 뉴헴프셔 주 데리에 있는 작은 농장으로 이사하여 양계에 계속 종사했다. 무슨 일이든 잘되는 일이 없었으며, 그에게는 실패하는 재주밖에 없는 것 같았다.
1906년 겨울 그는 폐렴으로 거의 죽을 뻔하다가 다시 회복되자 그 자신도 의사도 모두 놀랐다. 이렇게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장래에 대한 전망도 완전히 없어졌다고 느끼자 그는 일종의 위안으로 혼자서 시 쓰는 데 더욱 힘쓰게 되었고 어쩌다가 한두 편이 팔리기도 했다. 그러나 시인으로든 농부로든 간에 빚을 안 지고는 살 수 없음을 인정, 다시 교편을 얻어 간 곳이 데리에 있는 핀커튼 학원이었다. 나중에 그는 플리머스에 있는 뉴헴프셔 주립 사범학교에서 심리학을 1년간 가르쳤다. 자기의 생을 거는 모험에 익숙할 만큼 자라자 1912년 그는 시에 모든 것을 걸어보기로 결심했다. 데리에 있는 농장을 판 뒤 프로스트는 아내와 네 아이를 데리고 영국으로 건너가 버킹엄셔의 비컨스필드에서 셋집을 얻어 살며 시를 썼다. 이번 도박은 성공이었다.
그의 최초의 서정시집 <소년의 의지>의 출판을 맨 처음 교섭한 출판사에서 허락했던 것이다. 그가 1914년에 발표한 극적 대화시집 <보스톤의 북쪽>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가고 있었다. 성공은 그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워낙 수줍어하고, 극도로 감수성이 예민하여, 군중 앞에 서면 마음에 고통을 느끼는 프로스트는, 사람들의 예찬과 추종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나머지 뉴 헴프셔의 프랜코니아에 작은 농장을 샀다. 그러나 경제적 이유와 자존심 때문에 그는 강연회나 시 낭독회에 나와 달라는 요구를 오랫동안 거절할 수 없었다. 영국에서 돌아온 지 2년도 채 안 되어 그는 메인 주에서 텍사스 주에 이르기까지 미국 도처에서 공중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가 아카데믹한 것에는 취미가 없다고 역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수개월 혹은 수년간 학교 안에서 사는 상주 시인이 되어 줄 것을 여러 대학과 합의한 최초의 미국 시인이 되었다.
그는 주로 메사추세츠 주의 애머스트 대학과 그런 제약을 맺었지만, 그 사이 사이에 미시건 대학, 하버드 대학 및 다트머스 대학에서도 몇 해씩 보냈다. 그렇게 여러 곳에 머무르면서 그는 그가 늘 좋아하고 바라던 농부 생활을 휴가기간 동안 맛볼 수 있었다. 1919년 그는 뉴 헴프셔를 떠나 버몬트로 가서 농장을 샀다. 아이들은 모두 자라고, 그리고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그는 버몬트 주 립튼의 고지대 농장으로 그의 법률상의 거주지를 옮겼고, 1936년부터는 의사의 지시에 따라 겨울의 몇 개월 동안을 플로리다에서 보내기 시작했다. 1940년 플로리다 주의 코럴 케이블 시외에 2천 평의 농토를 사서 농장에 전형적인 방갈로를 세웠다. 땅과 자라나는 것들에 대한 그의 정감은 그러한 삶이 필요치 않게 된 훨씬 후에도 그에게 뜨겁게 남게 되었다.
40세 이후부터 프로스트는 미국 현대 문학의 대표적인 인물로 추앙되었다. 그는 1916년 이후 30년동안 <뉴우햄프셔>, <서쪽으로 흐르는 시내>등 10여권의 시집을 출판하였으며 퓰리처상을 네번이나 수상했다. 그는 1916년 미국 국립 예술원 회원에 선출되었고, 1930년에는 미국 한림원 회원에 선출되었으며, 그의 75세 생일 및 85세 생일에 미국 상원은 그에게 축사를 보내기로 정식 가결하였다. 그는 대학의 가장 낮은 학위조차 얻기를 거부했지만 40개 이상의 대학 및 대학교에서 명예 학위를 받았으며,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에서 명예 학위를 받고자 1957년 봄 영국에 건너갔을 때, 그의 생의 궤적은 한 단계의 완결을 보았던 것이다.
그는 1962년 마지막 시집 <숲속의 빈터에서>를 내놓고 이듬해인 1963년 1월 29일 세상을 떠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