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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응접실

박상순의 신작시

by 고요의 남쪽 2010. 12. 29.

 

박상순 시

(시집으로 출간되지 않은 발표 원고- 초고이므로 발표하면서 부분적인 고정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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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신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그녀의 이름은 묘오신

또는 묘신.

 

그런 말을 지어놓고

그 말에 어울리는 점심을 먹는다.

 

묘신

그 말에 어울리는 식당에서

그 말에 어울리는 자세로

 

그 말에 어울리는 표정으로

밥을 먹는다.

 

묘신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그녀의 이름은 묘오신

또는 묘시인.

 

그 말에 어울리는 그녀를 위해

묘신을 위해

밥을 먹는다. 빈 물잔을 앞에 두고

그런 말에 어울리는 가장 처참한 기억으로

밥을 먹는다.

 

묘신, 혹은 묘오신.

그 말에 어울리는 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나는 너로 변신한다.

 

밤이여, 묘신 같은 밤이여 가까이 오라

내가 너의 얼굴에

묘신,

그 말의 뜻을 새겨 넣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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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소원은 죽은 토끼

 

 

 

내 소원은 죽은 토끼, 죽은 토끼는 녹슨 총, 녹슨 총은 편지지, 편지지는 꽃무늬, 꽃무늬는 손톱, 손톱은 두 번째 죽은 토끼, 두 번째 죽은 토끼는 두 번째 녹슨 탱크, 녹슨 탱크는 나비, 누군가의 가슴에 앉은 두 마리 나비. 나비는 가로등, 가로등은 눈 덮인 산, 산은 술잔 속에 빠진 별, 별은 주유소, 주유소는 나의 고독, 고독은 네가 준 보석, 보석은 수없이 부서지는 나, 나는 끝없이 불어나는 너, 너는 내 소원. 내 소원은 죽은 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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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벽 속에 있다

 

 

 

문제다. 음악은 벽 속에 있다.

(용서하고 싶지만

달린다

멈춘다

피아노 소리가 들린다

능숙하지 못하다

그래도 몇 절은 아름답다

내가 여전히 우울하고

내가 여전히 고독하고

내가 아직도 꿈꾸기 때문이다)

 

다시 달린다

가구점

봄이었다

책상과 의자를 샀다

한 사람은 책상을 등에 지고

또 한 사람은 의자를 메고

우리들의 새 집을 향해 걸었다

나는 맨 뒤에서

빈손으로 걸었다

짦은 거리의 버스 정류장 두 개를 지나

새집으로 들어서는 골목

책상과 의자를 내려놓고

셋이 웃었다

 

그중 하나는 지옥으로 떨어졌다

다른 하나는 한 인간을 여러 인간에게

나누어 판 돈으로

내게 맥주를 샀다

조금씩만 마셨다

그날은 여러 인간들의 축제

 

우리는 먼 이국에서 온 부부에게 물었다

오늘 밤 이 축제에 대해 한 마름 해보라고

말없아 달아났다

쫓지 않았다

불빛은 밝고, 별빛도 밝고

빛이니까 밝고, 그럴싸한 분위기로

그저 그렇게 밝고

우린 천천히 걸었다

 

자비와 용서가 넘쳐 나는 평화로운 밤거리

우울과 몽상과 질주의 거리

그중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은 우리는

일부러, 할 일 없음의 이름으로 뒷골목을 돌고 돌아

새집으로 돌아왔다

이미 우리에겐 헌집인데 새들이 날아다닌다

한 마리 잡아먹을까

귀찮은데 한 마리만 먹을까

나는 책상 위에 앉아있었고 그는

의자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그가 한 마리를 잡았다

책상은 책상이고 의자는 의자

그래서 책상은 가만히 잇고 의자가 움직여야 한다

 

그래도 난 계속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욕실로 들어갔다

그가 몇 마리 새를 다 먹어 치울 동안

세수를 두 번하고

손을 씻고, 수도꼭지도 씻고 거울도 닦았다

그가 다 먹고 뻗었을 때

나는 욕실에서 나와 죽은 새들의 대가리를

구석으로 걷어찼다

날개도 깃털도 쓸어 냈다

죽은 새의 깃털에서 소나무 냄새가 나고

휘발유 냄새가 나고

죽은 새의 대가리에서 속삭이던 봄

춤추던 여름, 샛노란 은행잎이 쌓이던 가을

별빛이 흐르던 우주의 겨울밤

천국과 지옥이 갑자기 미쳐서 날뛰던 순간

…………

 

안녕하세요. 처음으로 편지를 씁니다.

이십년 전에 두 번째 만났을 때

함께 있었던 아이들과

저는 이제 하늘 나라로 갑니다.

아이들은 벌써 제 키만큼 자라서

나무도 되고

토끼도 되고 오리도 되고

밤이면 산책도 나갑니다.

저 때문에 평생 괴로웠을 줄 압니다

다행히 저는 괴롭지 않았습니다.

이제 아이들이 다 자라서

떠날 시간입니다.

하늘 나라로 돌아갑니다

올 겨울쯤 닿을 것 같습니다

올 때보다는 짧은 길입니다

아직도 겨울 나라에 있는지

여름뿐인 나라에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올 겨울쯤 제 아이들이 하늘에 닿으면

나무도 없고, 토끼도 없고

저도 이 세상엔 없으니

평생의 괴로움 덜어낼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이렇게 가벼워져 떠나가는데

앞날의 일이 무겁기만 합니다

 

…………

가볍게 내 발길질에 차였다

죽은 새의 봄, 여름, 가을, (겨울 하늘의 정거장)

뻗었던 그는 금새 일어났다

그는 무거운 책상을 지고 두 정류장을 건너온

바로 그였다

나는 여전히 빈손

그가 손등으로 피 묻은 입을 닦으며 웃었다

지옥으로 떨어졌던 그놈도 함께 웃겠지

나는 맨발

 

문제다. 이렇게 깊은 곳까지 구멍을 뜷어도

벽 속에 음악이 있다

(그래서 떠 달린다. 그가 웃다가 죽어도, 죽다가 웃어도

하늘에서도 달린다. 멈춘다. 죽음의 소리가 고독하고

웃음의 소리가 우울하고, 내가 꿈을 꾸는 소리가

달린다. 난다)

세처럼, 유령처럼, 별빛이 흐르는 밤의 우주를 안고

죽은 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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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한 슬픔이 있었다

 

 

거기 한 슬픔이 있었다

어둠이 내렸고. 언덕 아래로 마지막 사람의 그림자가 흘러가고.

땅속에 누웠던 또 다른 어둠이 서서히, 아주 서서히 일어나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을 삼켜 버렸다

하나, , . 그날 내가 소유한 모든 것들의 목록.

하나. 그것은 내가 열세명의 암사자들과 여섯 마리의 고양이 새끼들과

온통 새하얀 운동화가 깔려있던 텅 빈 집

그녀들은 모두 아름다웠고 대초원의 한낮 커다란 나무그늘 아래

비스듬히 누워 잠든 암사자들처럼 고요했다.

어쩌다 눈을 뜨면 그녀들의 몸에서 복숭아 향기가 흘러나왔지만

곧바로 그녀들의 길었던 또는 짧았던 치마들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고양이 새끼들은, 새끼 고양이들은 아직 너무 어려서 상자 안에 있었다

어미는 내가 죽였다. 잿빛 쥐약을 이용했다.

다음날 사라졌으나 죽었을 것이다. 틀림없이 그래야만 했었다.

복숭아 향기였고 암사자였었고 새끼고양이들은 내 발가락사이로

코들 들이밀면서 쥐약 냄새를 맡았다. 운동화는 쓸모가 없었다.

단 한번도 나는 운동화를 신지 않았고 앞으로도 결코 죽을 때까지도

운동화는 신지 않는다. 대초원의 암사자들이 새하얀 운동화를 베고 누우면

내게 초원은 백색 가루였고 그녀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복숭아 향기였지만, 나는 과일은 먹지 않는다. 죽어도. 죽어서도

텅 빈 집이었다고, 그것만을 기억할 것이다.

그래야만 하는 첫번째. 그러한 하나가 내게 있었다

 

. 의지해야 한다. 끊임없이 얼굴을 파묻고 의지해야만 한다.

여섯 시간 반 동안 버스를 타고 있었다. 여전히 버스는 움직이고 있었다

느리게, 너무 느리게 정말 느리게. 내릴 수도 없었다. 어차피 가야 한다

다른 길도 같겠지 앞차도 뒤차도 느리게, 느리게, 돌이 되도록 느리게

큰 바위가 되어도 돌덩이가 되어도 철판이 된다 할지라도

의지해야 한다. 얼굴을 파묻고 의지해야 한다.

마침내 손을 썼다. 앉은 자세를 더 낮춰 얼굴을 가리고 오른 손을 뻗었다.

암사자들은 자리를 떴다. 가끔씩 대초원에 바람소리가

짐승의 소리가 들리는듯하지만

군데군데 흩어져 앉은 놈들도 잠이 들었다

내 손은 이미 백색 가루가 담긴 자루 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손가락을 깊이 묻는다. 개울물에 잠기듯 손이 잠긴다.

부드러운 백색의 가루. 물결처럼. 개울처럼,

태어나서 처음 느껴본 호수처럼 백색의 가루 속으로 들어간다.

물고기들이 달아난다. 달아나는 물고기들이 손등을 스친다.

가슴이 뛴다. 의지할 수 있을까. 문이 열린다.

바다가 보이는 도시에 닿는다. 보이는 건 어둠.

자루를 멘 나는 하룻밤 묵을 곳을 찾는다. 오늘 밤 의지할 수 있을까

얼굴을 파묻고. 이 백색의 가루 속에 얼굴을 파묻어버리면

내 목덜미에서 다시 새 얼굴이 솟아날 수 있을까. 묻을 수 있을까.

다 파묻어버릴 수 있을까. 그래도 의지해야 한다. 끊임없이

얼굴을 파묻고 의지해야만 하는 두번째.

 

. 새끼 고양이들은 자라서 기린이나 코끼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놈들은 다시 보지는 못했다. 기린이 되었다면 아주 빠른,

코끼리가 되었다면 아주 순한, 그런 놈들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자루를 도둑맞았고 새 자루를 하나 마련하긴 했지만

서너 자루의 펜과 휴대용 티슈 오래된 영수증 한 두 장이

들어 있을 뿐이다. 도둑맞은 자루 대신이라고 생각하는

공짜로 생긴 가방 하나. 빈 가방 하나. 호수도 없고 물고기도 없고

대초원도, 운동화도 암사자도 없다. 기린이나 코끼리들이

벌써부터 나를 피해 달아났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놈들이 나를 본들 무슨 관심있으랴. 이미 내 손엔 자루도 없고

머리 속에서 온갖 것을 다 끄집어내 옛 기억을 떠들어본들

이놈들은 이미 코끼리나 기린이 되었고

죽어도 나는 텅 빈 집이었다는 기억만을 말해야 한다

그래서 여기까지 왔다. 내 자루를 훔쳐간 그놈인지 그년인지

를 찾아내 사지를 잘라내고도 싶은 생각이 들어야만 하는데

그냥 다른 길로 들어서 여기까지만 왔다

아무튼 여기까지 왔는데, 떨어진다.

내 몸에서 흰 가루가 떨어진다. 몇 개는 커다란 꽃잎처럼

.

얼굴에서 떨어지고, 바람도 없는데 흰 가루가 날린다.

안개처럼, 안개 속 풍경처럼,

안개에 젖은 흐릿한 풍경 속의 불빛처럼, 불빛 아래 그림자처럼

흰 가루가 날린다. 내 하얀 가루. 내 초원, 내 사막,

초원, 사막, 사막, 초원, 백색의 가루

 

그것들을 모두 사로잡아버렸다. 어둠이 내렸고

땅 속에서도 어둠이 올라왔고, 그 옛날 처음 본 순간의

언젠가, 언제던가 내 최초의 두려움과 떨림에 어둠을 불러

드디어 내가, 거대한 시간, 거대한 암흑이 되어

두려움과 떨림이 다 사라져버린

거기에 한 슬픔이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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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두 개의 화분

죽어가는 화분

꽃 피는 화분

 

가운데 놓여있는 나는

아무것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첫 날의 화분

누구도, 그 누구도 보이지 않는

마지막 날의 화분

 

, 여름, 가을, 겨울 꿈을 꾸다가

나는 늘 가운데 놓여있는

 

꽃피지 않는 화분

죽지도 않는 화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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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은 내 웃음을 모방한다

 

 

세상의 모든 집은 내 증오를 모방한다. 지붕을 덮고 문을 걸어 잠근다. 밤의 거리는 내 눈동자를 모방한다. 검은 호수에 누워있을지라도 가라앉지 않는다.

 

소리는 내 손가락을 모방한다. 갈라지고 흩어진다. 허공을 움켜쥔다. 우울은 내 목소리를 모방한다. 너를 향해 울린다.

 

그리하여 너는 내 우울을 모방한다. 동그랗게, 동그랗게 통통해 진다. 하늘은 꿈틀거린다. 내 발가락을 모방한다. 땅은 비에 젖는다. 내 바지를 모방한다.

 

나를 모방한다. 떠나는 나를 모방한다. 망설이는 나를 모방한다. 자연은 내 꿈을 모방한다. 나와 함께 흘러가려 한다. 흘러가는 나를 발명하려 한다.

 

현실은 내 웃음을 모방한다. 사람들의 얼굴을 봄빛으로 지워버린다. 세상의 모든 것이 나를 모방한다. 길을 막는다. 나를 잊으려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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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별, 네가 나를 영원히 사랑한다 해도

 

 

 

나는 약해

금세 기절하고 말거야

 

약하다니까

 

처음 본 순간

별이 달에게 겁을 준다

 

그래도 달은

커졌다가 작아졌다가

바닷물을 끌고 와

 

해변을 덮어버린다

 

나는 약해

금세 기절하고 말거야

다 잠기고 말거야

 

약하다니까

 

그래도 달은

커졌다가 작아졌다가

어둔 하늘을 끌고 와

 

별을 덮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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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552

 

 

꽃집에 갔습니다.

오랜만에 갔더니

꽃집이 없습니다.

 

그래도 문을 열고 들어갑니다.

노래가 나옵니다.

이 세상은 끝났다고 합니다.

 

은은하게 가라앉아 감미롭게 들립니다.

이 세상을 끝내라고 합니다.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뒤를 돌아봅니다.

주인도 점원도 다른 일만 합니다.

나 역시 고개를 돌립니다.

 

꽃을 찾아봅니다.

노래가 나옵니다.

꽃집이 아닙니다.

 

그래도 꽃을 찾아봅니다.

네 세상은 끝났다고

노래가 나옵니다.

네 세상은 누군가가 다 쓰고 버렸다고

네 세상은 처음부터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은은하게, 감미롭게 들립니다.

꽃을 찾아 갔습니다.

꽃집이 없습니다.

이젠 노래도 끝났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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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네가

 

 

 

나는 네가 시냇물을 보면서 화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시냇물이 흐르다가 여기까지 넘쳐와도 화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목련 나무 앞에서 웃지 않았으면 좋겠다

흰 목련 꽃잎들이 우르르 떨어져도 웃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밤 고양이를 만나도 겁먹지 않았으면 좋겠다

밤 고양이가 네 발목을 물어도 그냥 그대로 서 있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꿈꾸지 않았으면 좋겠다. 창 밖의 봄볕 때문에

잠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꿈속에서 영롱한 바닷속을

헤엄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인공 딸기향이 가득 든 고무 지우개면 좋겠다.

인공 딸기향을 넣은 딱딱한 고무로 만든

그런 치마만 삼백육십육일 입었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오래도록 우울하면 좋겠다

아무도 치료할 수 없었으면 좋겠다.

그래도 나는 네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는 네가 아무것도 아니었으면 좋겠다.

이 세상에도 없었으면 좋겠다. 그대신 너를 닮은

물렁물렁한 시냇물,우르르 떨어지는 큰 꽃잎들,

달빛 아래 늘어진 길고 긴 밤 고양이의 그림자,

꿈 속의 바다. 그리고 고무지우개.

그런 것만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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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속삭이면 무지개가 됩니다. .

또 한 번 속삭이면 골목길이 됩니다. .

그래서 자꾸 속삭이면 구슬처럼 구릅니다. .

 

홀로 속삭이면 자꾸 구릅니다. .

구르고 굴러서 저 혼자 떠납니다. .

 

내가 여기까지 왔을 때.

내가 이만큼 왔을 때.

내가 아직 여기 남아있는데도. .

 

저 혼자 떠납니다.

나를 여기 남기고 떠나기만 합니다. .

 

끝내 내 곁에는 별이 하나 없어도. .

저 하늘을 유영하는,

들개, 까마귀, 늑대, 사이공, 병따개, 레바논, 유키.

 

몰락한 내 사랑을 완성하기 위하여. .

혼자 속삭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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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루

 

 

 

 

내 앞으로 온 우편물 자루. 지금은 열지 않는다

불룩한 자루. 먼 곳에서 비행기를 타고 온 자루

내 작은 목소리에 허리를 굽히고

가까이서 들어줄

그런 친절한 외국 아가씨가 보내준

자루가 아닌 자루

 

11시가 지나면 연다. 불룩하지만 가벼운

단단히 목을 묶어 주둥이를 틀어쥔

검은 끈의 자루

12가 넘으면 연다. 점심 지나서

오후에 열어보면 된다

내 앞으로 온, 나만의 자루

 

내가 자루를 열 때, 내 곁에서

뭐야?, 뭐지?

관심을 보여줄 그런 아가씨가 있어도

모른 척 할만한

투박한, 불룩한 자루

 

3시가 지나서 자루를 연다

비행기를 타고

추운 나라와 따뜻한 나라

비 오고 안개 끼는 나라를 넘어

기어이 내 앞으로 배달된 자루

 

열다가 만다

조금 더, 조금만 더, 조금 더

있다가 연다

 

 

동쪽에서 온, 내 앞으로 온

그곳에서 가장 친절한 아가씨가 내게 보낸

자루가 아닌

그곳에서 제일 나쁜 여인들이, 짐승들이

함께 모여, 하나로 묶어 보낸 것 같은

그런 자루, 불룩한 자루

 

정확히 내 앞으로 배달된

고통스런 상황의 자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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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생일 축하 안내인

 

 

 

 

그녀의 직업은 안내원입니다. 매일 안내 합니다.

오늘 생일이신 분들이 벌써 열한 분.

그녀를 만나러왔습니다.

 

물론 접수부터 해야 합니다. 지원자가 많습니다.

여기서는 만원입니다.

하루에 꼭, 열한 명만 처리합니다.

 

처음엔 여덟 명만 했는데, 지금은 늘었습니다.

그녀는 피곤하지만 내색하지는 않습니다.

쓱쓱 처리합니다.

 

1. 줄을 섭니다.

2. 카드를 받아 담당 안내인의 이름을 적습니다.

3. 노래를 부릅니다. 오늘의 노래.

4. 안내인을 따라서 박물관에 갑니다.

5. 한 가지만 봅니다.

6. 먼 옛날 그들이 태어나던 오늘의 달력.

6. 눈물이 납니다. 기뻐서 눈물이 납니다.

7. 그녀도 눈물을 흘립니다.

7. 박물관 1층에서 황금빛 엘리베이터를 탑니다.

8. 다음 층에서 안내원은 내립니다.

8. 안내원의 확인을 받은 생일 카드를 품에 안고

8. 위층으로 향합니다.

9. 계속 올라갑니다. 금빛 찬란한 팡파레가 울립니다.

9. 엘리베이터는 갑니다.

9. 끝없이 올라갑니다. 가도 가도 계속

9. 갑니다.

 

그렇게 그녀의 직업은 안내원입니다.

오늘도 생일이신 분들이 벌써 열한 분.

그녀를 만나러왔습니다.

 

물론 태어나는 일부터 해야 합니다.

평생에 딱 한 번만 축하할 수 있습니다.

하루 해가 무~지하게 깁니다. 한 달도 무~지하게

깁니다.

 

다 늙어서야 꼭 한 번 그녀를 만납니다.

그리고 계속 올라갑니다. 끝없이 올라갑니다.

그래서 꼭 한 번 그녀를 만나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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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이 어부에게 말했다

 

 

 

내 영혼이

내 어부에게 말했다

 

물고기

바다

저녁놀

 

내 영혼이 내 어부에게 말했다

 

처음

순간

 

내 영혼이 내 어부에게 말했다

 

없어

이럴 수는,

이럴 수는 없어

 

늙은 내 영혼이 더 늙은 내 어부에게 말했다

 

그냥 가

 

내 영혼이 내 어부의 그물에 매달리며 말했다

 

노을 진

바닷가에

나를 남기고

 

두 개의 영혼

어린 내 영혼이 한참이나 더 어린 내 어부에게

매달리며 말했다

 

그냥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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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직 드래곤

 

 

눈 내린 뒤. 저녁. 그와 간다.

눈 내린 뒤. 저녁. 그와 함께 간다.

그는 내가 있어 다행이다. 나도 그가 있어

다행이다.

 

눈 내린 뒤. 저녁. 매직 드래곤

눈 내린 뒤. 저녁. 바닷가에 살고

그는 내가 있어 외롭지 않다. 나도

그가 함께 있어 외롭지 않다.

 

그가 사라진 뒤. 10. 나만 간다

그가 간 뒤. 10. 나는 같은 길을 간다

그는 내가 없어 다행. 나도 그가

이젠 여기 없어 다행.

 

눈 내린 뒤. 저녁. 그의 여동생이

신혼여행을 떠난 다음날. 그의 여동생이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면

영영 우리를 찾지 못하게 될

 

눈 내린 뒤. 그날 저녁. 매직 드래곤

바닷가에 살고. 그가 있어 우린 외롭지 않고

내가 있어 그도 외롭지 않던

눈 내린 뒤. 저녁.

 

매직 드래곤. 그와 함께 사라진 뒤. 10.

매직 드래곤. 바닷가에 살지 않고

여동생도 살지 않고

바닷가에 살지 않고

 

나는 간다. 눈 내린 뒤. 저녁

봄이 와도 영영. 눈 내린 뒤. 저녁

가도 가도 영영. 눈 내린 뒤. 저녁.

하늘은 바로 보라 말하고, 땅은 서있으라 말하고

계절은 숨을 쉬라 하지만

 

다행히 나는 간다. 바닷가에. 매직 드래곤.

누구 하나 없어도. 매직 드래곤.

고독한 나에게 상처받은, 두려운

내가 간다, 바닷가에. 눈 내린 뒤.

내가 간다. 오오. 매직 드래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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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 세탁소의 복숭아

 

 

동물원에 가기 전에 세탁소를 거칩니다.

문은 늘 닫혀있고

코끼리 손님은 나 하나뿐이지만

세탁소 안으로는 들어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꼭 세탁소를 거쳐서

동물원에 갑니다.

내가 맡긴 코끼리,

동물원에 내가 맡긴 코끼리,

'복숭아'를 만나러 가기 전에

 

나는 꼭 세탁소에 갑니다.

긴 상아는 아직 부러지지 않았고

긴 코에도 아직은 얼룩하나 없으며

굵은 다리와 큰 몸집도

무너지지 않았지만

 

코끼리 세탁소를 지나서

동물원에 갑니다.

오늘도 세탁소 코끼리의 문은 닫혀 있고

사람들은 동물원에서

기린이 되고, 물개가 되고

코뿔소가 되고

 

동물들은 동물원에서

풍선이 되고, 나무가 되고

수학 학원이 되고, 딸기가 되고

 

나는 그저 복숭아를 만나러 갑니다.

세탁소를 지나서 동물원에 갑니다.

내가 맡긴 코끼리

엉덩이가 커다란, 눈이 아주 커다란

코끼리

'복숭아'를 만나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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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들어왔다.

미지근한 바람의 반대편에서

통닭처럼, 메추리알처럼,

지구에서 가장 큰 망치처럼,

심장에 새 술을 넣은 인조인간처럼,

 

네가 들어왔다

 

수직선 세 개를 헤아리는 사이

대지에 꽂힌 유성의 불빛,

땅에서 솟아나는 물렁물렁한 기둥,

사라진 세 번째와 네 번째 수직선 사이로

 

검은 숯 한 자루를 강물에 씻고 씻어

하얗게 변한

나의 미래를 들고 네가

들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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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의 기회가 지나가고

두 번이 남았지만

세 번째가 끝입니다.

 

아가씨!

당신의 고양이가

당신 뒤에 있네요.

 

다가올 기회가 두 번 남았지만

세 번째가 끝입니다.

뒤 돌아보면, , 돌아보면

 

아가씨!

당신의 고양이가

당신 뒤에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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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센소

 

 

 

 

 

무의미를 뜻하는 말입니다. 나는 이 말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NOnSEnso 이렇게 생겼습니다. 붉은 껍질을 가졌습니다. 껍질을 열어보겠습니다. 물렁물렁합니다. 양쪽으로 갈라집니다. 껍질의 안쪽은 검붉은 색입니다. 껍질을 가르니 더 안쪽이 보입니다. 아주 엷은 붉은색입니다. 껍질을 다 벗겨내지 않고 책상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Non SEnso. 이렇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냥 껍질이 갈라진 논센소입니다. 낮에는 보지 않기로 했습니다. 보지 않아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밤에만 봅니다. 보지 않아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밤에만 봅니다. 무의미를 뜻하는 말입니다. 나는 이 말을 책상 위에 만들어 놓았습니다. 내가 처음 만든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내가 처음 만들어낸 말처럼 들여다봅니다. 크게 보일 때도 있지만 그리 크지는 않습니다. 껍질을 갈라보았지만 더 깊은 속을 보려고 한 적은 없습니다. 그냥 논센소입니다.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습니다. 논센소도 나를 알아보지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매일 달라지고 매일매일 다르게 보입니다. 그래서 걱정입니다. 매일 밤마다 들여다 보아야만합니다. 영원히 변치 않을 나만의 논센소이기를 바라지만, 매일 변합니다. 그래도 꼭 NOnSEnso 이렇게 생겼습니다. 나의 논센소. 하늘이 내게 또 한 번의 여름을 살고, 사랑하고, 증오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침묵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습니다. 나의 논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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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을 주문한다. 한 상자. 밀봉된 흙덩이가

상자에 담겨 트럭에 실린다.

다리를 건넌다, 비 내리는 거리를 달린다.

창가에 항아리가 갈라지며 웃는다.

웃으면서, 뭐라고, 뭐라고, 이야기 한다.

웃는 병에 걸린 이야기.

이야기 병에 걸린 웃음.

갈라진 항아리가 웃는 동안, 한 상자.

웃는 병에 걸린 이야기를 웃음소리로 이야기 하는 동안, 한 상자.

주문한 흙이, 새들이 훑고 간 웃음 사이로 온다.

이야기 병에 걸린 비의 허리를 자르며 온다.

한 상자. 흙이 온다. 무릎을 꿇고

두 팔로 몸을 짚은, 가슴이 두 쪽으로 갈라진 내가

이렇게, 너를 바라보는 동안 흙이 온다.

너에게 뿌릴 한 상자의 흙이 온다.

이제 너를 덮을 흙이 내게로 온다.

손가락이 아프다. 왼쪽 끝.

손가락 끝이 아프다. 한 쪽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