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10
레이디 가가의 노래 ‘Bad romance’ 뮤직비디오를 보면 가수의 화려한 패션과 퍼포먼스도 볼 만 하지만 역시 흥겨운 노랫가락이 일품이다. 왠지 가요보다는 팝송에 끌린다. 이유는 뭘까. 나는 팝송에 대한 전문가도 아니다. 말 그대로 ‘Popular’한 노래에 끌리는 지극히 대중적인 취향이다. 한 해에도 수많은 노래가 쏟아져 나온다. 다양한 나라에서 다양한 장르의 노래가 생산된다. 그 중에서도 팝송은 주로 미국이나 영국의 대중가요를 지칭한다. 미국 팝송을 많이 듣는 건 아무래도 접하기 쉬워서 그럴 터이고, 그 외 나라의 팝송 역시 즐겨 듣는 편이다. 팝송은 흥겹다. 흥겹지 않은 풍의 팝송도 있고, 록과 같은 시끄러운 노래도 있다. 그것들도 귀에 듣기 좋으면 자주 듣는다. 장르에 구애받지 않는 나는 매끄러운 멜로디와 귀에 착 달라붙는 리듬을 선사하는 팝송을 선호한다. 져스틴 비버의 ‘Baby’는 전미를 강타한 노래다. 십대 소년의 깜찍한 노래 솜씨와 리듬에 기분이 환해진다. 팝송은 시 쓰는 일 외에 별 다른 흥미를 갖지 않고 있는 내게 몇 안 되는 취미 중의 하나다. 영화도 좋아하고 클래식도 싫지 않다. 그러나 팝송만큼 즉흥적인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도 없다. 그렇다. 아마도 이 즉흥성이 팝송을 좋아하게 된 첫째 이유일지 모른다. 겨우 3분 남짓한 팝송의 서사와 음률의 서정은 시와 닮았다. 짧은 길이에서 오는 강렬한 충격과 폭발성이 시와 닮았다. 가사는 제대로 못 알아들어도 상관없다. 요즘의 우리 대중가요 역시 자막이 아니고서는 가사를 알아들을 수 없는 건 마찬가지다. 라디오나 텔레비전을 통해 들을 수 있는 노래가 그렇게 다양하지 않았던 시절, 우리 가요의 가사에 약간의 실망을 느꼈고, 또 그런 노래로 일색인 우리 가요에 그다지 매력을 느낄 수 없는 건 개인적인 취향이기도 하겠지만, 다양성이 무시된 채 경제논리에만 급급한 가요계가 반성해야 할 중요한 대목이기도 하다. 아무튼 올해도 여전히 팝송이 좋다.
2. 2007
케이티 페리의 ‘I kissed a girl’로 흥겨웠던 해다. 여자 가수가 부른 노래 제목이 여자와 키스했다는 뭔가 색다른 호기심을 자극하는 노래기도 하지만, 가사 내용이야 아무래도 상관없다. 팝송에 민감한 내 귀에 우연히 들려온 이 노래는 곧바로 추천 대상이 되었다. 정갈한 박자와 호소력 있는 약간 허스키한 목소리. 삶은 그렇게 녹녹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고, 누구도 시키지 않지만 그래도 해야만 할 일을 해야 했고, 미래는 가시적이지도 않았으며, 가끔씩은 절망적인 결과만 맛봐야 했다. 답답한 터널을 지나가고 있는 중에 잠깐씩이나마 긴장을 늦추고, 그것도 너무 오래 침잠해 있거나 쉬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늘 자리 잡고 있는 가운데에서 듣는 팝송은 짧지만 강한 위안이 되어 주었다. 팝송이 열어주는 길은 직선으로만 달려가는 종단의 삶과는 다른 횡적 방향의 세계로 향해 있다. 팝송을 듣다보면 차분함과 여유, 그리고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나 자신을 포함해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고 적셔줄 시를 쓰고 싶다는 강한 욕망이 생성된다. 팝송과 시와 밤하늘과 별과 바람과 가로등 불빛과, 세상의 온갖 기호가 뒤죽박죽되었다간 일정한 배열이 되어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그 무엇으로 다가온다. 귀는 노래에, 눈은 세상에, 정신은 시에 두고 직선의 시간이 아닌 바다처럼 고여 있는 심연의 시간으로 빠져든다. 테이크 댓의 ‘Patience’가 영혼을 파고든다.
3. 2000
Westlife, Bic Runga 얼핏 떠오르는 2000년대의 팝 그룹이자 가수이다. 물론 이들만의 노래만 들은 것은 아니다. 또 2000년을 전후하여 새로 나타난 팝송만 들은 것도 아니다. 내가 팝송을 알기 시작하면서 꾸준히 명곡이라 여기고 모아온 팝송은 시간 날 때면 듣곤 했다. 이 시절, 암흑기였다. I.M.F라는 거대한 공포와 절망의 여파가 여전히 이어져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할 수 없는, 그리고 생계와 직결되는 순간순간이 전국적으로 이어지던 때였고 나 역시 그러한 상황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해 겨울 두 번째 시집이 나왔고, 어느 쓸쓸한, 그리고 씁쓸한 저녁 지하 주차장 차 안에서 들었던 내가 늘 즐겨 듣던 팝송, 그래서 조금은 아늑해지고, 위로받고, 차분해졌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스팅, 그가 속했던 폴리스, 나잇 레인져, 홀 앤 오츠, 사이먼 앤 가펑클, 너바나, 토토, 엘튼 존, 보스턴, 퀸, 시카고, 해리 닐슨, 유 투(특히 With or without you를 들어보라) 등등 나에게 다가와 내 안에 오래 머물고 있는 팝송 가수들의 이름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다만 그들의 노래를 한 두곡만 좋아하고, 그것도 지나간 올드 팝송이라 하더라도, 늘 들어도 새로운 감흥을 전해주는 고마운 사람들이 아닐 수 없다. 말하자면 팝송의 연대기는 내 감정의 골에 새겨진 지울 수 없는 역사적 흔적이다. 그것은 레코드의 라인처럼 내 추억과 마음의 한 구석에 잠재되어 있다 언제든 재생되는 그런 반가운 존재이다. 2001년 개봉된 영화 ‘Vanilla Sky’는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감독의 ‘Open Your Eyes’를 리메이크한 영화다. 주인공인 톰 크루즈 외에도 영화에는 페넬로페 크루즈, 카메론 디아즈, 커트 러셀 등 당대의 최고 배우들이 출연한다. 내용도 만만치 않은 전언을 숨기고 있는 영화이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에 나오는 팝송은 영화의 독특한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켜 주고 관객으로 하여금 신비로운 감정을 느끼게 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영화의 음악에는 많은 아티스트들이 공들여 참여했는데, 내가 관심을 가진 노래는 정작 새로 만든 것도 아니고 OST에도 실려 있지 않은 1960년대에 유행했던 비치 보이스의 ‘Good Vibrations’이었다. 영화 내내 이 노래가 흘러나왔다고 착각할 정도로 매력 있는 이 팝송은 노래로만 듣기보다 영화를 보며 들었을 때 그 진정한 가치가 발휘된다. 인터넷을 뒤져 간신히 이 노래를 찾아냈고, 이 시절 거의 한 달 넘게 이 팝송만 들었다. 그리고 시를 썼다. ‘Good Vibrations’의 가사나 영화 내용과는 전혀 관계없는 시였다. 그러나 이 팝송이 전해준 감상적 분위기, 그리고 고양된 감정, 횡으로 뻗어나가는 또 다른 세계와의 접촉이 시에 영향을 미치고, 그로써 시가 씌어졌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내게 있어 시와 팝송과의 관계는 분리할 수 없는 융해 상태라고 할 수 있다.
4. 1990
수잔 베가, 마돈나, 자넷 잭슨, 엠씨 해머 등등은 이때에 가장 유행했던 팝송 가수고, 이들의 노래 역시 여전히 듣고 있는 노래들이다. 팝송에 있어서 나는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전문가로서 나설 생각이 없기에 장르를 일일이 열거하진 못하지만, 어떤가, 듣기만 좋으면 되지. 복학한 후 시를 본격적으로 접하고, 졸업하고, 이후 등단하고 첫 시집을 낸 것이 1990년대에 내게 생긴 일이다. 한창 팝송을 즐겨 듣던 1980년대보다는 점차 팝송에 대해 소원해지던 때이기도 했다. 새로이 등장하는 가수, 시시각각 유행하는 노래에 대한 정보 수집이 뜸해졌고, 드문드문 팝송을 들었다. 뭐든 그렇다. 혈기왕성한 시절, 한 때의 열기가 지나가면 이제 관심사는 생활로 기울어지고, 해결하기 급급한 현안에 매몰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술은 더더욱 젊은 날의 열정을 이어가기 힘든 것이다. 시 역시 학창 시절의 수많은 문청이 졸업하면 언제 그랬냐 싶게 쓰기를 멈추는 것을 보면, 그것을 시종일관 밀고 나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 수 있다. 팝송이 내게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팝송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면면히 이어졌다. 다만 그 양이 많지 않았고 절실하지 않았던 것만은 분명하다.
5. 1980
한 동네에 사는 친구의 형으로부터 처음 팝송을 듣게 되었다. 마이클 잭슨의 노래들이었다. 이후 친구들과 다니면서 팝송에 관한 정보를 주고받고, 서로 감상하고 느낌을 나누었다. 누가 먼저 좋은 팝송을 알아내는가 하는 은근한 경쟁이 붙기도 했고, 라디오를 통해, 테이프를 통해, 레코드를 통해, 그리고 팝송 잡지를 통해 온통 매니아가 되어가고 있었다. 예쁜 사장이 운영하는 레코드 가게에는 일주일이면 5일 동안 출입했다. 노래도 좋고 사장도 좋았다. 우리가 팝송을 선곡하여 주면 하루 뒤에는 테이프에 녹음하여 받을 수 있었다. 친구의 형은 시도 썼다. 나는 형이 쓴 시를 보고 나도 쓸 수 있겠구나 싶어 써보았고, 학교 백일장에 내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팝송과 시를 처음 알게 해 준 그 형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시절의 꿈과 행복과 기억이 그대로 살아남아 지금껏 내게 이어져 오고, 언제나 아련한 추억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는 팝송이라는 매개체를 갖고 있는 나는 행운아이다. 지금도 많이 듣고,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마이클 잭슨의 노래 같은 팝송은 말하자면 타임머신이다. 그때그때 마다의 기록이 새겨져 있는 레코드이다. 그리고 시와 함께 내 안에서 언제나 울려 퍼지고 있는 감정의 바다.
6. 예술
‘인접예술에 관한 자유로운 산문’이 이 글의 주제이다. 팝송이 인접예술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내게 있어 팝송은, 아니 내게 소중하게 간직되어 있는 몇 팝송은 ‘예술’이다. 그것은 우주의 섭리를 드러내는 아이콘과도 같은 것이다. 예술은 예술에 영향을 준다. 지금도 팝송은 내 시에 영향을 주고 있다. 비록 예전처럼 일부러 찾아 듣고, 수십 번을 반복해 듣고 하는 집념은 반으로 줄었더라도 늘 내 주변에서 배경음악이 되어 나를 감싸준다. 엘튼 존의 ‘Goodby yellow brick road’가 문득 떠오른다.
*윤의섭|시인, 「팝 키드의 나날」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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