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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의 빈터

맑은 행복을 위한 345장의 불교적 명상

by 고요의 남쪽 2010. 8. 13.

107. 십우도十牛圖

십우도는 尋牛圖라 부르기도 한다. 열 폭의, 소를 주인공으로 삼은 화폭이자 소를 찾아가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서는 말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코끼리를 주인공 삼아 그리기도 한다. 그런데 소든 말이든 코끼리든, 또 그 무엇이든 이들은 모두 한 사회가 진리의 표상으로 합의한 방편으로서의 공동상징이자 일반적 환상이다. 따라서 소 대신 다른 그 무엇을, 심지어는 모기를 이 자리에 대체해놓아도 전달되는 의미는 같다. 소를 타고 소를 찾는다는 말처럼, 우리 모두는 우주법계라는 대진리의 마차를 타고서도 그 진리가 다른 곳에 있는 줄 알고 찾아 헤매고 있다. 아이를 업고 아이를 찾듯, 열쇠를 손에들고 열쇠를 찾듯, 지갑을 짐에 두고 신문에 분실공고를 내듯, 내가 사는 지금 이자리, 이 세계의 완전성을 잊고 우리는 저 너머의 파랑새를 갈구하며 갈애의 신열로 들떠 있는 것이다. 그냥 살라, 지금 그대로 완전하니까, 걱정하지 마라, 지금 그대로 충족됐으니까, 그만 떠나라, 머물러 있는 곳이 우주의 중심이자 끈이니까. 이런 말들을 겁 없이 하고 싶다.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일이다. 소가 있는 자리에 우울을 들여놓은 적이 있었다. 우울을 살면서 우울을 찾아 길들이고자 한적 있었다. 길들이지 않고는 부릴 수 없으니, 부리지 않고는 세속의 시정 속으로 잠입할 수 없으니, 잠입하지 않고는 갈애의 신열을 벗어날 수 없으니.  다음은 <우울 길들이기> 부분이다. "배를 타고 먼 바다를 건너서야 비로소 너를 만났어 너에게서는 생솔가지 타는 냄새가 났어 너를 길들였어 내 참 좋은 친구가 된 너는 갈색 머리였어 쵸콜렛 빛 망아지였어 한여름엔 팔 다리가 흘러내리는 우울의 낙지였어 눈 내리면 흘러내린 팔 다리가 빳빳해지곤 하는 엿가락 우울이었어 손에 익은 우울의 고삐를 잡고 가파른 벼랑과 올망졸망한 자갈밭을 지나 집으로 돌아왔어 옛집은 흔적뿐이어서 바람도 들지 않고 비도 새지 않았어 편안했어 기억의 털니가 덜거덕거렸어 화내고 기뻐하고 불안해하고 자신만만해하는 한 시절이 젖은 머리를 말리고 있었어 아궁이 가득 불 지피고 있었어 이스탄불! 이스탄불! 1년 전 오늘 나는 우울의 긴 머리를 빗겨주며 별을 헤다 잠들곤 했었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어서 뭉개진 사건들의 흐린 허벅지에 아무도 제 이름을 새기지 않았어"(2010. 8.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