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 심리학과 예술치료 /한상봉
1. 예술심리치료의 발견 그곳에 가고 싶다. 평생을 축축한 어버이의 눈이 형벌이 되지 않는 곳, 한바탕 울부짖고 나면 반드시 평화가 온몸을 쉬게 하는 곳, 빗물이 따뜻한 곳, 감꽃이 피는 곳, 물고기들이 재미있어 물 위로 뛰쳐나오는 개울가에서 노인들이 담소하고 그곳에서 여윈 내 어버이도 행복해 입꼬리를 떠는...... 그들은 이따금 물을 따라 내려오는 생명들을 웃으며 건져 올리고, 삶이 편한 곳, 가고 싶다. 사람들이 넉넉한 곳, 생명이 애처롭지 않은 곳, 습한 내 방안까지 그곳의 햇빛 들고 부드러운 바람 분다. 사랑도 놓고, 연민도 놓고, 칼날처럼 닿는 온갖 기억들도 다 놓고서, 그곳으로 가고 싶다.
(조은, 온갖 기억을 다 놓고서)
이 산문시의 제목은 ‘온갖 기억들을 다 놓고서’였다. 시인의 발언처럼 칼날처럼 닿는 온갖 기억들을 다 놓아 버린다면, 과연 우리는 그곳으로 갈 수 있다는 말일까? 평화롭고 따뜻하고 넉넉하고 삶이 편한 곳으로 ‘건너’ 갈 수 있다는 것일까? 그것은 단순히 공간적인 자리 이동만을 뜻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내 마음이 갈망하는 내 마음의 상태일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먼저 자신의 삶을 강퍅하게 밀어붙였던 ‘온갖’ 기억들을 모두 기억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따른다. 이제는 기꺼이 손을 놓아 버릴 수 있는, 내게서 떠나보낼 수 있는 무엇이 또렷하게 떠올라야 한다. 불쑥 찾아온 불청객처럼 예고 없이 내 삶을 온통 뒤집어 놓고 들쑤셔 놓는 것, 마음을 차갑게 응결시키고 초조하게 다그치며 불편하게 만들었던 실체를 알아야 분명한 눈빛으로 단호한 말씨로 그것들을 내 곁에서 떠나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마저도 내 육신과 영혼에 머물러 있었던 세월만큼 켜켜이 틈틈이 새겨진 것들이기에 칼로 살점을 도려내듯이 간단없이 떠나보낼 수는 없다. 그들에게도 헤어짐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고, 우리 역시 불가피하게 내 일부가 되었던 이 흔적들을 다독거리며 편안히 보낼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야 상처가 무늬로 남는다. 그 모든 혼란이 나를 위한 나의 배려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나의 어둠조차도 기꺼운 나의 애도의 시간을 통과하여야 ‘따뜻한 그늘’로 남아, 나를 다시 지치게 하지 않을 것이다. 내 어둠의 실체를 찾아 나서고, 발견된 어둠과 고요히 작별하는 작업을 나는 ‘예술치료’를 통하여 알게 되었다. 나는 그 세계를 몰랐고, 어느 날 집에 찾아온 한 후배가 ‘예술치료’를 공부하고 있다면서, 내게도 이 공부를 해보면 어떨까, 제안하였다. ‘예술과 치료’라는 두 낱말이 만나는 지점이 있다는 것이 놀라왔고, 나는 이 예술치료라는 분야를 통하여 내가 은밀히 갈망해 오던 것을 한꺼번에 얻을 것 같은 흥분을 느꼈다. 나의 단편적인 기억들을 통하여, ‘예술’과 ‘치료’라는 두 낱말이 갖는 개별적 의미와 두 세계의 통합이 갖는 개인사적 의미를 스스로 따져 묻고자 한다.
예전에 한 영화관에서 초등학교 동창생 부부를 만난 적이 있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이십여 년 만에 우연히 마주친 그 친구의 아내는 나에 관한 이야기를 여러 차례에 걸쳐 남편에게 들어서인지 내가 낯설지 않다고 말했다. 생각해보면, 나 역시 그 친구에 관한 이야기를 여러 차례 내 아내에게도 했던 것 같다. 그 친구는 어느 대형백화점 다자인실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그의 아내 역시 미술학원을 운영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 친구는 초등학교 때부터 ‘그림’ 때문에 빚어진 경쟁 상대였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우린 쉬는 시간마다 그림을 그려달라는 -실상 만화에 불과하지만-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그 패거리의 많고 적음에 내심 신경을 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 상황 때문인지 졸업할 때까지 정작 우린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하였고, 항상 먼발치에 서 있었다. 내 기억에 단 한 번도 개인적 대화를 나누지 못했던 그 친구를 나는, 그리고 그 친구는 서로를 잊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에 내 꿈은 화가가 되거나 천주교 사제가 되거나 교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중학교에 입학한 뒤로, 화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내게서 멀어지고, 사제의 길과 교사의 길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며 나는 성인이 되었다. 화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일찌감치 접은 것은 아마도 그 당시의 학력 중심의 사회적 분위기에 따른 사회화 과정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삶의 경로가 어느 방향으로 접어들었든 상관없이, 그 일 속에서도 시각매체에 대한 관심은 아예 사라지지 않았다. 사회단체에서 활동할 때에도 사진은 내가 도맡아 찍었고, 한때는 어쩌다 보니 문화예술기획 분야에서 다큐멘터리 비디오를 만드는 데 참여하기도 했고, 잡지사에서 편집을 맡았을 때도 유난히 시각적 효과에 얽매였다. 그 무의식적 동기를 그 당시엔 알지 못했다. 다만 직접적인 창작활동을 하기보다 -창작에는 훈련이 필요했지만 기회를 얻지 못했다- 타인의 작품을 꾸미고 배열하는 데 머물었다는 점에서 항상 아쉬움이 남았을 것이다. 그 아쉬움을 나는 한 장의 사진을 놓고, 그 사진을 나름대로 해석하여 운문(詩)을 써넣는 데서 심리적 보상을 받았다.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베트남 호치민대학교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보면서, 한동안 늦게나마 기회가 닿는다면, 호치민 대학 미술학부에 입학하리라 다짐한 적도 있었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갈망이란 이렇게 질긴 것인가, 다시 생각해 볼 기회가 되었다. 나중에 확인한 사실이지만, 중학교 때 우연히 참석한 ‘문학의 밤’이 하필이면 당시에 시국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들어갔던 ‘김지하 문학의 밤’이었다. 그 밤에 연단에 서서 시를 읽었던 사람이 ‘만인보(萬人譜)’를 썼던 그 유명한 고은이란 시인이었고, 사회를 본 사람은 지금까지 인연을 맺고 있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호인수 신부였다. 까맣게 잊고 지내던 그 사건은 내 삶의 방향을 예고하는 것이었을까? 그 문학의 밤에 대한 나의 기억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 나 같은 까까머리 중학생은 한 명도 없었고, 대학생들로 북적거리는 그 밤의 분위기는 무겁고 심각한 것이었다. 대학에 들어가서 까까머리로 도망쳐 나왔던 그 분위기 속으로 들어간 것은 무슨 자력(磁力) 때문이었을까? 십수 년을 사회운동을 한다고 뛰어다닌 것을 생각하면, 인생이란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이끌려 가는 것이지, 명석한 두뇌와 의지만으로 엮이는 것이 아님을 실감하겠다.
이 당시에 나는 우리 사회가 불합리하게 거꾸로 서 있었고, 그 안에서 현실적으로 고통 받는 인간들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 ‘혁명’이란 말에 심장이 두근거렸던 날들이었다. 그런 날들을 뒤로 하고 귀농(歸農)한다고 전라도 무주 광대정이란 산골로 들어가면서 상처받는 것이 사람만이 아니라는 자각을 했다. 그리고 이젠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만큼 사람의 마음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사람들끼리도 서로 상처주고 상처받는데 익숙해진 상황에서 벗어나야 하겠고, 이념적 차원이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에게로 가서, 그들의 다치고 일그러진 마음을 어루만져줄 수 있는 힘을 얻고자 했다. 사실 나를 포함하여 이 세상은 누구라 할 것 없이 통째로 상처를 안고 있으며, 그들은 그 상처를 치유 받을 권리가 있을 것이다.
‘치유자’에게 대한 감각이 발동된 것은 어쩜 나를 둘러싼 종교적 분위기의 탓일 수도 있다. 그것은 고통 받는 이들에게서 느끼는 ‘연민’에 대한 감각이었다. 그런 점에서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발언 가운데 “어린시절에 나는 고통 받는 인간을 도우려는 어떤 강한 열망도 가진 적이 없었다...... 그러나 젊은이가 되어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수수께끼들 가운데 몇 가지를 이해하고, 가능하다면 그 해결책에 뭔가 기여까지도 하고 싶은 억누를 수 없는 욕망을 느꼈다.”는 구절을 읽고 당혹감을 느꼈던 것은 당연하다. 그의 학문적 관심이 결국 심리적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해도, 애초의 동기가 가련한 인생들에 대한 연민이나 천명(天命)이 아니었음을 고백하는 프로이트 앞에서, 그의 솔직함이 대단히 높이 평가할만한 미덕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충분히 넉넉하고 자비로운 환경 안에서 성장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하는 안타까움이 남아 있다. 종교적 명령이 아니더라도 인간성 안에 깃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우리의 생애를 이끌어가기를 바라는 것은 여전히 아름다운 갈망으로 남는다. 예술치료는 예술을 매개로, 또는 예술가로서 인간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고 있다는 점에서 내 개인적으로 구원과 같았다. 그것은 내가 좋아하는 배를 통하여 항구에 닿을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Gabriel's Oboe / The Falls
Yo-Yo Ma, Cello / Ennio Morricone, d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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