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일체一體
나는 바람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바람은 나를 스쳐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빗물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나를 적셔서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일까. 나는 나무라고 하자. 나무는 내 집 정원에 푸른 잎을 피우며 나와 무슨 하나됨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나는 꽃이라 하자. 나는 꽃을 사랑스런 눈으로 바라보지만 꽃은 나의 집 화단에 뿌리 내림으로써 무엇을 얻게 되는 것일까. 나는 풀벌레라 하자. 가을날 풀벌레 소리에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은 나이자만 풀벌레는 내 노래 소리에 무슨 이로움을 얻게 되는 것일까. 세계가 하나라는 말은 듣기에도 좋고, 깊고 넓게 직시하면 세계가 하나임은 분명한 듯하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어떻게 의존되어 있는지 알기가 어렵다. 태양이 지구를 살게 하지만 태양에게 지구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먼 별에서 날아온 빛으로 지구가 밝아지지만 지구가 그 별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기 어렵다. 그래도 태양과 지구와 뭇별은 모두 한 식구이다. 우주를 떠나 달리 갈 곳이 없는 우리들은 그 까닭을 잘 모르지만 모두 함께 모여 우주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날 저녁 선생은 말씀하셨다. 오래 전 일이다. 석사 학위 논문 발표가 끝난 뒤 모인 저녁 식사 자리에서 선생은 말씀하셨다. 가장 확실한 일체감을 느낄 때는 섹스할 때라고. 너와 나는 왜 섹스를 하나. 섹스를 하면 뭐가 달라지나. 우리는 외로워서 짝을 찾고, 섹스를 하기 위해 밤낮없이 짝을 찾고, 섹스를 잘 하면 아이 하나 얻고, 너와 나를 꼭 닮은 생명 하나 얻고,,,좋은 일이다. 섹스의 시간이 너무 짧아 문제이고, 섹스가 끝나면 허전해서 문제이고, 태어난 아이는 어느 날 너와 나를 버리고 제 길을 가는 것이 더 큰 문제이고, 하지만 우리가 바람과 빗물과 나무와 꽃과 풀벌레와 섹스할 수 있다면, 자나 깨나 섹스할 수 있다면! 섹스 맛을 안다면 그러고 싶겠지. 그렇 수 있겠지. (2010. 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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