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언제나 "카르페 디엠!"을 외치며 흘러가는 시간에 귀 기울였다. 인생의 곳곳에서 존재하는 생명들이 전하는 가르침을 받들었다. 이를테면 서편하늘로 붉은 노을을 거느리고 장엄하게 몰락하는 태양에게서 최선을 다해 하루를 산다는 것의 의미를 배웠다. 얼어붙은 호수 위를 맨발로 걸으면서도 결코 미끄러지지 않는 굴뚝새에게서 비틀거리지 않고 산다는 것의 의미를 배웠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없이 꽃대를 밀어올리는 힘과 이파리를 떨어뜨리는 힘 사이에서 찰나의 시간을 영원의 시간으로 바꿔나가는 나무들에게도 그들은 귀 기울이고 배웠다. 이들 가르침은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뚜렷하게 존재했다.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소리'처럼. 생의 모든 순간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인생은 어제도 아니요, 내일도 아니었다. 그들에게 인생이란 단 하루, 오늘이었다.
인생을 단 하루처럼 살고자 하지 않는 사람에게, 삶은 상처를 먼저 가르친다. 용서보다 분노를 먼저 가르치고, 희망보다 좌절을 먼저 가르친다. 시랑하는 시간보다 기다리는 시간을 먼저 가르치고, 감사하는 마음보다 미워하는 마음을 먼저 가르친다. 앞으로 나갈 방향보다 뒤따라온 발자국을 돌아보게 하고 삶보다 죽음을 먼저 가르친다. 그리하여 사랑받는 삶보다 상처받지 않는 삶을 살고자 외롭게 투쟁한다. 그리고 상처 속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한다.
그들은 삶의 모든 순간을 사랑했다. 일분일초를 아끼며 지상의 모든 곳으로 행복을 옮기는 데 열중했다. 그들의 몸은 비록 상처투성이였지만 그들의 정신은 결코 꿰맨 자국이 없었다. 그들의 삶은 사랑과 행복에서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았다. 사랑과 행복에 갇혀 있는데도 그들은 자유로웠다. 자유롭게 삶의 영원을 여행하는 그들에게 죽음이란 아름다운 휴식이었다. 최선을 다해 하루를 산 사람만이 맛볼 수 있는 달콤한 안식이었다. 하여 그들의 죽음은 그들의 인생에 가장 큰 축복이었다.
지평선을 넘어갔다고 해서 태양이 이 세상에 사라진 건 아니다. 호숫가를 떠나 어디론가 날아갔다고 해서 굴뚝새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 건 아니다. 꽃과 열매와 이파리를 모두 떠나보냈다고 해서 나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 건 아니다. 하여 그들이 죽음의 안식에 들어갔다고 해서 그들이 이 세상에서 사라진 건 결코 아니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또다시 최선을 다해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영혼을 이끌고 행복을 관장하고 있으리라. 그들이 얻은 축복을 누군가의 하루에 심어놓기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영원한 삶을 자유롭게 여행하고 있으리라. "
-윌리엄 하블리첼, 유영 옮김,<<생의 모든 순간을 사랑하라>>브리즈, 2010
'초록의 빈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맑은 행복을 위한 345장의 불교적 명상 (0) | 2010.04.11 |
---|---|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0) | 2010.04.10 |
맑은 행복을 위한 345장의 불교적 명상 (0) | 2010.04.08 |
맑은 행복을 위한 345장의 불교적 명상 (0) | 2010.04.06 |
맑은 행복을 위한 345장의 불교적 명상 (0) | 2010.04.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