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촐한 가난
343 진심嗔心
화난 얼굴들이 방마다 가득하다. 욕망하는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난 사람들을 누그러뜨리게 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그들의 욕망을 들어주는 일이요, 다른 하나는 그들의 욕망을 깨우치게 하는 일이다. 전자도 후자도 방편이지만, 전자가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이라면, 후자는 샘물 하나를 스스로 파게 하는 일이다. 상황에 따라 전자도 후자도 시도해 보는 것이 이승에서의 길이지만, 할 수만 있다면 후자가 정법이다. 우는 아이에게 자꾸 단 것을 주면 그의 치아는 상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정효구)
▣박찬일 교수의 에세이, 「새로운 우상으로서의 국가, 국가가 종말을 고할 대 ‘인간’이 시작된다」를 읽었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국가와 민족, 잉여인간과 참된 인간의 상반됨에 대해 쓰고 있는 짧은 글이다.
‘잉여인간“은 이미 자기재촉에 의해 자기소진에 도달한 자를 직시한다. 부자는 그만큼 더 ’빈곤”하다. 그만큼 더 자기를 긍정하고, 그만큼 더 “탐”을 내기 때문이다(평등이 그들에게 “富”를 불러주었을지언정 그들의 영혼은 빈곤한 것이다).
위대한 영혼들에게 자유로운 삶이 활짝 열려 있다. 진정 말하건대, 적게 소유하는 자는 그만큼 더 적게[다른 것에] 휩싸여 있다. 조촐한 가난이 찬양받을 지어다.
탐과 부, 가난과 찬양을 들어줌과 깨우침 곁에 나란히 놓아 본다.(강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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