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빛 마을의 입구, 옥간정(玉澗亭)
옥간정은 별빛 마을 입구에 있다. 별빛 마을에 이르는 별빛 길은 옥간정이 그 출발 지점이다. 물론 별빛 마을과 별빛 길, 그 예쁜 이름의 출처는 별자리를 관측하는 보현산 천문대와 관계있을 터이지만, 나는 애써 그것을 옥간정과 관련지어 보고 싶은 마음을 어쩌지 못한다. 옥간정에 새겨진 선비의 정신을 하늘에 빛나는 ‘별’의 상징으로 읽어보고 싶은 충동 때문에 그러하리라. 어두운 세태의 부추김 때문에 그러하리라.
‘별’이란 무엇인가? 어둠 속에서 빛난다는 점에서 별은 고귀한 정신을 상징한다. 다시 그것은 고결한 이상과 선한 마음, 순순한 소망, 도덕적 염결성, 도달할 수 없는 거리감, 신비감 등을 상징한다. 옥간정의 자리에 서서 ‘별’을 상징으로 바라볼 때, 별빛 마을은 보현산 자락에 위치한 자연부락의 이름을 넘어 우리가 도달하고 싶은 가장 높고 고귀한 가치의 정점이며, 별빛 길은 천문대에 이르는 산길의 이름을 벗어나 가치의 정점을 향한 도저한 정신의 수련과정이 된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0호. 영천시 화북면 횡계리에 소재한 옥간정은 횡계구곡 (1곡 쌍계, 2곡 공암, 3곡 태고와, 4곡 옥간정, 5곡 와룡암, 6곡 벽만, 7곡 신제, 8곡 채약동, 9곡 고암) 중 4곡이다. 3곡 태고와(太古窩)에서 약 150m를 거슬러 오르면 옥간정에 이른다. 보현산 천문대로 가는 길이 옥간정 뒤로 새로 나서 정자가 길 아래에 위치하게 되었다. 옥간정은 훈수와 지수가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하여 1716년에 세운 정자로 정면 3칸, 측면 4칸 반의 ㄱ자형 누각樓閣 건물이다. 정자에 들어서면 정자 앞으로 목련, 은행나무, 느티나무, 탱자나무 등을 심어 정원을 잘 가꾸어 놓았다. 정자 오른쪽 앞에는 300년 수령을 자랑하는 은행나무가 있는데 그 높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이다. 옥간정 앞으로 비스듬히 흐르는 횡계는 이 지점에 이르러 굽어 돌며 작은 소(沼)를 이루고 흘러간다. 개울 건너편엔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있는데 바위에 ‘제월대霽月臺’, ‘광풍대光風臺’, ‘지어대知魚臺’, ‘격진병隔塵屛’ 등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옥간정의 건물 구조를 살펴보면 지붕은 맞배지붕이고 정면 건물 오른쪽 중간의 숫기와에서 용마루를 뽑아 건물을 이어 단 형식이 특이하다. 일각문 오른 쪽에 옥간정이 있고, 왼쪽에는 풍뢰당이 있다. 이 정자는 대지의 높낮이 차를 이용하여 앞면은 누 형식으로 꾸미고 뒷면은 지연석 기단 1단을 돌려 건물을 세웠다.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4칸 반인데, 전면의 좌협칸은 마루이고 우협칸에는 온돌방을 두었다. 좌협칸 후면 쪽은 온돌방 2칸과 서고 1칸을 두어 전체적으로 ㄴ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좌협칸 후면 3칸은 전면 지붕보다 한 단 낮게 꾸몄다. 건립연대가 확실하고 건립 당시의 평면 구성과 창호 구성수법 등이 잘 남아 있어 건축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는 조선조 후기 대표적인 정자이다.
옥간정을 찾은 날은 한 여름이었다. 영천의 문화재를 소개하는 해설사 한 분의 안내를 받았다. 대부분 지방문화재의 사정이 그와 같듯이 옥간정 또한 제대로 돌보지 않아 기둥은 상하고 지붕은 기울었다. 두더쥐가 마당 한 가운데 땅 속 길을 내고 박쥐들이 마루 이곳 저곳 배설물을 쌓아놓고 있었다. 거미줄을 손으로 걷어내며 안내를 맡은 해설사 선생이 혼잣말로 “이웃 일본은 없는 문화재도 만드는데, 우리는 있는 문화재도 돌보지 않는다”며 푸념을 했다.
바위 사이를 막아 작은 연못을 만든 뒤 뗏목을 타고 거문고를 켜기도 했다던 옥간정 계곡은 댐 막이 공사로 흐려진 물길에 송사리 몇 마리만 한가롭게 떠다닐 뿐이었다. 그늘은 깊었고 숲 속 바람은 서늘했지만 모기떼들이 극성이어서 오래 머물기가 힘이 들었다.
개나리처럼 생긴 나무줄기를 가리키며 안내를 맡은 해설사 선생이 말했다. ‘이게 영춘화(迎春花)입니다. 여기 밖에 없는 희귀식물입니다.“ 장원 급제한 사람에게 임금이 하사하던 어사화가 바로 이 꽃으로 만든다고 했다. 꽃은 지고 없는 푸른 영춘화 가지 끝을 따라 시간여행을 떠난다. 400년 전 그날, 옥간정의 옛 주인 훈수 선생과 지수 선생을 만나러 간다.
훈수 선생과 지수 선생은 임진왜란 때 선비의 몸으로 붓을 던지고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키는데 앞장섰던 호수(湖叟) 정세아 선생의 5세손이다. 훈수 선생은 1664년(현종 5년) 안동 임하 천전리 그의 외가에서, 지수 선생은 1667년(현종 8년)에 영천시 대천동에서 태어난다.
두 형제는 어릴 적부터 남다른 총기와 덕기로 칭찬 받는다. 훈수 선생 12살, 지수 선생 7살 때 증조부인 학암(鶴巖) 선생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한 번 읽은 것은 잊지 않는 영특함을 보인다. 훈수 선생이 29세 되던 1692년, 모자산(지금의 보현산)과 정각산 암자에서 공부에 몰두하다가 대전동 본가에 돌아와 있을 때의 이야기이다. 당시는 나라 안이 어지러워 도적의 무리가 들끓었다. 하루 밤에도 수백 명의 강도가 들어와서 가재도구와 식량을 도둑질하려 했다. 그러나 훈수선생은 미동도 하지 않고 태연히 책을 읽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도적들은 훈수 선생의 의연한 기상에 압도되어 그냥 되돌아갔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진 바와 같다. 오늘의 눈으로 보면 동화 같은 이야기일 뿐 믿기지 않을 사태이겠지만, 학문에 매진하는 선비의 고고한 자세와 고도의 집중력이 어떠한 것인가를 엿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기는 하다.
영천 토박이인 해설사는 두 형제의 남다른 우애와 충, 효, 검, 공(忠孝儉恭)으로 요약되는 삶의 자세를 누누이 강조했다. 강조라기보다는 자랑처럼 들렸다.
두 형제의 남다른 우애는 훈수와 지수라는 아호를 갖게 된 경위가 잘 말해주고 있다. 형제의 우애를 읊은 시전(詩傳)의 한 구절, ‘맏형은 흙으로 만든 나팔을 불고, 동생은 대나무로 만든 피리를 분다’(白氏吹塤 仲氏吹篪)에서 나온 ‘훈지’로 형제간의 우애의 뜻을 표상하기 위한 아호였던 것. 이런 까닭으로 많은 저술도 ‘훈지록’이라 했고, 자손의 이름도 훈, 지 두 글자의 변과 머리를 따서 짓도록 유명(遺命)하여 지금가지 시행되고 있다. 한 집안의 흥망성쇠는 형제의 우애로서 이룩되고 국가발전의 열쇠 또한 국민의 한 마음 한 뜻에 달려 있음을 상기할 때 이는 얼마나 귀한 가르침인가.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라면 부모형제도 없고 이웃도 모르는 오늘의 세태에 견줄 때 더욱 그러하다.
1730년 훈수 선생이 옥간정에서 눈을 감을 때 자손에게 한 유언은 충⦁효⦁검⦁공(忠孝儉恭)의 네 글자였다고 한다. 사군이충(事君以忠), 사친이효(事親以孝), 양덕이검(養德以儉), 지신이공(持身以恭)을 가훈으로 내린 것이다. 또 여러 제자들에게는 ‘명분과 절의를 갈고 닦으라’는 뜻의 지려명정(砥礪名節)의 가르침을 남겼다 한다. 당신의 초상을 치르는데 비단을 쓰지 말고 명정에 관직을 쓰지 말고 ‘징사훈수정공지구’(徵士塤叟鄭公之柩)라 쓰도록 했다고 하니 이 어찌 범연히 듣고 넘길 말이겠는가. 충효검공의 덕목을 몸소 실천해 보임으로써 후대에 귀감이 되어준 선비의 지조와 선생의 기상을 더듬어 볼 수 있게 한다. 입신출세와 부귀공명을 위해서라면 명분과 지조를 헌신짝 같이 버리고 권력과 치부를 위해서라면 권모술수와 야합을 서슴지 않는 날들은 예나 지금이나 얼마나 깊고 캄캄한가. 캄캄한 하늘에 선생들의 발자취는 얼마나 형형한가.
어찌 훈수, 지수 선생에겐들 출세간의 꿈과 부귀공명의에 대힌 인간적 유혹이 없었겠는가? 충효검공과 지려명정으로 요약되는 두 선생의 고귀한 선비정신, 그 빛나는 별빛 마을에 이르기 위한 도정이 궁금하다.
두 형제가 옥간정에서 갈고 닦으려 했던 학문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중국 송나라에서 발생한 신유학인 성리학이다. 이 가운데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의 ‘제월광풍(霽月光風)’은 송나라 성리학 사상의 한 국면을 잘 드러내는 말이다. 훈수와 지수가 옥간정 바위에 ‘제월대’, ‘광풍대’를 새겨놓은 것은 자신들뿐만 아니라 후학에게 이러한 사상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두 형제가 공부하고 가르치려 했던 ‘제월광풍’의 의미는 이들이 지은 시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훈수와 지수는 시 「제월대霽月臺」에서 염계의 사상을 계승하려 하는 의지를 드러낸다.
雨後天光淨 비 온 뒤에 천광이 깨끗하니
臺邊月色新 제월대 가에 달빛이 새롭네
濂溪千載意 염계가 가졌던 천년 뜻을
料得更誰人 어느 누가 다시 헤아릴까
염계의 사상, 염계가 천 년 전에 가지려 했던 마음은 어떠한 환경에도 물들지 않는 청정한정신세계이다. 이러한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 훈수와 지수는 옥간정을 지었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두 형제는 이러한 청정한 세계에 이르기 위해서 고인의 지식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한다. 시 「광풍대光風臺」에서
臺柳吟邊綠 광풍대 버드나무 내 곁에 푸르고
光風面上吹 광풍이 얼굴 위에 불어오네
自家理會處 자신이 이해한 것들은
要向古人知 고인이 알았던 것이네
버드나무 푸른빛, 맑은 햇살, 시원한 바람이 얼굴 위로 불어오는 이 상황은 티끌만한 인욕도 존재하지 않는 청정한 세계에서 느낄 수 있는 경지이다. 이처럼 청정한 세계에 이르기 위해서 고인의 가르침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성현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진리를 얻을 때만 진정한 세계에 이를 수 있다는 의미이다.
나아가 훈수와 지수 형제는 자연의 이치를 궁구하는 일에 매진한다. 시 「지어대知魚臺」에서,
濠上觀魚樂 물 위에서 물고기 바라보는 즐거움
千秋知者誰 천 년의 세월에 아는 이 누구인가
兩忘亦不可 둘이 잊는 일을 또한 할 수 없으니
魚樂我能知 물고기 즐거움은 내 능히 알겠네
물고기가 물살을 따라서 유유히 헤엄치는 모습을 바라보며 훈수와 지수는 천리가 운행하는 현상을 보았고 이것을 물고기의 즐거움으로 표현하였다. 물고기와 물이 하나가 된 경지, 두 형제가 이르고자 한 것이 바로 이러한 세계였다.
이러한 경지는 세속으로부터 격리된 공간일 때 비로소 가능하다. 훈수와 지수 형제는 옥간정 계곡을 인간 세상의 티끌이 이르지 않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시 「격진병隔塵屛」을 살펴보자.
沿溪周屈曲 시내 따라 굴곡을 두르고
矗矗翠屛開 우뚝 솟은 취병이 열리네
城市風塵漲 성시엔 풍진이 넘쳐나는데
回頭隔幾廻 머리를 돌리니 막힘이 얼마인가
옥간정이 자리한 횡계구곡 제4곡은 시내가 굽이지는 공간이다. 그리고 시냇가로 우뚝 솟은 푸른 바위가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공간이다. 따라서 저자에는 풍진이 넘쳐나지만 이 굽이는 둘러있는 바위 병풍으로 티끌이 접근할 수 없다고 여긴다. 따라서 둘러있는 바위를 ‘격진병’이라 이름 붙이지 않았는가. 성현이 가르침이 얼마나 사무쳤으면 돌에 새기고 시로 읊었을까.
조그만 산골 횡계 마을에 옥간정을 세우고 학문과 후학 양성에 평생을 바친 두 선비의 일생은 밤하늘의 별처럼 빛난다. 조정의 부름을 멀리하고 오직 학문과 제자 양성에 평생을 바친 훈수, 양수 선생은 형조참의 정중기, 영의정 조현명, 승지 정간, 판서 이유, 참판 시준 등 100여명의 명현, 석학들을 길러낸다. 두 형제는 조그만 산골 마을에 위치한 옥간정에서 훈지록(塤叟錄), 곤지록(困知錄), 이기집설(理氣集說), 가례차의(家禮箚疑), 개장비요(改葬備要), 대학보유(大學補遺), 상지록(尙志錄), 모현록(慕賢錄), 심경질의보유(心經質疑補遺), 계몽해의(啓蒙解疑), 치도의설(治道疑說), 의례변고(儀禮便考), 외국지(外國誌), 산거일기(山居日記) 등 10여종 백여권에 달하는 주옥같은 저작들을 남긴다. 별처럼 빛나는 족적이다.
훈수 선생 사후에 사헌부 지평 벼슬이 추증된다. 하지만 그 보다 중요한 것은 세속의 검은 떼를 씻어내기 위해 책을 읽고 글을 쓰면 마음을 닦던 참다운 선비의 삶의 자세이다. 훈수, 지수 선생이 보여준 고결한 이상과 선한 마음, 순순한 소망, 도덕적 염결성 그것은 보통 사람이 도달할 수 없는 아득한 거리 저 쪽에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면 어떠랴. 선생은 가고 없어도 그날의 옥간정은 보현산 입구에서 별빛 길을 내고, 별빛 마을이 저만큼 있다고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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