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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시의 곳간

지렁이가 먼저 죽으니 농약을 뿌릴 수도 없는 일이지만

by 고요의 남쪽 2010. 7. 7.


세한도 ․ 47



고구마를 심으려다 호박을 심었습니다. 산짐승 중에서도 특히 멧돼지가 고구마를 너무 좋아해서 남아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남아나지 않으면 큰일이지 그것이 비록 돈과는 관계없는 내 심심파적의 작물이라 하더라도 멧돼지가 파해치고 물어뜯어 난장판이 되어버린 고구마 밭은 생각만 해도 억장 무너지지 망연자실 하겠지” 쑥의 뿌리는 너무 질기고 깊이 박혀서 근절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습니다. 지렁이가 먼저 죽으니 농약을 뿌릴 수도 없는 일이지만 제 아무리 맹독성의 제초제를 뿌린다 해도 며칠 있다 되돌아보면 나 아직 이렇게 멀쩡해 하며 새파랗게 손사래를 치는 쑥과 한나절 씨름을 하고 겨우 한 이랑을 만들어 거름을 주고 비닐을 덮씌우고 십여 포기 호박을 심었습니다. 호박 넝쿨도 그 기세가 만만치 않으니 잘만 가꾸면 개망초 토끼풀은 물론 쑥까지 해치울지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난 코브라처럼 번쩍 쳐든 고개를 대문 밖까지 내밀어 오래 비워 둔 옛집을 저 혼자 지키는 섬뜩한 파수꾼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거든요.


쭉쭉 뻗어 가는 호박넝쿨에

지친 내 몸을 맡겨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