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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의 빈터

맑은 행복을 위한 345장의 불교적 명상

by 고요의 남쪽 2010. 6. 15.

81. 일미一味

칼국수, 녹두전, 지지미들을 파는 동네 음식점 이름이 '일미집'이다. 그전에 살던 동네에서는 갈비탕, 곰탕, 불고기 등을 파는 음식점 이름이 '眞味亭'이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일미집이라는 이름이 진미정의 그것보다 한 수 위인 것 같다. '眞'자보다는 '一'자가 심플하고 수승하다. 복잡하기 그지없는 '眞'자를 쓰려면 그 사이에도 마음이 몇 번이나 변덕을 부려야 하는지 모른다. 획수마다 달라지는 마음 상태를 걷잡을 수가 없다. 어쨌거나 우주삼라만상의 맛 가운데 최고의 맛이 일미라 한다. 하나의 맛, 한결같은 맛, 無縫인 통째로의 맛, 일심의 맛, 우주법계 자체의 맛, 주객 너머의 일체의 맛, 그런 맛에 비하면 일그러지고 찌그러진 세속의 얼룩덜룩한 맛은 너무 협소하고, 너무 달콤하고, 너무 경박하고, 너무 애매하고, 지나치게 일시적이다. 독소라도 없으면 모르겠으나 이런 세속의 맛에는 반드시 발효되지 않은 독소가 원하지 않는 서비스 품목처럼 첨가물로 들어 있다. 맛을 잃은 이 시대에 일미의 맛 없는 맛을 맛보게 하여 맛의 혁명을 일으킬 수는 없을까. 일미가 아니면 먹지 않는 최초의 입맛과 순정한 삶을 회복시킬 수는 없을까. 그러나 숙고해보면 맛은 외부에서만 오지 않는다. 내 마음이 虛靜해야만 일미가 그 자리에서 無가 有가 되듯 살아난다.

▣칼국수에서는 밀밭 냄새가 나고, 갈비탕에서는 마굿간 냄새가 난다, 하면 말이 안되나. '一'자는 감춘 것이 없어 바닥이 잘 보이고 '眞'자는 속이 복잡하여 출구가 어둡다, 하면 말이 되나. 일미집 칼국수는 간이의자에 앉아 먹어야 제격이고 진미정 갈비탕은 방석을 깔고 앉아 먹어야 맛이난다, 고 하면 말이 되나 안되나. 일미집 갈 때는 한복을 입고 진미정 갈 때는 양복을 입자. 일미집 나올 때는 거스럼 돈을 받지 말아야 하고 진미정 밥값은 외상이 좋겠다. 일미집 갈비탕은 어떻게 해야 잘 팔리나. 진미정 칼국수는 얼마를 받아야 손님이 붐비나. 빗소리로 간을 맞추고  바람 소리로 맛을 내면 어떨까. 빗소리는 일미집 갈비탕의 진미를 내고, 바람 소리는 진미정 칼국수의 일미를 낼 지도 모를 일이다. 빗소리로 우려내고 바람 소리로 헹구어낸 진미는 일미이다. 내 마음의 虛靜이 거기 은모래로 가라앉아 있으니.(2010. 6.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