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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응접실

말과 말 사이

by 고요의 남쪽 2010. 3. 8.

■ 우리 시대의 시인|조연호|말과 말 사이
「아침-자연」

조연호

  14. 불능은 가능에서 오는 것. 충분함을 괴로워할 이유는 그것의 결여에서 오는 것. 자연과 그것의 군소적 신(神)들은 이러한 충족 아래서 자신이 산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15. 사람들은 자기가 옳을 것들을, 혹은 자기에게 옳을 것들을 기하적 속성 속에 담는다. 견해를 결속하는 방식으로 결절점을 만든다. 그것이 재현이든 창조이든, 이야기의 그림자이든 그림자의 이야기이든, 나선이 직선의 가장 선형적일 때의 한 부분을 이루는 것처럼 그것은 충분히 옳으면서 동시에 옳을 것이 되어간다. 사람들은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 회전한다. 또한 그것이 불충분이든 미숙이든 간에, 평면은 우리 식으로 절실해지지는 않는다. 어떤 항진도 언제나 최단거리이기 때문에 평면은 그 자신이 자신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라는 간접적 개입을 하게 된다. 때문에 재현은 자기 자신의 장르가 되지 못한다. 자기에게 이를 수 있는 길이 자기로부터 최대한 멀어지는 것이 곡면으로서의 반조(返照)의 길이고, 그것이 형상을 흔든다면, 평면의 길은 직사(直射)하면서 늘 현재로서의 자기 자신이고, 자기 자신에 대한 시야를 전적으로 자기 것으로 가질 수 없으며, 지속적으로 올바르지만 연속적으로 그른 윤리를 하도록, 자신의 길항이 담긴 면(面) 자체를 흔든다. 그때부터 사람은 사람이 아닌 것으로서의 말을 한다. 자기가 옳을 것들을, 혹은 자기에게 옳을 것들을. 이것이 아니다,의 세계를 이것이다,의 세계로 대답할 수 없는 기하적 구성들이 그 입에서 쏟아진다. 문득 꺼지는 모습이자 반대방향으로 이것은 현재의 비현재적 위치일 것이다. 작고 갈변하는 미래의 모습으로 아침이 온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앞에서 자동 혹은 작동으로 주체라는 기계를 하고 있다. 일별(一瞥)로 점철된 연애를 하고 있다. 거기서 기계의 말이 들려온다 :
아침은 자기 이성의 가장 투명한 평면을 차원이 없는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존재하기 위해 공간을 점유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이 되기 위해 존재를 점유하는 방법으로 평면을 가장 공간다운 공간으로 만들고 있다.
아침-자신에게로 결코 되말려들어갈 수 없을 것이며-자신에게서 높낮이를 구할 수 없을 것이며-동물의 섭리와 인간의 생리가 가진 단일성을, 신의 문예(文藝)로 만들고 있다-그리고 장막 뒤편의 탄생은 관람자들이 자신들을 자신의 감격 속으로 불러오기 전에 이미 모든 감정을 사용하고 마는 것이다.
아침-근해(近海)로서의 당신은 뭍이 삭아가는 춤을 추고-우리가 발 디딘 대지를 우리의 인체 그 자체로 만들며-아님이기 위한 이해를 하기 위해-우아할지라도 처량한 부패를 하고 있다.
아침-지평선은 우리를 벌레로 만드는 꿈틀대는 밝아옴을 반복하면서도, 우리들의 외침이 탄식인지 환호인지를 들을 귀를 자신의 머리가 아니라 우리의 머리에 붙이는 참혹을 하고 있다.

  16. 공간으로 자신을 치장하는 것은 불안이 가진 감각기관의 최대 능력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다시 내밀히 자신의 감옥에 수인(囚人)으로서의 자신을 가두기 시작하면, 양심이 할 수 있었던 수많은 도정(道程) 가운데서 삶들을 걷어내기 시작하면, 그는 그가 행한 자신의 촉성(促成)을 불안 최대의 도래가 되게 하는 은밀함으로 성공해온 그 길 위를 다시 한 번 걷게 되는 것이다. 자신들이 거닐던 것조차 알지 못했던 대지 위를 자신들이 거닐고 있는 대지로 다시 응시하는 병리(病理)로서 말이다.

  17. ‘사실이 이러했다’고 말함으로써 우리는 종(種)이 될 수 있었다. 알고 있는 것의 일부는 모르고 있는 것의 전부를 절개(切開)하는 힘으로 우리를 윤리적이게 한다. 사실은 이러했다. 분별이 상(像)을 다르게 만드는 것은 상에게 변형을 가져오도록 시선이 명령하고 있는 것이며 분별된 채로 형상과 윤곽은 좀 더 높은 층리의 일그러짐으로 나아간다. 이것은 관점의 액체적 상태, 혹은 버려진 채 신성해지는 두엄더미. 뒤섞이기 위해 상이 존재한다면 인간은 보고자 하는 노력으로 보지 않으려는 노력을 대신하고 있는 방식으로 반개체적인 상을 반객체적인 상으로 이루는 것이다. 떨어진 물방울이 다시 한 번 그 위로 떨어진 물방울과 분별되지 않는 것은 세계의 최후의 회화이다. 우리가 그 회화 앞에서 유기적 상태를 얻지 못한다하더라도 회화 앞에서의 우리는 적어도 생태적이다. 그것은 늘어나거나 줄어들고 있으며 우점(優點)의 기능과 열성(劣性)의 기능을 동등하게 권리한다. 형질이 가진 기능의 결과로서 형질이 없는 상태를 이루는 것은 우리를 우리 자신의 종(種)이라 말할 수 있는 근거를 형성한다. 때문에 사실은 사실의 국소적인 육체로서만 자연적일 수 있다. 그 국소성이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 대해 나 자신이라고 말하는 인체에 대한 부분적 변형작용이라면, 그러한 이중성 아래, 자연의 두 가지 상이한 태도 아래, 우리는 육체에 깃든 적이 없었던 상태로 육체를 얻어가게 되는 것이다. 분별이 또한 결합을 전제로 하는 것은 그것이 관찰되는 것과 관찰하는 것 사이의 동소적 관계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보게 될 것뿐 아니라 우리가 이미 본 것과 동시에 우리가 보지 않게 될 것과 이미 보지 않게 된 것들이 관계하는 응시적 부분 모두를 포함한다. 이로써 하나의 종이 탄생한다. 영혼 역시도 영혼 그 자체가 아니라 바로 영혼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육체는 가장 성공된 배척이며 상(像)을 실물 상태로 변이시킬 수 있는 기하적 범주(예를 들면 평면적 도형들, 정신들.)에 놓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안정 상태로, 항상성으로, 시각적 항상성을 지각적 항상성으로 옮겨놓으며 우리를 안식으로 이끌게 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종류의 안식은 우리 자신에 대한 배척이며 그렇기에 종은 하나의 사실에 인체에 묶어두는 윤리를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이 이러했다’고 말함으로써 인간은 자연에서 멀어진다. 이것은 사적(史的) 경과가 아니다. 오히려 경향에 대한 해부(解剖)적 차이이다. 자연은 우리가 그것에 경외를 느끼는 순간 충분히 저하(低下)하고 있으며, 감흥에 젖은 시인(詩人)들을 발견하는 비극에 감싸여 있다. 그러나 그 자 이외의 것들에게 그 자의 층리는 어떻게 적셔질 것인가? 층간(層間)의 부피는 침묵의 단위로 존재한다. 매번 회전하고도 같은 자리이며, 원형(原形)이면서도 원용(援用)인 무엇으로. 그것이 자연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그 자신의 신체라면, 마침내 우리는 우리의 민물에서 몸이 빠져나오는 순간을 목도할 수 있을 것이다. 눈물이 그러한 방식으로 더러워질 것이다. 아침에, 증발하는 바다를 허공의 웅덩이에 고이게 하며, 기나긴 표상의 길은 우리를 위배하며 증진되어 왔다. 그것은 모든 미적 인식, 자의의 것으로 서술된 모든 표현을 자연으로 회귀시키는 모멸 속에서도 영원히 일렁이는 하나의 시(詩)였다. 객관은 미적인식을 수반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객관이게 하려는 내면의 주관이 객관이라 부르는 주관적 수면까지 떠올라 그 형상을 스스로의 것으로 믿게 하는 생태의 일종이기에, 현재는 ‘현재와 다를 바 없는 것’으로서 숭고하다. 혹은 불멸은 ‘육체를 썩어가게 하는 것’으로서 숭고하다.

  18. ‘사실이 이러했다’고 말함으로써 아이는 이별이 더욱 편해졌다. 약(藥)을 열심히 먹어야 한다는 생각, 공방(空房)을 절수(絶守)해야 한다는 생각, 막대와 가시 사이에서 무질(無疾)에 대한 열광으로 끓어오르고 있었다. 어린 아이였지만 외롭고 늙은 사람처럼 문에 어깨를 기대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를 추구하고 있었다. 막대 같은, 그리고 가시 같은 성기 가까이, 잔혹에서 받은 영감을 해석하고 변화시킨 밤의 업적들을, 그리고 개인적 관심사가 강조된 희망이라는 이 기이한 질병을 새 뼈로 잇기 위해, 아침에, 약성(藥性)으로서의 자연은 사라지는 질병적 풍요를 인간에게 베푼다. 이러한 과색(過色)에 취해,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연역할 수 없는 경험에서 도출된 원리가 우리와 무관하게 어떤 것과 접촉하고 있으며, 더불어 그것이 행위가 포함하지 않는 참일 경우에 한하는 별개의 영역에서 우리의 귀납에 거대한 상처를 낸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성향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경향 속에 있게 된다. 도달이 하나의 발달에 이르기까지, 본유(本有)들이 한 일은 관찰이며, 그런 기계적인 힘들에 의존하는 운동으로 피식자를 찾는 포식의 정신을 획득을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럴 때, 어느 정도 타당과 비슷한 감정으로, 우리는 불가피하다. 그것을 외재적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동시에 그것을 목소리를 가진 부속지(附屬肢)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세상은 무너진다. 그리고 어제 그것을 본 사람은 자신이 무너진다고 말했던 것이 오늘 여전히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에 -그러한 일관성에- 당황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멀어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것이 정든 여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것이 결백적인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완은 무한에 이를 수 있는 힘이 아니다. 고작 신체를 세계와 동등하게 하는 팽창만을 가지고, 시가 사물을 영혼으로 허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연에 대한 자연적 제약들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아이는 자신을 만질 때 가장 많은 타인과 만나고 있었다. 자신이 길게 늘어나 태양을 두드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짝눈이며, 유치(乳齒)로 영구치를 버티고 있으며, 부정교합의 턱을 가지고 있고,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했다. 괴물이 될 수 있는 충분한 요건 아래서 내가 택한 것은 헛귀가 되려는 것. 그러나 나는 나의 사건에 기여하지 않기 때문에 불변적이다. 세계의 목적이 나의 목적을 비극적으로 희망하게 했듯이, 나의 목적은 세계의 목적을 아름답게 반성시킬 것이다. 인간의 육신을 머금은 자연의 신체로, 아침이 온다.

 

* 조연호 , 「아침-자연」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