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초록의 빈터

우리 어느 둑길에서 만나리

by 고요의 남쪽 2009. 9. 26.

우리 어느 둑길에서 만나리

강 현 국


  내가 사는 집은 무학산 발치에 있다. 십여 년 전 지은 25층 아파트인데 2년 전부터 그 아파트 24층에 살고 있다. 앞산 능선이 둘레둘레 한 눈에 들어오는 전망 좋은 집, 산 냄새가 코앞에 개여울로 흐르는 공기 좋은 집이다. 거실에 앉아 나는 철따라 바뀌는 서산의 빛깔과 아침저녁 변화하는 햇살의 두께를 책장을 넘기듯 만져 보곤 한다. 피고 지는 들꽃의 리듬에 홀려 자주 출근 시간을 놓치기도 한다.

  엘리베이터가 나를 데리러 오는 동안 창문과 붙어 있는 겨울 무학산 한 켠을 우두커니 보고 있다. 잎 진 굴참나무 숲이 드러낸 길이 보인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 길을 오르는 사람들이 보인다. 어디로 가는 걸까. 무엇하러 가는 걸까. 저 길의 끝은 어디일까. 세상 등짐이 무거운 듯 한결같이 허리가 앞으로 굽어 있다. 연둣빛 녹음이 저 산을 덮었을 때, 잎사귀에 묻혀 저 길이 보이지 않았을 때, 저 산에 봄비 내릴 때, 누에가 뽕잎 먹는 듯 봄비 소리 들릴 때 “혼자 사는 건 참 힘들 것 같아요”라고 아내는 말했었다.

  나이 들자 대책 없이 빠지는 머리칼의 풍경처럼 겨울이 깊어 저 산은 국방색 잎들의 스크랩을 풀고 물물의 나무로 고독하다. 욕심이 없으므로 저 산은 가발 쓰지 않고 염색도 하지 않고, 욕심이 없음으로 저 산은 제 가슴 깊은 곳을 열어 하늘을 오르는 그 길을 드러낸다. 꽃 피는 봄날의 설렘을 지나 우레 치는 그 여름의 번뇌를 헤집고 어느 덧 황혼, 가을밤의 스산한 풀벌레의 노래와 함께 뼈 깎고 피 말려 만들었을 길,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 길을 오르는 사람들이 보인다. 혼자 가는 먼 길이 잘 보인다.  


나는 눈물을 펑펑 흘렸다.

어제(27일) 동아일보에 보도된 백혈병 소년에 관한 기사를 읽고 나는 눈물을 펑펑 흘렸다.

“이정표. 13세 서울등촌초등학교 6학년 작가 지망생” 이 소년이 남긴 이력의 전부다. 백혈병에 걸린 소년은 1년하고도 아홉 달간 날마다 일기를 남기고 지난 14일 아침 하늘나라로 옮겨 갔다. 그의 투병일기는 다음같이 시작 되고 있다.


 “2005년 4월 20일 수요일 날씨 황사 심함

  제목 : 백혈병

  내가 백혈병에 걸렸다. 손이 떨리고 글씨가 이상하다.

  오랜만에 연필을 잡아서인가? 3월 30일 새벽에

  코피가 심하게 나고 토해서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실려 왔다.

  그러다 저녁쯤 백혈병이라고 해서 너무 놀랐다.

  너무 억울하고 슬프다.

  맞는 골수가 없다 한다...엄마를 믿고 용기를 내자.

  옆 침대의 아이가 죽었다. 천국서 행복하게 잘 살길..

  피오줌이 나온다...누가 날 좀 살려 줬으면

  바다에  가보고 싶어...

  돈으로 살 수 없는 깨달음을 얻었어.

  파란 하늘, 맑은 공기

  이런 걸 느끼기만 해도 큰 행복이란 걸...”

 소년이 숨을 거두기 전에 아버지가 말했다.

 “정표야 사랑한다. 너 너무 멋졌어 . 최고였어, 잘 했다.”

  정표는 힘겹게 입을 뗐다.  “고마워”

  우리는 큰 행복을 잊고 살아간다. 숨 쉬고 살아 있음에 대한 감사, 그리고 푸른 하늘 맑은 공기를 자유롭게 보고 느낄 수 있음에 대한 감사이다.


  위의 글은 김진홍 목사께서 보내주신 아침 묵상에서 따온 것이다. 아주 오래 전 『새벽을 깨우리로다』를 읽고 아, 세상에 이른 분도 계시는구나! 하며 그분의 팬이 되게 되었던 것인데, 팬이 된 덕분에 나는 그분이 하시는 두레사업에 티끌만한 정성을 보태고 태산만한 은혜를 받으며 산다. 내 잦은 불면의 시간들을 다독여 주는 설교 테이프도 그것이고, 하루도 거름 없이 새벽마다 이 매일로 배달되는 <아침 묵상>도 그 중의 하나이다.

  혼자 먼 길을 떠난 정표에게, 먼 길에 내던져 진 정표 아버지에게 무슨 말을 덧붙일 수 있겠는가. 어린 소년이 우리에게 주고 간 파란 하늘 맑은 공기 앞에서 나는 눈물을 펑펑 흘렸다. 정표가 보고 싶어 했던 바다, ‘고마워’란 마지막 말의 검푸른 바다! 앞에서 나는 눈물을 펑펑 흘렸다.


어느 덧과 어쩔 수 없이 사이


세한도∙ 38


하 하늘이 높고 푸르러

하늘 아래 物物은 耳順하다


어쩔 수 없이,


노을 속을 파고드는 기러기처럼

강물은 흘러 흘러서 어디로 가나


어제는 슬픔이 하나/한려수도 저 멀리 물살을 따라/남태평양 쪽으로 가버렸다./오늘은 또 슬픔이 하나/내 살 속을 파고든다./내 살 속은 너무 어두워/내 눈은 슬픔을 보지 못한다./내일은 부용꽃 피는/우리 어느 둑길에서 만나리/슬픔이여,(김춘수, 「슬픔이 하나」)


  지난 가을 후배가 경영하는 한 식당의 가설무대에 올라 <목마와 숙녀>를 낭송하기 앞서서도 그랬고, 며칠 전 제자들의 홈 커밍데이에 초대되어 <빗속을 둘이서>를 부르기 전에도 그랬었다. 어느 덧 세월 가고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지금 여기 이렇게 서 있다. 어느 덧과 어쩔 수 없이 사이에 끼어서 하염없이 부대끼는 인간의 실존이란 얼마나 허망한가. 그 허망함이 박인환을 불러내고 김정호를 살려내어 잔치 마당을 달구어 보지만 어느 덧 갈채는 멎고 조명 꺼지면 어쩔 수 없이 당신은 쓰러진 술병을 치우며 허망의 쓰나미에게 맨몸을 맡겨야 한다.

  죽음이란 나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믿으며 산 날들 있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던 날들 있었다. 이불 속에서 새우잠 자며 누군가의 죽음 소식을 알리는 이웃집 아저씨의 까칠한 목소리를 엿듣던 어린 날 새벽녘이 특히 그랬었다. 그러나 죽음은 느닷없는 침략자처럼 내 허술한 믿음의 울타리를 부수고 쳐들어왔다. 누이의 죽음이 그랬고, 아버지 어머니의 죽음이 그랬고, 스승의 죽음이 그랬고, 장모님의 죽음이 그랬고 오 선생의 죽음이 그와 같다. 모든 죽음은 내 것이 아니기를 바라는 만큼 느닷없는 것인가 보다.

  2007년 2월 2일 오규원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 강물은 흘러 흘러서 어디로 가나. “선생님오규원선생님5시10분에돌아가셨어요” 이원 시인이 문자를 보내왔다. 그가 두고 간 서후 하늘이 즉각 보인다. 명가주택으로 들어서는 논둑길이 즉각 보인다. 산소 호흡기가 즉각 보인다. 핏빛 꽃을 피우는 정원의 명자나무, 빈 집에 함께 살았던 턱이 쫑긋하고 유순한 털빛의 개, 무료한 시간이면 선생이 창 너머로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을 자귀나무 어깨 위의 햇살, 가슴이 붉은 딱새가 즉각 보인다. 즉각; 선생이 시를 이야기할 때 자주 썼던 즉각 이란 말이 부추기는 삶과 죽음, 이승과 저승의 즉각성, 끝간 데 모를 허망의 즉각성! “동생총장당선축하해요총장동생두게되어기뻐요”, “겨울이참힘들어요10분을앉아있기어려우니인터뷰는못해겠어요” 투병의 오랜 날들, 선생을 세상과 이어준 유일한 통로였던 휴대폰, 손 떼 묻은 문자판이 눈에 밟힌다. 우리 어느 둑길에서 만나리. 슬픔이여.


시간의 집

  선생의 빈소에는 떨렁, 조화만 보내놓고 나는 김성춘 시인이 기다리는 경주 간다. 동리․목월 문예창작대학 개강식에 특강을 하기로 오래전부터 약속되어 있던 터이었다. 불국사 입구에 동리 선생과 목월 선생을 기리는 아담한 2층 기념관이 있었다. 오규원 선생과는 대학 동기이자 오랜 지기였던 김성춘 시인은 친구의 죽음은 아랑곳없는 듯 개강 준비로 일 속에 파묻혀 있었다. 기약 없이 떠나가는 친구의 혼자 가는 먼 길을 차마 바라볼 수 없어서 일 속에 파묻혀 땀 흘리고 있었다. 내일 문상을 갈 계획이라 했다. 지난 주 문병 가서 만져본 친구의 손이 얼음보다 차가웠다 했다. 의식도 없이 손과 얼굴이 많이 부어 누워 있는, 죽음에 내 맡겨진 친구의 모습을 시인은 담담히 이야기했다. “규원아 나야 성춘이 왔어 일어나야지 너는 나보다 의지가 강한 놈이잖아…….”친구의 감은 눈가에서 흐르는 눈물을 보았다고 했다.

  기념관에는 선생들의 사진, 선생들이 두고 간 원고지, 만년필, 작품집, 시계, 옷가지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 등 동리 선생과 목월 선생의 빛나는 발자취가 잘 정리되어 있었다. 영상실 기계 속에서 동리 선생은 문학 강연을 하고 계셨고, 목월 선생은 자작시를 낭송하고 계셨다. 그래서 어쩌자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어쩌자는 것인가. 박물관이란 시간의 집, 그러나 그 집은 산 사람이 들어설 수 없는 이상한 집, 아니 그것은 피돌림 멎어버린 시간의 통조림이다. 그대 그리움 검푸른 바다 되어 철썩이는데 그 바다의 주인은 기억의 깡통 속에 갇혀있으니. 그래서 어쩌자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또 어쩌자는 것인가. 도무지 강의를 할 기분이 들지 않았다. 나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오래전에 써두었던 에세이 한 도막을 읽는 것으로 말 머리를 열었다. 오규원 선생의 『현대시 작법』을 소개하는 것으로 강의를 끝냈다. 

 


  고요와 적막은 비슷한말이지만 많이 다르다. 고요라는 말의 뜨락에는 탱자나무 울타리가 벗어놓은 아침햇살 반짝인다. 적막이라는 말의 우산 속에는 아무도 없고 아무도 없는데 저 혼자 비 내리는 늦은 밤 정거장이 있다. 고요는 다람쥐가 초록 속에 감춰둔 인적 끊긴 길가에 있고, 어느 날 사랑은 가고 이제는 텅 빈 그대 옆자리에 적막은 있다. 그러므로 고요는 가볍고 적막은 무겁다. 문명과 제도와 욕망의   우울을 먹고사는 적막과 흰 구름, 산들바람, 느리게 흘러가는 강물소리의 혈육인 고요는 비슷한말이지만 이렇게 다르다. 그대 영혼은 가벼운가 무거운가. 무릇 인간의 문화적 노력이란 가벼워지기 위한, 또는 적막에서 고요로 옮겨 앉기 위한 안간힘이 아닐까.

  내 쓸쓸한 아침마다 찾아가는 수성구 범물동 진밭골 뒷산 오솔길에 와 보라. 고요가 살고 있다. 까치수염 기르고 나비 떼 날게 하는, 개미들의 긴긴 이사행렬을 말없이 지켜보는, 잠시 내 적막의 물기를 휘발시키는 힘센 고요가 저 혼자 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가끔 그리고 언뜻 만날 수 있는 에피퍼니 같은 것. 고요를 살기는 힘들고 고요가 되기는 불가능한 꿈이다. 고요에 인간의 체온이 묻는 순간 그것은 아연 적막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가령 이런 일이 있었다. 그곳 서해안 안면도의 푸른 소나무 숲에는 태초의 고요가 살고 있었다. 젊은 날 죽은 고등학교적 친구의 시비 제막식은 헌화로 시작되어 미망인의 인사로 끝이 났다. 슬퍼할 것, 추억할 것 저마다 챙겨들고 훌훌 떠난 뒷자리를 나는 오래 지켜보고 있었다. 고요가 적막으로 변하는 바람의 빛깔과 만져질 듯 아려오는 시간의 두께 앞에서 얼마나 망연했던가. 이승의 삶이란 고요와 적막 사이 가건물 지어 놓고 마른 풀잎처럼 부대끼는 것…….이보게 친구, 쓸쓸해 하지 마. 가파르게 살다 먼저 간 시인의 목소리가 푸른 솔바람 저쪽에서 들리는 듯하였다

.


  물론 글쓰기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언어에 대한 감각을 일깨우는 것이라는 말을 하기 위한 자료였다. 그러나 내 마음은 온통 푸른 솔바람 저쪽에서 들리는 듯한 오규원 선생의 목소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얼마나 가파르게 언어의 한 끝을 살다 갔는가!


한적한 오후다

불타는 오후다

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

나는 나무속에서 자본다


와 같이, 가물거리는 의식의 한 끝을 잡고, 제자의 손바닥에 손톱으로, 빙벽에 매어달린 아이젠 같은, 영혼의 손톱으로, 마지막 시를 쓰고 떠날 때까지.


어느 덧 황혼

‘쓸쓸한’ 풍경을 사랑하는 것은 고통스런 부재감의 보상행위이다…….마음을 바쳐 어떤 현실을 사랑하자마자 그것은 벌써 혼이 되고 추억이 되어버린다. 라고 바슐라르는 쓰고 있다. 나도 그 날의 내 아버지, 어머니처럼 아침마다 혈압을 다스리는 약을 먹어야 하고 잠들기 전에는 피를 맑게 하는 약을 먹어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어느 덧 황혼, 참 쓸쓸한 풍경이다. 어쩔 수 없이 나는 한 시인의 부재, 그 숨 막히는 공허를 마음 바쳐 사랑해야 한다.


세한도 ․ 32

        -오규원 선생께



화전민이 일군 허공 아래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는 없다

허공이 일군 자귀나무 어깨 위에

주먹밥만 한 흰 구름 모락모락 피어있다


있다와 없다 사이 허공의 위와 허공의 아래 사이

납작하게 끼어 있는 2005. 9. 10. 토요일. 적막.


기록이란 말은 요도에 박힌 결석처럼 아프다. 기록이란 말은 영구불변하는 금강석 같다. 기록이란 소멸의 항체이다. 기록한다는 것은 생의 의지이다. 그러나 기록에 대한 기록한 사람의 지분은 아주 적다. 금강석은 단단해서 시간을 비끼고, 그 빛은 찬란해서 천지를 비추나 한 시절의 주인은 이미 그곳에 없다.


  2005년 9월 10일 토요일의 적막은 기록으로 남고, 허공의 위와 허공의 아래 사이 한 시절의 주인은 이미 그곳을 떠나고 없으니!

  강물은 흘러 흘러서 어디로 가나. 포근한 날씨였다. 아마도 철새들의 이동을 이용해서 그곳까지 갔으리라. 떠나간 당신들의 별자리가 아주 가까이 보이는 날이었다. 07.2.5.8:56 “많이아프겠다잘모셔요” 이원시인에게 문자를 보냈다. 07.2.6.12:11 “선생님오선생님강화전등사오래된소나무로잘모셨어요언제그곳에오선생님뵈러오세요” 이원 시인이 문자를 보내왔다. 선생의 절명시가 새겨진 그 손으로. 수목장 하루 뒷날이었다. 한 소년이 두고 간 파란 하늘 맑은 공기 오래된 소나무에 가득한 날이었다. 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였으리라.


'초록의 빈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0) 2009.10.05
가을의 기도  (0) 2009.09.27
[스크랩] 생일 전전야제~  (0) 2009.09.18
이미지프리  (0) 2009.09.18
[스크랩] 기차여행  (0) 2009.0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