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의 입구
달라이 라마를 읽었다. 『마음을 비우면 세상이 보인다』로 번역된, 내가 읽은 책의 원제는 『The Path to Tranquillity』. “오늘날 세계는 너무도 골 깊은 갈등과 고통에 빠져 있으므로, 누구나 평화와 행복을 갈망한다.”로 시작해서 “우리가 역사상 유례없는 엄청난 시련과 고난을 겪는 동안, 인도의 주도하에 세계인이 우리에게 준 연민과 후원과 도움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며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로 끝나는 이 책은 어느 한 해 동안의 달라이 라마의 일기, 365 도막의 명상록이다. “내가 은혜를 베풀고/내가 큰 소망을 가졌던 자가/내게 해를 입힐지라도/그를 성스러운 영혼의 친구로 여기련다.”등의 노래가 자신에게 큰 영감의 원천이 되어왔다는 고백이 들어 있는 <작가의 말>을 저자는 1998년 2월 26일에 쓰고 있다. 아마도 이 일기는 1997년의 것일 터이다.
『The Path to Tranquillity』, 이 말의 울림은 신선하고 아름답다. Tranquillity에서 나는 고요의 살갗을 만진다. Path라는 말의 음영에서 고요의 발자국 소리를 듣는다. 그 살갗은 유리처럼 투명해서 고요의 몸 속이 환히 보이는 듯, 그 발자국 소리는 너무 청정해서 하늘하늘 조랑말 갈기가 민들레 노란 언저리를 달리는 듯 하다. 그런데, 왜, 『마음을 비우면 세상이 보인다』고? 이상해라, 바뀐 이름 속엔 고요가 없다. 고요가 없으니 세상이 안 보인다. 자본의 야욕으로 가득한 세상의 뒷모습이 얼비치니까, 한 꺼풀만 벗기면 털이 숭숭한 큰손이 보일 터이니까, 내게는 그렇게 읽혀지니까. 『마음을 비우면 세상이 보인다』고! 고요를 뜯어먹는 굶주린 욕망, 내 눈에 보이는 것은 탐욕의 검붉은 사육제뿐이라면 과장일까. 억지일까.
당신은 알겠지만 나는 지금 영어예찬을 하고 있지 않다. 이율배반의 돌부리에 두 발 상하고 우회의 모퉁이에 마음 다치며 우리는 비로소 고요의 입구를 찾아간다는, 건너뛰어 말하건대 종교가 그렇고, 음악이 그렇고, 시가 그렇고...... 꿈꾸는 삶의 끝간데에는 고요의 산정이 있다는, 햇살 눈부신 고요의 빙벽이 있다는, 나는 지금 그 말을 하고싶은 것이다.
“아파트 입구 캄캄한 공중전화 박스 안에/갇혀, 누가 오래 울고” 있는가. 당신은 알 수 없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불 꺼진 창가에서 갈 길을 잃은 사람, 누가 고요의 입구를 더듬고 있는가.
3분이 지나 통화가 자동으로/끊긴다. 왼쪽 가슴뼈인가, 느닷없이/몸의 일부가 잘리운 듯한 통증이/느껴진다. 수화기를 놓고/몸의 구석구석을 살핀다./처음엔 몸을 뒤져 10원 짜리 동전 2개를/더 찾아내려 했다. 동전만 있으면/다시 전화 걸 수 있고/우리의 끊긴 말을 이을 수 있다. 헤어질 때/침묵의 심연을 들여다보며/우린 다투었고, 그는 엇갈렸다./그도 기다리고 있으리라. 어둠에 발을 상한/짐승처럼. 그러나 밤이 깊어/아파트 앞 상가의 불도 꺼지고 이젠/동전을 바꿀 수가 없으니./이 밤의 끊긴 시간이 밤사이 우리를/의혹의 미궁 속으로 데려가/영 찾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내일 아침이면 너무 늦은데/아파트 입구 캄캄한 공중전화 박스 안에/갇혀, 누가 오래 울고 있다.(백미혜, 「끊긴 시간의 한 끝을 잡고」전문)
위의 시를 나는 사회사나 문명사의 그것이 아닌 개인사의 코드로, 일상사의 코드로 읽는다. 나무를 버리고 숲을 본다는 것이, 구체가 사상된 보편이라는 것이, 내가 빠진 우리라는 것이, 부분을 떠난 전체라는 것이, 그래 대승적이라는 것이, 그래 그래 공적이라는 것이 도무지 역겨워 못 견딜 때가 있다. 그것은 삶의 허세이거나 책임지지 않아도 좋은 뜬구름이어서 참으로 사적이고 싶을 때가 있다. 지금 내가 그렇다. 고요의 입구를 더듬기 위해 우리는 얼마든지 더 많이 더 구체적으로 아파야 하는 것이다. 어둠에 발을 상한 짐승처럼 고요는 한 생을 희망 없이 기다려본 사람의 것. “밤이 깊어/아파트 앞 상가의 불도 꺼지고 이젠/이 밤의 끊긴 시간이 밤사이 우리를/의혹의 미궁 속으로 데려가/영 찾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팔공산 자락이 멀리 보이는 대명2동 연구실 창가를 떠나간 내 마음은 캄캄한 상가 앞에 오래 머문다. 끊긴 시간의 한 끝을 잡고. 내일 아침이면 너무 늦은데, 내일 아침이면 너무 늦은데......고요의 입구에는 적막이 산다.
고요와 적막 사이
결여가 욕망을 낳는다고 한다. 석 달 열흘 주린 배가 알곡 가득한 곳간을 꿈꿀 때, 그 꿈은 아름답다. 자연스럽기 때문에, 자연이기 때문에. 나무는 숲을 이루되 물과 햇살과 바람을 독과점하지는 않는다. 인위와 자연은 여기서 갈린다. 그러므로 키 낮은 질경이 잎사귀에도 연초록 바람 불고, 아침 햇살은 아무 데서나 샛노랗게 눈부시다. 그러므로 시냇물 맨발로 흘러 흘러 먼바다에 이르고.
문제는 객체인 욕망이 주체가 될 때이다. 욕망이 결여를 낳을 때이다. 주객이 바뀔 때 욕망은 밑이 없고 결여는 끝이 없다. 욕망은 끝없이 새끼를 치고 결여의 식욕은 게걸스럽다. 늙지 않는 욕망은 노욕이 되고 죽지 않는 욕심은 탐욕이 된다. 길길이 날뛰는 탐욕의 불길에 세상은 불타고 그때 당신은 숯검뎅이처럼 캄캄해진다. 초록의 빈 터, 청정한 신성이 사라지는 이유이다.
적막은 그렇게 온다. 숯검뎅이처럼 캄캄한 얼굴을 하고. 스치는 바람에도 검정이 묻어날 듯 적막은 그렇게 온다. 그해 여름 나는 황량한 세상 풍경을 한 일간신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고요와 적막은 비슷한말이지만 많이 다르다. 고요라는 말의 뜨락에는 탱자나무 울타리가 벗어놓은 아침햇살이 있고, 적막이라는 말의 우산 속에는 아무도 없고 아무도 없는데 저 혼자 비 내리는 늦은 밤 정거장이 있다. 고요는 다람쥐가 초록 속에 감춰둔 인적 끊긴 길가에 있고, 어느 날 사랑은 가고 이제는 텅 빈 그대 옆자리에 적막은 있다. 그러므로 고요는 가볍고 적막은 무겁다. 문명과 제도와 욕망의 우울을 먹고사는 적막과 흰 구름, 산들바람, 느리게 흘러가는 강물소리의 혈육인 고요는 비슷한말이지만 이렇게 다르다. 그대 영혼은 가벼운가 무거운가. 무릇 인간의 문화적 노력이란 가벼워지기 위한, 또는 적막에서 고요로 옮겨 앉기 위한 안간힘이 아닐까.
어느 날 마침내 만져 보고싶은 그 보송보송한 고요의 맨발이 벗어놓은 햇살의 食性과 불 꺼진 창을 흘러내리는 저 끈끈한 적막의 허벅지에 달라붙은 파리의 그것은 어떻게 다른가
초록 속으로 발뻗는 물들거나 녹슬지 않는 까치수염 기르는 나비 떼 팔랑팔랑 불러들이는 아아, 내 마음 속 날다람쥐 허공 높이 쏘아 올리는 떡갈나무 숲길 같은...
토담길에서 조껍데기술 아리아나 2층에서 흑맥주 OB캠프에서 또 흑맥주 노래방에서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오오, 캄캄하게 처박히는 새벽 세시 두산오거리 같은...
잠에서 깨어나니 아아, 와 오오, 사이 어느덧 십 년이 흘러갔네
곰삭은 어금니와도 같이 아무 말 못하고 허물어진 내 삶의 흑백사진 속에 갈앉은 시간의 앙금 속을 하염없이 꼼지락거리는 장구벌레는 그러면 고요의 자식인가 적막의 새끼인가
---「시작 노트」전문
내 쓸쓸한 아침마다 찾아가는 수성구 범물동 진밭골 뒷산 오솔길에 와 보라. 고요가 살고 있다. 까치수염 기르고 나비 떼 날게 하는, 개미들의 긴긴 이사행렬을 말없이 지켜보는, 잠시 내 적막의 물기를 휘발시키는 힘센 고요가 저 혼자 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가끔 그리고 언뜻 만날 수 있는 에피퍼니 같은 것. 고요를 살기는 힘들고 고요가 되기는 불가능한 꿈이다. 고요에 인간의 체온이 묻는 순간 그것은 아연 적막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가령 이런 일이 있었다. 그곳 서해안 안면도의 푸른 소나무 숲에는 태초의 고요가 살고 있었다. 젊은 날 죽은 고등학교적 친구의 시비 제막식은 헌화로 시작되어 미망인의 인사로 끝이 났다. 슬퍼할 것, 추억할 것 저마다 챙겨들고 훌훌 떠난 뒷자리를 나는 오래 지켜보고 있었다. 고요가 적막으로 변하는 바람의 빛깔과 만져질 듯 아려오는 시간의 두께 앞에서 얼마나 망연했던가. 이승의 삶이란 고요와 적막 사이 가건물 지어 놓고 마른 풀잎처럼 부대끼는 것......이보게 친구, 쓸쓸해하지마. 가파르게 살다 먼저 간 시인의 목소리가 푸른 솔바람 저쪽에서 들리는 듯 하였다.
정비瀞飛
미당이 죽었다. 2000년 12월 24일 미당 서정주 선생이 먼 길 떠나셨다. 그날도 눈이 왔던가. 지난 겨울은 눈이 잦고 풍성했다. 눈이 잘 내리지 않는 이곳 대구의 앞 뒷산이 흰 도화지 깊숙이 가라앉은 설경을 자주 볼 수 있었으니까. 삼월이 다가도록 무주는 설국이라는 소식이 들렸으니까. 미당이 혼자 가는 그 먼 길에도 눈이 내렸을까. 기억이란 어줍잖은 것이다. 미당이 떠난 게 얼마나 되었다고 나는 그날을 컴퓨터에 물어야 한다. 미당을 두드리니 “12월 24일 하늘이 내린 모국어의 마술사 영면!”, “‘하눌나라’ 별이 된 부족 방언의 마술사 미당 서정주 선생이 운명하셨다. 지난 9월 황순원 선생의 작고에 뒤이어 우리 문학계의 큰 별이 다시 세상을 뜬 셈이다. 이로써 우리는 해방 이전부터 활동해온 대표적 원로 시인과 작가를 거의 동시에 잃어버렸다.”고 알려준다. 그 날 눈이 내렸는지 아니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하눌 나라로 혼자 가셨다.
당신도 지금의 나처럼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에서 목 메이시기를.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눈이 나리면 어이 하리야/봄이 또오면 어이 하리야//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서정주, 「푸르른 날」전문)
한 문학잡지 속에서 말년의 미당이 웃고 있다. 그 곁에 갈색 두루마기를 입은 중년의 선생이 댓잎을 만지며 엷게 웃고 있다. 그 아래 생가의 앞뜰에는 백일홍이 피어 있고 백일홍 그늘에 맷돌이 앉아 있고 아무도 없는 집을 여름 햇살이 지키고 있다. 선생의 웃는 모습은 참으로 불가사의하다. 기쁨과 슬픔이, 무거움과 가벼움이, 갈색과 노란색이 드러냄과 감춤이 묘하게 어우러진 웃음, 아마도 부족 방언의 빛깔이 저와 같은 것일까.
흰 수염이 꺼칠한, 시간에 침식되고 세월에 풍화된 선생의 모습은 적막하다.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러야 적막을 고요로 고쳐 쓸 수 있을까. 병상에 누워 선생이 드셨다는 이승의 마지막 음식, 맥주 몇 스푼. 시와 맥주 몇 스푼은 어떻게 다르고 어떻게 같은가. 높낮이가 있는가 없는가. 시를 쓴다는 게 무엇인가. 죽음 앞에서 시는 무엇인가. 눈이 나리면 어이 하리야 봄이 또오면 어이 하리야. 책을 덮고 나는 멍청하게 앉아 있다.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는 듯 심지가 다 닳은 촛불의 처연함 앞에 지금 나는 망연자실하다.
쉬이 펑퍼짐하게 인생론에 퍼짊어앉는 삼류와는 달리 가혹한 긴장의 삶을 견디어낸 고급한 예술가들의 발자취가 그와 같듯이 미당의 문학적 궤적 또한 적막에서 고요로 옮겨가는 노정으로 설명되지 않을까. <을마나 크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라운 몸둥아리(「화사」)>로부터 <서으로 가는 달같이는/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추천사」)>는 지상의 번민과 운명의 굴레, 육신의 감옥을 벗어나려는 안간 노력을 거쳐 <동지 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동천」)>는 자유자재의 천상에 이르는. 범박하게 말해서 피에서 이슬로, 무거움에서 가벼움으로, 지상에서 천상으로, 적막에서 고요로 이행하는 고단한 여정이 미당 상상력의 등뼈가 아닐까.
당신은 알겠지만 고요는 힘이 세다. ‘내 마음 속 우리님의 고운 눈섭을/즈문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하늘에다 옴기어 심어(「동천」)’ 놓을 수 있는 것이 고요이다. 누가 있어 지상적 삶의 무쇠덩어리를 눈섭처럼 가벼이 하늘로 옮겨갈 수 있단 말인가. 고요가 아니라면 새의 비행을 어떻게 저렇듯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단 말인가. 새의 비행, 그렇다, 고요는 정비瀞飛를 닮았다.
고요한 비상, 정지한 듯 날아가는 비행, ... 저 먼 북쪽 나라에 사는 새들은 추운 계절이 다가오면 한 철을 깃들일 따뜻한 곳을 찾아 아래로 아래로 남하한다. 그 중 한 무리는 시베리아에서 동쪽 해안을 타고 우리나라를 거쳐 동남아시아로 내려가고 다른 한 무리는 중앙아시아를 거치고 히말라야산맥을 넘어 인도 쪽으로 내려간다. 그런데 이 철새 무리가 높은 산이나 광막한 바다를 만날 때 취하는 비행법이 바로 ‘정비’이다. 새는 보통은 죽지에 연결된 가슴뼈의 움직임으로 비상하지만 아주 먼 거리를 여행할 때에는 가만히 날개를 펴고 기류에 몸을 맡긴 채 예정된 공간을 통과한다. 사실 조그만 새가 근육이나 뼈의 힘으로 그 높은 산맥을 넘을 수는 없을 것이다. 거대한 장벽과 맞닥뜨린 새는 경망스런 날개짓 대신 광대무변한 우주의 섭리에 몸을 의탁함으로써 목적을 성취한다.(남진우, 『올페는 죽을 때 나의 직업은 시라고 하였다』, 열림원, pp.181-2)
정비하는 새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그것은 고요의 화육化肉, 고요의 현실태이다. 고요는 히말라야산맥을 들어올리고 광대무변한 우주의 섭리를 자기화 한다.
고요의 남쪽
그러나 고요는 보이지 않는다. 몸도 마음도 없으므로 보이지 않고 몸도 마음도 아예 없으므로 그것은 영원하다. 그렇다하더라도 때로 그것은 시각적이기도 하고 촉각적이기도 하다. 비오는 날 그것은 향기이기도 하고 깊은 밤 그것은 별빛 스치는 광물질의 소리이기도 하다. 고요는 수평의 붉은 동물성이 아니라 푸른 수직의 식물성이다. 다시 그것은 타동사가 아니라 영원한 자동사이다.
고요의 남쪽엔 누가 살고 있을까. 어줍잖은 것이지만 내 시 두 편을 소개해야겠다.
육군 강병장을 만나러 간다 완주군 구이면 중인리 정자나무 근처에서 출발한 그 길은 논둑 밭둑을 지나 돌배나무 그늘을 가로지른다 초록에 막힌 산길은 물론 통화권이탈지역 솔방울 떨어지는 소리에 놀라는 것은 돌배나무 이파리나 날다람쥐만은 아니다 무르팍 깨지도록 그의 이름 부르며 물봉숭아 군단 곁을 지나거나 첨벙 첨벙 개울물 건널 때 깜짝 놀라 흩어지는 모래바람 같은 길들//모악산 어디에도 육군 강병장은 보이지 않는다 날다람쥐가, 계곡 물소리가, 낡은 군화 한 짝이 아주 오래된 문지방을 넘나들고 있다 (「통화권이탈지역」전문)
떡갈나무 그늘을 빠져 나온 길은/황토 산비탈로 자지러진다/차돌처럼 희고 단단한 고요/오직 고요의 남쪽만 방석만큼 비어 있다/길은 또 한번 황토 산비탈로 자지러진다/온몸에 고추장을 뒤집어쓴 어떤 애잔함이, 출렁/섬진강 옆구리를 스치는 듯도 하였다 (「고요의 남쪽」전문)
고요의 남쪽엔 모래바람 같은 길들이 살고 육군 강병장이 살고 아주 오래된 문지방이 날다람쥐와 물소리와 낡은 군화 한 짝을 데리고 산다. 고요의 남쪽에 가면 자지러지는 소리가 만든 황토길이 있고 어떤 애잔함이 온몸에 고추장을 뒤집어쓰고 있기도 하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때 그곳엔 잠시 내 적막의 물기를 휘발시키는 힘센 고요가 저 혼자 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가끔 그리고 언뜻 만날 수 있는 에피퍼니 같은 것. 고요를 살기는 힘들고 고요가 되기는 불가능한 꿈이다. 그곳은 통화권이탈지역이니까.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게 인생인 것을.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은 4월 21일 토요일, 집 아이가 군대간지 엿새 되는 날. 달라이 라마는 그해 오늘 이렇게 쓰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선량한 마음은 매우 중요하고 또 좋은 효과를 발휘하기도 한다. 자녀가 없는 가족이라 해도 가족간에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으면 평화로운 분위기가 넘쳐날 것이다. 하지만 가족 중 한 사람이 화를 내면 곧 집안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돈다. 좋은 음식이나 근사한 자동차가 있어도 평화와 차분함이 없어지고 만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물질보다 마음에 달려 있다. 물질도 중요하다. 그것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물질은 적절히 써야 한다. 이제 우리는 좋은 머리와 선량한 마음을 한데 합해야 한다.(『마음을 비우면 세상이 보인다』, 공경희 옮김, 문이당, p.85)
<마음은 중요하고...마음에 달려 있다>. 독자인 당신, 부디 이 평범한 가르침에 밑줄 긋기 바란다.
『The Path to Tranquillity』, 참 좋은 이름이다. 30년전 육군 강병장이 살고 있는 모악산 산정이 보인다. 얼음꽃 핀 겨울나무 가지 끝이 눈부시다. 연병장을 터덜터덜 들어서는 내 아이의 발길에 부서지고 흩어지던 그때 그 유리옷 입은 고요. 밤새도록 달려온 바람이 다시 먼길을 떠날 차비를 하고 있는지 소쩍새가 적막한 한식 경을 울고 있다.
고요는 허심과 친형제이다. 마음을 비우면 고요가 보이고 고요는 마음을 비우게 한다. 고쳐진 책이름에 딴지를 걸었던 것은 내 잠시 허심하지 못했던 탓, 마음을 비우면 정거장의 쓸쓸함이 잘 보인다고 고쳐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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