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곳의 잠입
무외시無畏施
‘내가 주를 믿는데 누가 나를 대적하리오’라는 말이 기독교 성경에 나온다. 모든 참종교는 본질을 보게 함으로써 ‘두려움’을 없애준다. 위 구절의 ‘주’는 진리의 다른 이름이다. 불교식으로 말한다면 ‘정견正見에의 도달이자 그와의 만남’이다. 바르게 볼 수 있으면 무서울 것이 없다. 이 우주 속에서, 우주의 몸 자체가 되어, 우주적 작용을 하는 우리들이 제집 같은 이 우주 속에 살고 있는데 무슨 무서움이 따로 있겠는가. 무서워하는 것은 우리들의 사심 때문이고, 무서운 것은 그 사심이 만들어내는 환영이다. 친구들에게 비싼 원두커피 한 잔 사주느니, 정견의 지혜를 선물하자. 커피를 마시면 수면에 방해가 되지만, 정견을 듣게 되면 하룻밤만이라도 편안하게 숙면하고 상쾌하게 새날을 맞이할 수 있다. (정효구)
▣볼노는 그의 책 <<인관과 공간>>에서 “일상에서 먼 곳은 가려져 있다. 그러니까 먼 곳은 항상 같은 방식으로 주어져 있지 않다. 먼 곳에서 부르는 소리를 들으려면 먼저 그를 일깨우는 특별한 사건이 필요하다. 쿤츠는 이것을 "먼 곳의 잠입"이라고 표현했다. ”고 쓰고 있다. 특별한 사건이란 상실의 경험이다. 텅 빈 자리에 먼 곳이 잠입한다. 먼 곳은 언제나 두려움의 신발을 신고 우리를 찾아온다.(강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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