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령산 청암사
경상북도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 688번지, 청암사를 찾은 날은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렸다.
산사의 단풍은 아름다웠다. 단풍 숲을 흐르는 계곡 물소리는 천상의 악기 소리를 내고 있었다.
불령산 기슭의 서기어린 산바람을 맞으며 나는 ‘절정’, 혹은 ‘극단’이란 어휘를 떠올렸다.
가을의 절정, 아름다움의 절정, 혹은 적막의 극단, 고독의 극단, 그 한 가운데 서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편지를 쓰고 싶었다. 손가락으로 두드리는 카톸 채팅 말고,
간절함의 절정, 그리움의 극단을 담은 만리장서의 편지를 쓰고 싶었다.
그러나 ‘가을엔 편지를 쓰겠어요/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로
시작하는 노래를 흥얼거리기에는 산사의 분위기는 무겁고 깊었다.
청암사 라는 이름의 근거인 바위를 덮은 푸른 이끼, 그 가뭇없는 무게감 때문이기도 했고,
수도산이 불령산으로 불리게 된 까닭이라 전해지는 부처님 광채의 후광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그보다는 옛날 그 옛날, 청암사 보광전에 엎드린 폐서인의 아픔, 인현왕후의 간절한 기도 때문에 그러했을 것이다.
청암사는 숙종 15년(1689) 기사환국 때 장희빈의 무고로 폐서인이 된 인현왕후가 3년 동안 머물며 복원을 기원하던 역사의 현장이다. 이 심산유곡 산사에서 3년간을 머물다 복위 되어 궁으로 돌아간 한 왕비의 애환은 어떤 것이었을까. 궁으로 돌아간 왕비는 큰스님 기도의 영험으로 내가 복위되었다는 내용의 서찰을 보내 고마움을 전한다. 향, 비녀 등 신물 세 가지를 보낸다는, 먹지에 금자로 써 보낸 인현왕후의 서찰은 3, 4년 전 산내 암자인 백련암에 전해 내려오던 것을 최근에 노스님이 발견, 직지사 성보박물관으로 보내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인현왕후는 환궁 후 청암사 주변 수도산을 국가보호림으로 지정함과 동시에 사찰에 전답을 내리기도 한다. 극락전을 중창할 때 나온 시주록에는 궁중 상궁들의 이름이 26명이나 올라 있어 인현왕후로부터 비롯된 청암사와 왕실과의 인연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인연으로 조선조말까지 상궁들이 수시로 청암사에 내려와 신앙생활을 했다고 하는데, 영친왕의 보모로 김천고 설립자인 최송설당도 청암사 중창 불사를 위해 사찰에 많은 토지를 희사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인현왕후가 기거하며 복위를 기원하던 곳이 극락전이다. 극락전은 대웅전과 개울을 사이에 두고 있다. 폐서인이 된 인현왕후는 지금의 극락전 자리에 축각(祝閣)을 짓고 복위 기도를 올렸다 하는데, 비록 서인이 되었지만 국모였던 인현왕후를 예우하기 위해 지금의 극락전을 별도로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일 것이다. 극락전은 여느 사찰 건물과는 달리 사대부가의 집처럼 솟을대문이 있다.
극락전 뒤편 보광전은 인현왕후의 복위를 기원하는 원당으로 건립되었다. 폐전되었다가 고종 광무 9년(1905) 대운과 응운 두 승려가 새로 건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내부에는 42개의 손을 지닌 관음보살을 주불로 모시면서, 양쪽 측면으로 산신, 독성(獨聖), 신상탱화를 모신 복합적 용도를 지닌 곳이다. 일제 강점기에 건립된, 전통수법으로 지어진 건축물로서 다포(多包)양식과 익공(翼工)양식이 절충된 것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 말기에서 일제강점기로 넘어가는 전환기의 견축양식의 변천을 보여주는 자료로서 가치를 가진 건물이다.
청암사는 불령산 북쪽 해발 600미터 기슭에 자리 잡은 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 소속 말사이다. 직지사와 함께 김천을 대표하는 사찰이다. 신라 헌안왕 3년인 859년에 도선이 처음 설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조 25년과 정조 3년에 각각 화재로 전소되는 피해를 입었으나 재건되고, 1897년 폐사되었다가, 1900년대 초에 극락전을 복원하면서 다시 문을 열었다. 1911년에 화재로 또 다시 소실되어 이듬해 주지인 대운(大雲)이 복구했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20호로 지정된 대웅전을 비롯하여 경북 문화재자료 제121호로 지정된 대웅전 앞 다층석탑, 강원으로 이용되던 육화전(六和殿), 진영각(眞影閣), 종각으로 사용되고 있는 정법루(正法樓), 일주문(一柱門), 사천왕문(四天王門), 비각(碑閣), 객사 등이 있고, 계곡 건너 100m 지점에는 극락전(極樂殿), 보광전(普光殿), 요사채 등이 있다. 이 절의 부속 암자로는 유명한 수도도량인 수도암(修道庵)과 1905년에 비구니 유안(有安)이 창건한 백련암(白蓮庵)이 있다.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121호인 대웅전 앞 석탑은 아무리 보아도 자세가 불안하다. 대운대사가 성주의 논밭에 버려져 있는 것을 옮겨와 세웠다는 이 석탑은 1층 4면의 몸돌에 암실을 만들고 불상을 양각으로 새겼다. 탑 높이가 4.2m에 이르나 지붕돌에 비해 탑신이 약해 불안전하게 보인다. 3층 석탑, 5층 석탑과는 달리 흔하게 볼 수 없는 4층 석탑의 불안전함이 왜 내게는 폐서인이 된 인현왕후의 불안한 마음과 겹쳐보이는 것일까?
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기도의 표상이다. 장희빈의 모함으로 폐서인이 된 인현왕후의 궁궐을 향한 나날은 억울함의 절정, 불안의 극단이었을 것이다. 복위를 기약할 수 없는 기도, 그 불안의 극단이 어쩌면 대웅전 앞 4층 석탑을 닮았으리라.
청암사는 조선 때부터 불교 강원으로 명성을 얻었다. 강원의 효시는 조선 중기 때 회암 정혜조사가 선원과 강원을 설립하면서 비롯됐다. 당시 청암사에 운집한 학인이 300여 명에 달했다. 이후에도 강원으로의 명성은 계속 이어져 일제강점기 때 박한영(朴漢永) 강백(講伯)이 강론할 때는 학승 수가 200여 명에 이르렀고 강고봉(姜高峰) 강백이 가르치던 1975년까지도 매년 40여 명에 달했다. 현재 강주인 의정지형(義淨志炯) 스님이 1987년 청암사비구니승가대학을 설립하면서 현재 100여 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수행, 정진하는 도량으로서 옛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오전 수행을 마친 스님들이 점심 공양을 위해 산사의 뜰을 거닐고 있었다. 묵언 포행의 발길 위에도 낙엽이 지고 바람이 스쳤다. 저 비구니 스님들의 정진 수행, 기도의 끝은 어디일까? 저들이 마음속에 쌓고 있는 탑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세속의 인연을 버리고 윤회의 업보를 넘고 넘어 저들이 닿으려 하는 탑신 저 너머 하늘의 빛깔은 어떤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가벼움의 절정, 고요의 극단이 아닐까?
천년 바위에 새겨진 사람들의 이름, 나를 알아봐 달라는 저 잘난(?)사람들의 이름, 왜 사람들은 남루한 행적을 새겨 산사의 몸을 아프게 하는 것일까. 그것이 부질없는 일을 알기까지 얼마나 많은 정진수행이 필요한 것일까. 세속의 욕망을 말끔하게 지워버릴 수 있다면 우리 사는 세상은 얼마나 청정할까.
코샘이라고도 불리는 우비천(牛鼻泉)은 천왕문 곁 오솔길 가에 있는 옹달샘이다. 청암사가 번창하고 나라가 태평성대일 때는 우비천의 물이 넘쳐흘렀다고 한다. 청암사 자리는 소가 왼쪽으로 누워 있는 와우형 형상이라 한다. 대웅전 자리가 소의 뿔이고 이 옹달샘은 소의 코에 해당하는 데 물이 마르면 소의 코에 병이 생긴다고 한다. 소의 목에 해당하는 천왕문 앞에 다리를 놓고 찻길을 낸 뒤부터 소가 아파 우비천의 샘물이 말랐다는 것. 또한 샘물을 마시면 부자가 된다는 속설이 있어 물욕을 경계해야 하는 스님들은 샘 앞을 지날 때 고개를 돌리거나 부채로 가려 외면했다는 말이 전한다.
가을 비 덕분인지 우비천 맑은 물은 나그네의 갈증을 해결하주기에 넉넉했다. 나는 언제쯤이면 고개를 돌리고 부채로 눈을 가리며 우비천을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일주문을 나서려는데 누군가의 부음을 알리는 문자가 왔다. 죽음이란 떠나는 자에게는 삶의 극단이겠지만 보내는 자에게는 슬픔의 절정이리라.
가을의 절정, 적막의 극단을 일깨워 준 청암사 풍경을 담은 편지를 쓰고 싶었다. 간절한 편지는 기도일 터. 아직도 내 간절함은 턱없이 모자라서 편지를 보낼 마땅한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 바람이 불고 지는 낙엽이 어깨를 쳤다. 낙엽은 하늘이 지상에 띄운 편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간절한 기도의 극단은 영원을 사는 탑이 된다고, 누구나 마음속에 자기만의 탑 하나 세워야 한다고, 열정과 극단의 기도 속에 살아야 한다고, 청암사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가 하늘의 편지를 읽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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