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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응접실

오래 사랑한 당신

by 고요의 남쪽 2009. 7. 1.

오래 사랑한 당신/김용택


나뭇잎이 필 때도 나는 나무 곁에 서 있었습니다.

비가 올 때도 나는 나무 곁에 서 있었습니다.

잎이 질 때도 나는 나무 곁에 서 있었습니다.

나는 눈이 내리기 전과 눈이 내릴 때와 눈이 내린 후에도 나무 곁에

서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 나무도 내 곁에 서 있었습니다.

해 지면 강가에 나가 뒷짐지고 나무에 기대서서 바라본

그리운 저 강물,

나는 오래도록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흘러 흘러서 강물은 어디로 가나? 라고 묻지 말자. 강물은 흘러 오래도록 사랑한 당신이 살고 있는 마을에 이르리라고 생각하지도 말자. 강물의 흐름이 바다에서 멎는다고 말한다면 더더욱 싱겁다. 행방이 확연하면 향기가 없다. 향기 없는 당신을 시인이 그토록 오래 그리워하겠는가. 오랜 세월 시인이 그리워하는 것은 지향 없는 흐름, 흐름 그 자체가 환기하는 강물의 순수태(純粹態)일 터이다. 내 곁에 서 있는 나무도, 해 지면 뒷짐지고 나무에 기대선 시인도 저 강물처럼 그렇게 존재의 본연으로 하염없다. 그러면 시인이 오래도록 사랑한 당신은 누구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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