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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응접실

정오

by 고요의 남쪽 2009. 6. 30.

정오/조말선


오븐의 채널이 정각에서 멎는다

늦은 아침이 다 구워졌다

꽃나무 밑에서 놀던 적막은 바싹 익었다

밀가루에 버무려진 세상이 거짓말같이 부풀어오르는 시각

우체부가

벌겋게 달아오른 우체통을 열고

뜨거운 편지를 꺼낸다

삼십 분전에 넣은 편지가 벌써 익다니!

생의 한나절을 다 읽기도 전에

나는 또 숙성되었다


*정오에 시계바늘은 하늘을 향해 꼿곳이 선다. 꼿꼿이 선 시간의 심리 상태는 주인을 만난 악기처럼 그대 손이 닿는 순간 깊고 뜨겁게 울릴 태세이다. ‘오븐의 채널이 정각에서 멎는다’는 것은 시간의 열선이 한껏 달구어졌다는 뜻; 만상은 정오의 시계바늘에 닿자마자 구워지고, 바싹 익고, 뜨겁게 달아오른다. 그러나 시인은 편지가 벌써 익었다고, 한나절을 다 읽기도 전에 나는 또 숙성되었다고 능청을 떤다. 무료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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