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승달/김정용
이미 오래 전 나는 가슴 한쪽을 뜯어냈다
더는 상하지 말라고 던져버렸다
남은 가슴으로도 충분히 아플 수 있으므로
돌연 추억이란 게 필요할 때
피도 눈물도 나질 않는 세상살이라
느껴질 때, 그런 내가 대낮인데도
하늘을 훔쳐보게 될 때
남은 가슴을 퍽퍽 치면
등뒤의 어둠이 갈라지며
어둠이 토해낸 비명처럼 떠오를 것이기에
머잖아 내게도 그런 날이 잦을 때
꺼내와서 채워보리라
남은 가슴이 받아들일 힘이 있는지
꺼내와서 맞춰보리라
* <돌연 추억이란 게 필요할 때>의 “돌연”은 <피도 눈물도 나질 않는 세상살이>의 고통을 강화하고, 남은 가슴이 왜 충분히 아파야 하는 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어둠이 토해낸 비명이라니, 초승달이 상하지 말라고 뜯어낸 한 쪽 가슴이라니! “비명”은 어둠의 각질을 뚫고 일어서는 삶의 경이임을 그대는 안다. 초승달이 망가진 기계의 맞은 편이 듯 그것은 딱딱한 죽음의 반대말인 것, 남은 가슴으로 충분히 아파야 하는 이유 아닐까. 머잖아 우리에게 그런 날이 잦을 때 추억을 받아들일 힘이 있는지?
<보유>
머잖아 내게도 그런 날이 잦을 때
강 현 국
그는 물푸레나무 밑에 앉아 있다. 앉아 있기보다는 서성일 때가 더 많을 듯하다. 물푸레나무 밑에는 노트북 컴퓨터가 있고 난해하기 짝이 없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참 편안하게 처박혀 있다. 보험에 들지 않은 봉고 차가 물푸레나무 밑에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다. 나는 언젠가 낡은 그의 봉고 차 속에서 잔액이 바닥난 대구은행 통장을 본 적이 있다. 그의 세상살이 이력을 그러나 나는 잘 모른다. 한 동네 사람과 함께 죽염공장을 하다가 망했다는 말도 있고 족발 배달을 하다가 소매점과 다투고 그만두었다는 말도 있다. 한 며칠 막노동을 해서 몇 푼 생기면 그 돈 다 까먹을 때까지 프루스트를 챙겨들고 잠적하는 것이 오래된 버릇이란 말도 있기는 하지만 확실치 않다.
나는 그가 양복을 입은 것을 딱 한번 본 적이 있는데 정장차림이 그렇듯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다시 있을까 싶었다. 짐작컨대 그의 세상살이 또한 어울리지 않는 정장차림 같은 것이 아닐까. 일용할 양식을 위한 세상살이가 그에게는 더없이 불편해 보인다. 미래의 신부가 부지런히 열 평 남짓한 홀과 주방을 오가며 땀 흘릴 때에도 그는 잠적할 기회만 엿보는 듯한 표정이 역력한 것이다. 실직이 몸에 익었거나 체질에 맞는 듯 그가 주인인 우리 밀 국수집 이름을 물푸레라고 써 붙여놓고, 이제 보니 물푸레나무 가지 끝에 초승달을 매달아 놓고, 자신이 무슨 은퇴한 신사나 되는 듯,
개를 끈 한 늙은이
오래된 의자에 등을 맡길 때
비로소 지상 한쪽이 안심된다
-「오래된 의자에 등을 맡길 때」부분
며 딴전을 피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껏 이 달에 내가 읽은 작품에 대해서가 아니라 이 달에 내가 읽은 작품을 쓴 시인 김정용에 대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하고 있다. 그의 세상살이 이야기는 가슴 한 쪽을 뜯어내어 던져버릴 수밖에 없는 「초승달」의 시적 정황과 무관하지 않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김정용의 아름다운 시「초승달」은 <남은 가슴>의 입장에서(‘남은 가슴으로도 충분히 아플 수 있으므로-남은 가슴을 퍽퍽 치면-남은 가슴이 받아들일 힘이 있는지’와 같이 각 연에 배치된 구절들을 보라)한 쪽 가슴을 뜯어낼 수밖에 없는 가난한 시인의 일상을 애잔하게 말한다. 제 몸을 뜯어내는 비극적 자기 인식을 애잔하게 말한다고? 제목인 초승달만큼 내게는 애잔하게 읽힌다.
이미 오래 전 나는 가슴 한쪽을 뜯어냈다
더는 상하지 말라고 던져버렸다
남은 가슴으로도 충분히 아플 수 있으므로
그 애잔함은 위의 인용을 두고 말한다면 <이미 오래 전/더는/충분히>와 같은 부사어에 힘입은 것이다 (「초승달」은 전편에 걸쳐 부사어의 적절한 활용이 무엇보다 돋보이는 작품이다) . 부사어의 느림이 <뜯어내다>, <던져버리다>와 같은 동작 동사의 가열함을 완화시키고 <충분히>의 넉넉한 울림이 <아플 수 있다>는 사실을 오히려 안심되게 만드는 최면의 효과를 발휘한다. 뿐만 아니라 적절하게 쓰여진 부사어들은 그의 고통이 이미 오래 전 가슴 한쪽을 뜯어냈을 정도로 <해묵은> 것이고, 더는 상하지 말라고 던져버릴 정도로 <지속적>인 것이고 남은 가슴으로도 충분히 아플 만큼 <고질적>인 것임을 환기해준다. 나이를 알 수 없는 고통의 해묵음, 끝이 안 보이는 아픔의 지속성, 아프기 위해 태어난 것 같은 생래적 고통을 시인은 어떻게 넘어서는가?
그는 자아의 해체를 통해 고통의 끝간데에서 기다리고 있는 암울한 죽음을 유예시킨다. 망가진 기계의 부품처럼 가슴 한 쪽을 <뜯어내어> 뜯어낸 그것을 팔매질하듯 <던져 버린다>. 하늘로. 그러나 시인은 하늘로 도망가지 않고 땅에 남아 아픔을 먹고살기로 한다. 언제까지? 돌연 추억이란 게 필요할 때까지.
돌연 추억이란게 필요할 때
피도 눈물도 나질 않는 세상살이라
느껴질 때, 그런 내가 대낮인데도
하늘을 훔쳐보게 될 때
남은 가슴을 퍽퍽 치면
등 뒤의 어둠이 갈라지며
어둠이 토해낸 비명처럼 떠오를 것이기에
김정용은 언젠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추억>이란 말을 들으면 왠지 차멀미 나듯 속이 니글거린다고. 그런 그에게, 그럴 수 있는 시인에게 추억이란 게 필요할 때, 그것은 <돌연>일 것이다. 그런 그가 <대낮인데도/하늘을 훔쳐보게 될 때>를, 가요의 어법으로 말하건대 추억에 잠길 때를 상정하는 것 또한 <돌연>이다. 돌연 이라는 말은 <피도 눈물도 나질 않는 세상살이>의 고통을 강화해주고, 남은 가슴이 왜 충분히 아파야 하는 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피도 눈물도 나지 않는 세상살이란 물화된 삶의 그것이다. 물화된 삶, 그 고통의 극단에서 그는 비로소 이미 오래 전에 뜯어내어 던져버린 한 쪽 가슴을 만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비명처럼 떠오르는 밤하늘 초승달을 만날 수 있으리라 믿는 것이다. 그런데 그 밤하늘은 산 위에 있지 않고 뜯어내고 남은 시인의 가슴속에 있다. 그가 기다리는 초승달은 산 위에서 떠오르지 않고 어둠이 토해낸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얀 침묵이 아니라 검붉은 비명이다. 김정용의 초승달은 천체의 일원이 아니라 피도 눈물도 나지 않는 세상살이의 가족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초승달에서 비명소리를 듣다니. 비명소리를 듣기 위해 한 쪽 가슴을 뜯어내야 하다니. 그렇다하더라도 <비명>은 어둠의 각질을 뚫고 일어서는 삶의 경이이다. 초승달이 망가진 기계의 맞은 편이 듯 그것은 딱딱한 죽음의 반대말이다. 남은 가슴으로 충분히 아파야 하는 이유 아닐까.
머잖아 내게도 그런 날이 잦을 때
꺼내와서 채워보리라
남은 가슴이 받아들일 힘이 있는지
꺼내와서 맞춰보리라
김정용의 「초승달」은 이렇게 끝난다. 남은 가슴이 받아들일 힘이 있는지 없는지를 따지는 일은 부질없겠다. <더는 상하지 말라고 던져버렸>던 한 쪽 가슴이 본질적 자아라고, 시인의 꿈이라고 테두리를 치는 것이 그러하겠듯이. 우리는 누구나 대낮에도 하늘을 훔쳐보게 되는 <머잖아 내게도 그런 날이 잦을>것이므로. 물푸레나무 밑 시인의 공복과 결여의 등가물인 오래된 의자에 등을 기대어 보는 것으로 족하지 않겠는가. 앞에서 말했듯이 잔액이 바닥난 대구은행 통장을 어찌할 수 없는 시인이 채워보고 맞춰볼 수 있는 <꺼내올 거리>를 저축해두고 있다는 사실이 퍽 애잔하지 않은가. 그것도 때묻은 손 닿지 않는 아주 먼 곳, 세상에서 가장 높은 물푸레나무 가지 끝 어디쯤에 감춰두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