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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연구원chaii

[스크랩] 초간종택

by 고요의 남쪽 2012. 5. 16.

<6> 초간종택
평생을 바쳐 우리 역사 지킨 초간선생 목소리 들리는 듯
기사 입력시간 : 2012-05-15 20:36
“도둑이 들까 늘 걱정이여”
초간 선생의 13대손 권영기 옹이 대동운부군옥을 보관한 서고를 열면서 무심코 던진 말이 었다. 그 말이 내게는 무심하게 들리지 않았다. 날로 늘어나는 문화재 털이의 교묘한 수법을 걱정하는 것이었겠지만 권 옹의 탄식은 한 개인의 푸념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궁핍을 향해 던지는 역사의 아픈 메시지로 들렸다. 내 무의식은 400여년전 초간 선생의 목소리를 환청으로 듣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도둑맞고 있지 않은가! 소중한 민족적 자산을 잃어버리고, 마땅히 지켜야 할 가치와 윤리를 잃어버리고, 혼란과 암울로 덧칠된 나날을 살고 있지 않은가!
경북 예천군 용문면 죽림리 166번지. 초간종택을 찾았을 때 나는 문화재 털이보다 더 큰 걱정은 ‘망각이라는 이름의 도둑, 무관심이라는 이름의 도둑, 세월이라는 이름의 도둑’앞에 무방비한 세태라는 아픈 깨달음에 전율했다.


초간종택은 초간 권문해(1534~1591)의 조부인 권오상이 임진왜란 이전에 건축한 것으로 전해지는 묵중한 기와집이다. 넓은 들판 너머 아미산이 나지막하게 누워 있다. 오른쪽 앞으로 돌출한 사랑채(보물 제457호)는 높은 기단 위에 짓고 난간을 돌려 누(樓)집 모양으로 꾸몄다.
왼쪽 ‘ㄱ'자 모양의 안채도 높은 기단 위에 지었는데,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 앞에 여러 계단을 설치하여 건물 전체가 높고 웅장해 보인다. 사당은 안채 오른쪽 뒤편에 있다. 사당의 문틀 중앙에 수직으로 중간설주가 서 있는데, 그 단면이 T자형으로 문받이를 겸하고 있다. 보존상태가 우수하고 조선시대 주택구조와 양식연구에 중요한 자료이어서 1984년 중요민속문화재 제201호로 지정된다.
초간종택에는 이 나라 최초의 인물사전으로 알려진 예천권씨종가문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70호)이 있다.
또 권문해 선생의 자필일기인 초간일기(보물 제879호)가 있고 초간종택 별당(보물 제457호)이 있다.
‘백승각’에는 지식의 바다로 알려진 보물 878호로 지정된 그 유명한 ‘대동운부군옥’의 판목 677매가 소장되어 있다. 초간종택은 보물로 가득한 문화재의 숲이었다.
문화재란 무엇인가. 문화재는 문화와 풍속의 근거이며 민족의 지혜와 생의 철학이 스며있는 상징이자 기호이다. 다시 그것은 역사의 풍향계이자 그 문화를 산 사람들의 혼이 숨 쉬는 실체적 공간이다. 나는 당연히 초간종택이 말해주는 당대의 풍향과 조선조 학자이자 관료였던 초간 권문해(1534~1591)선생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전언이 궁금했다.
‘해동잡록’과 초간의 나이 26세 때인 ‘명종 14년(1559)의 기사’에 의하면 국학 지식의 바다이자 한국학의 연원이라고 말해도 좋을 만한 대동운부군옥의 편찬은 “나는 일찍이 동국의 진신(搢紳) 선생들이 우리 역사서는 읽지 않고 중국 사서를 읽기 좋아하며 상하 수천 년의 시간을 종횡 관통하여 빠뜨리는 것이 없지만 동사(東史)에 대해 물어보면 망연히 알지 못함을 괴이하게 여겼다. 사리에 당연하지 못한 점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초간 권 승지공은 홀로 많은 서책에 극히 해박하되 우리나라 일에 더욱 유의해서 빠진 것 없이 망라하여 음씨(陰氏)의 구례를 쫓아서 사실을 운(韻)자 아래 배열하여 20여권을 엮고 이름하여 ‘대동운부군옥’이라 하였다.”(海東雜錄跋)

“일찌기 감정공(監正公, 초간의 아우-인용자)에게‘우리나라의 풍토는 박루해서 문헌이 갖추어지지 못했다. 선비된 사람들이 중국 사적을 이야기하는 데는 역대의 치란흥망을 마치 어제 일처럼 말하지만 동국의 사실에 이르러는 상하 수천 년을 서계(書契)이전처럼 아득할 따름이다. 이는 자기 눈앞에 물건은 보지 못하고 시선을 천리 밖에 두는 식이다’고 말씀하셨다. 드디어 동국의 여러 사서 및 기타 서책에 나타난 사적들을 널리 고구하였다. 또한 역사가의 황루함을 병폐로 여긴 나머지 야승(野乘)을 갖추어 볼 뜻을 가졌다.”

‘해동운부군옥’의 편찬 취지와 그 의지가 각각 위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중국의 사실에는 해박하고 자국의 역사에 무지한 풍조를 극복하기 위한 학자적 양심과 학문적 노력이 ‘해동운부군옥’을 낳았던 것이다.
남의 것에 탐닉한 나머지 제 것을 잃어버린 당대 역사가의 황루한 병폐, 그 정신적 사대주의의 거센 물결을 거스르려는‘야승’의 노력이란 얼마나 힘든 것이었을까. 26세에 뜻을 세워 56세에 완수한 실로 30년 적공의 결실이었다.
위로 단군에서 아래로 명종조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 사이의 사적을 종횡 관통해서 번거러움을 깎아내고 간추려서 뽑아 만든 ‘대동운부군옥’은 무려 2만여 항목에 이르는 성어(成語)들의 전거를 낱낱이 수록하고 있을 뿐 만 아니라, 따로 서술된 인명이 1,700조목, 또 지리, 국호, 성씨에 화목, 금수 등 명사까지 포괄한 말 그대로 ‘東史에 빠진 것 없이 망라’한 백과사전이라 할만하다.
190종의 문헌에서 2만 항목의 성어를 추출하는 것은 규모의 방대함 뿐 만 아니라 실로 정밀한 독서를 요하는 작업이었을 터 ‘동문선’과 같이 관학의 전통에서 국가적 사업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한 학자의 개인적인 저술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들만큼 방대한 작업이었다.

조선조 해좌 정범조(1721~1801)는 이 책 편찬과정상의 세 가지 어려움(三難)을; 1난-문헌 수집의 광범위 2난-공력을 전일하게 들인 점 3난-견식의 정밀함이라 지적했다.
인물과 성씨의 집적, 지리 정보의 취합, 풍속 정보의 축적, 물명(物名) 정보의 수집, 각종 정보의 통합, 유교 이념의 확산 등을 운서의 형식으로 만든 이 책을 일러 역사서로는 ‘서경’,‘춘추’, 인물지로는 ‘명신록’, 문학과 예술로는 ‘예문지’와 같다는 찬사를 보내고 있다.
초간의 생애는 ‘대동운부군옥’편찬을 위한 일생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듯하다.
초간 권영해는 1560년 27세의 젊은 나이로 급제한다. 벼슬에 나아가 1591년 돌아갈 때까지 30여 년간 내외 관직을 역임한다. 내직으로는 성균관 춘추관 등으로 외직으로는 안동부사, 공주목사, 대구부사 등을 거친다.
내직보다 외직을 떠돈 그의 벼슬길은 학문이론에 대한 탐구보다는 현실의 실상 파악과 실천의 세계로 나아가는 바탕이 되고 그의 현실에 대한 관심은 우리 것에 대한 남다른 애착으로 나타난다.
무오사화 때 32세의 젊은 나이로 죽임을 당한 문장과 절의가 뛰어났던 증조부 권오복으로부터 이어받은 가학의 전통, 벼슬에 나아가기 전에 가르침을 받은 스승 이황의 영향 등은 학문에 대한 개방적이고 통섭적인 태도를 취하면서도 근본적으로 유가의 가치를 지키려했던 초간 정신의 자장이자 생애를 지탱해준 가르침이 되었다.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민족의 정신과 자국의 역사를 지키려 했던 안간 노력은 선조 20년(1587년) 7월 1일부터 선조 23년(1590년) 4월 6일까지 대구부사에 재임한 기간 동안 작성한 그의 ‘초간일기’에서도 잘 드러난다.

선조 22년(1589) 7월 11일 일기는 전라도 나주의 어느 한 촌가에서 일어난 일을 꼼꼼히 적고 있다.

“11일. 무자년과 기축년 사이에 전라도 나주의 한 촌가에 뽕나무에서 털이 났는데 그 모양이 마치 사람의 수염과 같았다고 한다. 베어내면 다시 자라서 그 길이가 몇 자[尺]나 되었고, 계속해서 베어내도 또 다시 자라서 끝이 없었다. 이렇게 하기를 여러 달 계속하니 그 집 사람이 괴상하게 여겨 즉시 그 뽕나무를 베어버렸다고 한다.”(초간선생무지 권4)

‘초간일기’는 대동운부군옥 편찬을 위한 사전 비망록, 또는 정리 노트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권문해 선생이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 등의 국학 지식에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매일 매일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것이 ‘초간일기’이고, 이를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정리한 것이 ‘대동운부군옥’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일기라는 것이 개인의 삶의 세목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기록이라면 초간일기는 우리 문화와 우리 역사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한 개인의 공적기록이다.
내 것을 지키기 위한 초간의 노력으로 결실을 맺은 ‘대동운부군옥’을 통해 우리는 오늘을 비추어 보고 내일의 갈 길을 헤아릴 수 있겠다. 더더욱 국경 없는 글로벌 시대이고 보면 초간 권영해 선생의 발자취는 얼마나 값진 가르침이겠는가.

오랜 나그네 생활에 주머니는 비었고/ 근심만 많고 병들어도 배불리 먹지 못하네//
마음은 한강물과 같이 먼 곳으로 가고/ 눈에는 남쪽 아득한 고향의 구름만 들어온다//
흰 머리를 빗으니 더욱 헝클어지고/ 거울 속 붉은 얼굴은 쇠락하였네//
돌아갈 짐을 언제나 쌀 것인가/ 천 리 먼 곳의 내 집만 꿈꾼다.//

지방수령으로 전전하는 나그네 생활을 노래하고 있는 <洛城客中偶吟> 또한 내 것을 지키려는 내 집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개인의 뿌리와 민족의 근원을 도둑맞지 않으려는 한 선비의 애절함으로 읽히는 이유가 거기 있다.
강현국 시인ㆍ녹색문화컨텐츠개발연구원 이사장


사진-경북 예천군 용문면 예천권씨 초간종택의 보물 제878호 대동운부군옥 책판 .
출처 : 녹색연
글쓴이 : 강현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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