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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응접실

천양희의 시 두 편

by 고요의 남쪽 2011. 2. 26.

어제

 

내가 좋아하는 여울을

나보다 더 좋아하는 왜가리에게 넘겨주고

내가 좋아하는 바람을

나보다 더 좋아하는 바람새에게 넘겨주고

 

나는 무엇인가

놓고온 것이 있는 것만 같아

자꾸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너가 좋아하는 노을을

너보다 더 좋아하는 구름에게 넘겨주고

너가 좋아하는 들판을

너보다 더 좋아하는 바람에게 넘겨주고

 

너는 어디엔가

두고 온 것이 잇는 것만 같아

자꾸 뒤를 돌아다본다

 

어디쯤에서 우린 돌아오지 않으려나보다

 

*빈 손바닥의 평화; 자연의 순리를 다라 흐르는 상실의 여울물 소리 들리는,,,

 

우표 한장 붙여서

 

꽃 필 때 널 보내고도 나는 살아남아

창 모서리에 든 봄볕을 따다가 우표 한장

붙였다 길을 가다가 우체통이 보이면

마음을 부치고 돌아서려고

 

내가 나인 것이 너무 무서워서 어제는

몇 정거장을 지나쳤다 내 침묵이 움직이지

않는 네 슬픔 같아 떨어진 후박잎을

우산처럼 쓰고 빗속을 지나간다 저 빗소리로

세상은 여위어가고 마음도 늙어

허리가 굽었다

 

꽃 질 때 널 잃고도 나는 살아남아

은사시나무 잎사귀처럼 가늘게 떨면서

쓸쓸함이 다른 쓸쓸함을 알아볼 때까지

헐한 내 저녁이 백년처럼 길었다 오늘은

누가 내 속에서 찌륵찌륵 울고 있다

 

마음이 궁벽해서 새벽을 불렀으나 새벽이

새, 벽이 될 때도 없지 않았다 그럴 때

사랑은 만인의 눈을 뜨게 한 한 사람의

눈면 자를 생각한다 누가 다른 사람

나만큼 사랑한 적 있나 누가 한 사람을

나보다 더 사랑한 적 있나 말해봐라

우표 한장 붙여서 부친 적 있나

 

*내 마음 속에서 찌륵찌륵 나를 찌르는 것은 죽은 너이자, 살아남은 나이다. 저 빗소리로 세상은 여위어가고 마음도 늙어 허리가 굽을 때, 사랑만이 회한을 달랠 수 있으리. 꽃 피고 꽃 질때 떠난 너에게, 살아남은 자의 마음을 부치는 바로 그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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