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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이장욱

by 고요의 남쪽 2010. 10. 18.

 

한 남자가 벌거벗은 채 누워 있어.

어디에? 우리 집 욕실에.

죽었나?

죽었다.

악어는 좋아했나?

20세기 소년은?

장래희망은?

 

나는 잠시 외출했다가 돌아왔을 뿐인데

난데없이

인생이 깊은 늪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악가 된 것 같아 .

깊숙이

더 깊숙이

습한 욕실의 보이지 않는 곳으로

 

우리 집 욕실에 죽어 있는 남자는

아름다운 몸을 가지고 있더군요.

희고

차갑고......

점점 더 부풀어 올랐습니다.

 

시체는 괄호 속에 넣어둘 수가 없다.

팔이 툭 튀어나오고

자꾸 혀를 내민다.

동거냐,

사육이냐,

사물이냐,

 

나는 갑자기 뛰어나가 대문을 열었다.

미친 듯이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외치고 선언했다.

악어이 꼬리가 사라지도록

시체가 토막토막

거리로 흩어지도록

누구나 만져볼 수있도록

공기처럼

늪처럼

 

*"죽었나?/ 죽었다." 이 사실이 화자를 "난데없이" 깨닫게 만든다. "인생이 깊은 늪이라는 것을". 그 사실을 여태껏 모른 척 해왔거나, 전혀 알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이 남자와 마주치기 전으로 되돌아갈 수가 없다. 왜냐하면 "시체는 괄호 안에 넣어 둘 수가 없"기 때문에.(장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