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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의 빈터

첫사랑

by 고요의 남쪽 2009. 5. 20.

첫사랑



부끄러움에 대한, 부끄러움을 위한

  대학 시절, 나는 연극을 한 적이 있고 경북대학교 정문 앞에서 학사주점 델레스망을 경영(?)한 바 있다. 그저 그렇고 그래서 강의가 시들한 날이면 꽃시계 앞을 지나가는 여학생들에게 동전을 구걸하여 막걸리를 마시는 뻔뻔스러움을 자행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찬물 끼얹은 도서관에 태연자약 참새를 날려 한 순간의 아연실색 풍지박산을 낄낄거리기도 하였다. 물론 그 사건으로 하여 취사장 뒤로 불려나가 제주도 출신 이병진 병장에게 밤새도록 죽어라하고 두들겨 맞긴 하였지만, 육군 이등병 시절 부대 피서지 오락회에서 사회를 맡은 나는 대대장 부인에게 노래를 시키려다 여의치 않자 하늘같은 그 여자를 껴안고 뒹구는 가당찮은 잘못을 범한 일도 있다. 어디 그 뿐이랴. 대구 문화방송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하며 수년 동안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방송국 카메라를 노려본 적도 있다. 하지만 한 껍질 벗기고 보면 나는 당신 생각보다 유약하고 부끄러움을 잘 타는 남자이다.


동전 한 닢이 떨어진다.

경쾌하고 정중하게,

여보세요---

---희망 없이 기다려요

철벽을 꿰뚫은 내 말의 순수함

순수하므로 갇힌다.


돌아가지 못하는 캄캄한 밤에

힐끔힐끔 눈이 내린다.

아침까지 흩날리는 생살의 눈부심

눈부시므로 밟힌다.

                  --「부끄러움」전문


  첫 시집 순서를 정할 때 위의 시를 제일 앞장에 싣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오래 전의 일이어서 잘 기억되지 않지만 초고에는 그 말미에 “서둘러 서울을 벗어 던지며 나는 비로소 안심되었다”는 구절이 있었던 듯하다. 내리는 눈의 의태를 <힐끔 힐끔>이라고 쓴 뒤 얼마나 스스로를 대견해 했었던가! 이런 일이 있었다.

  그것은 와룡 선생 상경기였다. 1976년 12월, 아니면 이듬해 1월이었으리라. 『현대문학』에 추천 받은 그해였으니까, 몹시 추웠던 기억이니까, 중등학교 선생이었던 나는 방학이 아니면 나들이가 불편한 때였으니까. 같은 학교에 근무하던 선배 시인의 권유로 그 선배 시인을 따라간 서울, 서울에서의 일박은 역겹고 힘들었다. 김국태 선생이 편집장으로 일하는 현대문학사에서도 그랬고 아리랑 담배를 사들고 큰절하러 찾아간 조연현 주간 선생의 댁에서도 그랬다. 김수영의 화법을 빌건대 내 몸은 부끄러워 비틀거렸다. 내친 길에 문학과지성사를 찾아갔다가 허탕치고 나오는 골목길에서 문학과지성사 책임자를 만나 와룡 선생 상경을 고한 것 같기도 하다. 함께 갔던 선배 시인은 그후 값진 지면을 얻어 장시를 발표하는 성과를 올렸지만 나는 아무 것도 얻은 것 없이 이른바 문단, 혹은 문단 정치라는 것에 대해 앨러지 반응만 기르게되었다.

  위의 「부끄러움」은 그때 쓴 것이다. 오죽했으면 서울 하늘의 눈이 힐끔힐끔 내렸겠는가. 나를 태운 경부선 열차가 마침내 서울을 떠날 때 아, 얼마나 편안하고 안심되었던가!

  부끄러움에 대한 기억은 뿌리가 깊고 가지도 여럿이다. 낯선 사물 앞에서, 예쁜 여자 앞에서 나는 왜 부끄러운가. 내가 던진 질문의 전말을 꿰뚫어보는 학생들의 강의실을 만나면 부끄럽고 희한한 자세로 골프 체를 휘두르며 땀 뻘뻘 흘리는 당신의 뒷모습도 부끄럽다. 낯선 사물 앞에서, 예쁜 여자 앞에서, 그 강의실에서, 코믹한 세상의 표정 앞에서 내가 조금만, 아주 조금만 뻔뻔스러울 수 있었다면......

  

고깔모자와 버선

  눈 쌓인 겨울 아침 버들개의 추위는 대책이 없다. 대책 없는 추위로부터, 고개를 넘고 물을 건너야 하는 십리 등교 길로부터 당신의 어린 아들을 지키기 위해 어머니는 아랫목에 내의를 묻고 흐린 호롱불 아래에서 밤늦도록 헤진 양말을 기우셨다. 까치소리가 허공에 얼어붙는 날이면 으레 세수한 손이 문고리에 쩍쩍 늘어붙곤 했는데 그런 날이면 어머니께서는 내게 버선을 신기고 고깔모자를 씌워서 학교에 보내셨다. 명주로 만든 고깔모자와 솜을 넣어 만든 버선은 어머니 사랑이 아니라 하더라도 참 포근하고 따뜻했다. 그러나 나는 다른 아이들처럼 고깔모자 대신 나무꾼이나 사냥꾼들이 쓰고 다니는 국방색 방한모를 쓰고 싶었고  구뎡 불란사로 수를 놓은 꽃버선 대신 아랫마을 아이들처럼 차라리 발가락이 다나온 헤진 양말을 신고 싶었다. 고깔모자야 어머니의 눈을 피해 벗으면 되었지만 버선은 벗기도 그렇고 감추기도 난감했다. 교실은 맨흙 바닥에 가마니를 깔았고 책상은 앉은뱅이였으니 아무리 책보자기로 버선발을 숨긴다 해도 자주 옆자리 여자아이들에게 가슴 두근두근 들키곤 하였다. 나는 여자아이들 앞에서 사내답고 싶었던 것이다. 돌이켜 짐작컨대 내 속에 있는 지나친 여성성이 부끄러웠던 것은 아니었을까. 4학년 아니면 5학년 때였을 것 같다. 난생 처음 영화를 관람하고 난 뒤 담임 선생님께서 일일이 제일 마음에 끌리는 장면을 물으셨다. 심청이 치마를 뒤집어쓰고 바다에 빠져죽는 장면이 감동적이었지만 나는 칼싸움하는 장면이 가장 좋았다고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내 속의 여성성이든 한 교실에서 공부하는 이필선, 황경희, 김경애, 윤홍녀들이든 부끄러움은 이성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움튼다. 창세기 기자들도 그렇게 쓰고 있지 않은가. 성경의 인간 창조 신화에 대한 한 학자의 해석을 잠시 커닝해 보자.


  그러나 이렇게 욕망이 용트림할 조건이 다 갖추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욕망은 움직이지 않는다.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부끄러움의 부재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그 두 사람은 모두 발가벗고 있으면서도 서로 부끄러운 줄 몰랐다.”(2;25) 부끄러움은 성적인 욕망의 중요한 성분 중의 하나인데 그것이 작동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욕망이 꿈틀거리기 위해서는 뱀의 출현을 기다려야 한다. 우리는 뱀의 출현을 기다리면서, 그 당시 아담과 이브의 사이가 어떠했는지를 잠시 살펴보자. 분명한 것은 그들이 발가벗고 있으면서도 서로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육체적이건 의식적이건 둘이면서 하나였던 것을 말해준다. 마치 갓 태어난 아기와 어머니 사이처럼 그들은 서로 완전한 합일과 충족의 상태를 맛보았을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옷을 벗고 서로 껴안으면서도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았다. 그것은 하느님 앞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부모 앞에서 성관계를 가지면서도 부모를 개의치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한 사실은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은 뒤, 하나님이 볼까 두려워 나무 뒤로 숨는 장면과 대비를 통해 선명하게 드러난다: “날이 저물어 산들바람이 불 때, 야훼 하느님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는 야훼 하느님 눈에 띄지 않게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3; 8) (임진수, 『시와반시』, 2001 가을호, p.139)


  태초의 인간은 완전한 합일과 충족의 상태로부터 선악과를 따먹은 뒤 아담과 이브로, 남성과 여성으로 분리된다. 이성에 대한 자각의 틈새로 부끄러움이 흘러든다. 달리 말한다면 부끄러움은 합일과 충족에 대한 결여의 표정이다.

  남자와 여자가 육체적이든 의식적이든 둘이면서 하나인 완전한 합일과 충족의 상태, 그 결여의 표정이 사춘기의 징후라면, “너를 본 순간/물고기가 뛰고/장미가 피고/너를 본 순간/아무 것도/보이지 않”(이승훈, 「너를 본 순간」부분)는 바와 같이 결여의 에너지가 블랙홀을 이루는 것이 첫사랑의 와중이라면 내 사춘기는 빨리 왔고 당연히 첫사랑 또한 철 이르게 나를 찾았다.


37년만의 만남, 혹은 가면무도회

  그곳에 부끄러움은 없었다. 내 첫사랑은 어디 갔는가.

   지난여름 속리산 자락 외딴 식당에서는 내 중학교적 동창회가 열렸다. 졸업 후 뿔뿔이 흩어진지 37년만의 첫모임이었고 대부분 첫 만남이었다. 누군가 37년만의 외출이라고도 했고 37년만의 아름다운 황홀이라고도 했다. 인터넷, 아 러브 스쿨 덕분이었다. 세월 덕분이었다. 세월 앞에 무사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50대 중반은 배고픔을 아는 나이, 하루에 세끼를 꼭꼭 챙겨먹어도 우수수 낙엽지고 가슴 한가운데 찬바람이 이는 나이.

  삼삼오오 헤어름을 등에 지고 혹은 어깨에 걸치고 동기 구자순이 경영하는 보신탕 집으로 십대의 그들이 가장 행렬이라도 하듯 흰머리를 뒤집어쓰거나 대머리를 하고, 얼굴엔 자잘하게 잔주름을 그리고, 더러는 펑퍼짐하게 더러는 바싹 마른 몰골을 하고;

 악수를 하다말고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가 어어 종남이 어어 윤계 용현이 아니야 어어 범식이 너 오식이 맞지 안개 걷히자 나무들이 하나 둘 제 얼굴을 내어밀 듯이 어어 복현이 매현이 어어 찬옥이 어어 영자 맞아 세균이 신세균 허창도 그래 너 영식이지 경찰이라며 너 교수라고 말도 천천히 하냐 시인이 뭐하는 거여 야 너 그때 윤계 좋아했었지 아냐 지가 나를 쫓아 다녔지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기율부 하던 선배 머슴애 왜 있었잖아 ......더러는 보신탕 앞에서 더러는 삼계탕 앞에서 소주를 홀짝홀짝 맥주를 벌컥벌컥 사이다를 찔끔찔끔 우리는 한결같이 주름살을 지우고 우리는 한결같이 교복을 입고 모자를 쓰고 우리는 한결같이 흰 칼라 단발머리를 한 보덕중학교 3학년 1반 혹은 3학년 2반이 되어 점점 커지는 목소리들이 뒤섞이고 부딪쳐 삼각파도칠 때 누군가 벌떡 일어나 좌중을 제압하며 죽은 친구 최동수를 위해(나와 자취를 같이했던, 그리고 시계를 맡기고 술을 사주던) 유병욱을(귀에 진물이 나서 솜으로 막고 다니던, 늘 코를 훌쩍거렸던 내 짝궁) 위해 건배를 제의하고 누군가 다시 일어나 동기회 모임의 정례화를 제의하고......그래 제는 술만 취하면 저 모양이야 행패가 심해 사채업하면서 돈도 많이 벌고 번 돈 보다 더 많이 없는 사람들에게 못할 짓을 한 게 마음에 걸려 잠을 못 잔데 못할 짓이 괴로운 친구는 술잔을 깨뜨리고 비틀비틀 횡설수설 쌍욕을 하고 옆자리의 찬옥이가 담뱃불을 붙이며 야 강교수 나 눈이 안보여 고스돕에 미쳐 몽땅 날리고 이래됐어 학교 다닐 때도 여학생치고는 좀 억세더니...... 고엽제에 걸려 쯧, 쯧, 하체를 못쓰는 상규가 먼저 친구의 부축을 받으며 목발로 일어서고 우 일어선 우리는 떼지어 노래방을 들어서고 우 노래방을 나서고 더러는 시골집으로 더러는 여관으로 더러는 밤샘을 하기 위해 구자순네 식당으로 다시 가고......

  37년 전 그때 그 동쪽 하늘에서 해가 뜨고 구병산을 돌아 나와 법주사 입구에서 산채 비빔밥을 끝으로 가면무도회는 끝이났다. 섭섭함을 등에 지고 젖은 아쉬움을 축 늘어진 어깨에 걸치고 뿔뿔이 흩어져 우리는 제각각 일상의 미로로 되돌아갔다. 충북 보은군 탄부면 하장리 정든 교실 창가에 정든 교복을 가지런히 챙겨둔 채, 아버지가 되어 어머니가 되어, 남편과 아내가 되어, 더러는 시어머니 시아버지가 되어,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   

  그때 그곳에 부끄러움은 없었다. 합일과 충족의 충만 때문이었을까. 이성에 대한 자각의 틈새가 지워져 부끄러움의 수로가 막혔기 때문이었을까. 그러면 내 첫사랑은 어디 갔는가.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세 발 자전거를 타고 봄날의 머나먼 앵도밭도 지나 푸른 눈썹과 눈썹 사이 사철나무 열매 같은 길 따라 가면 사철나무 열매 같은 서녘 하늘 아래 사철나무 열매 같던 소녀는 어디 갔는가.


희미한 예사랑의 그림자

  물론 배경도 사건도 인물들의 처지도 한결같지는 않지만 아래 시는 서사 구조와 회한의 토운이 지난여름 그날과 많이 닮았다.


   4․19가 나던 세밑/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반갑게 악수를 나누고/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하얀 입     김 뿜으며/열띤 토론을 벌였다/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결론없는 모임을 끝낸 밤/혜화동 로우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겨울밤 하늘로 올라가/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그로부터 18년만에/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넥타이를 메고 다시 모였다/회비를 만원씩 걷고/처자     식들의 안부를 나누고/월급이 얼마인가를 서로 물었다/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익     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적쟎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몇이서는 포우     커를 하러 갔고/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     게 옆에 끼고/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우리의 옛사랑이 피흘린 곳에/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나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잎 흔들며/우리의 고개를 떨     구게 했다(김광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전문)


  토요일은 언제나 아득했다. 일요일 때문에 운동장이 아득했고 복도 끝이 아득했고 봄날의 머나먼 앵도밭이 아득했고 일요일 때문에 월요일이 아득했다. 서녘 하늘로 편지를 쓰고 답장을 기다리고 그때 그 편지의 사연은 무엇이었던가. 답장은 받았던가. 손목은 한번 잡아보았던가. 이른바 연애편지 사건으로 교무실에 불려가 호랑이 선생님 앞에서 반성문을 쓴 기억, 머리에 쇠똥도 안 벗겨진 놈이...하라는 공부는 안하고...쥐구멍으로라도 도망치고 싶었던 기억, 저녁 노을 아래 혼자 앉아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 속에 뜻도 모르고 잠겼던 기억, 님께서 가신 길은 영광의 길이었기에 이 몸은 돌아서서 눈물을 흘립니다를 목놓아 심각하게 부르던 기억-시가, 대중가요가 그때처럼 위안이 되고 양질의 식량이 된 적이 지금껏 있었던가- 그때 나는 슬픔의 두레박을 가슴 깊은 곳에 품고 살았었지, 시름시름 영문도 모르게 부어오르던 왼쪽 팔이 아주 경직되어버려 한쪽 손으로 어렵사리 세수를 했던 기억, 김주부에게 윤의원에게 그 겨울이 다가도록 침 맞으러 다니던 기억, 식은땀이 나도록 두렵고 아팠던 기억, 졸업을 며칠 앞둔 어느 날 함박눈 속을 세 명의 여학생이 겁도 없이 나를 찾아왔던 기억, 가슴이 쿵쿵쿵쿵 우리 집 마당이 울렁거리던 기억...... 그리고 나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은행잎 노란 가을이었다. 낙엽 흩날리는 토요일 오후였다. 내 눈앞에서 버스가 멎고 참으로 우연히 그리고 홀연히 내 눈앞에서 봄날의 머나먼 앵도밭이 꽃잎을 흔들었다. 앵도밭 너머 도시 물을 잔뜩 먹은 머슴애의 어깨가 아지랑이처럼 가물거렸다. 은행잎 노란 가을이었다. 낙엽 흩날리는 토요일 오후였다. 탄부면 임한리 들판을 가로지른 신작로를 끌고 언덕 너머 사라지는 내 첫사랑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득했던가. 아득함을 지켜보던 노란 은행나무 밑 붙박힌 토요일은 얼마나 아득했던가!


  너를 본 순간/나는 술을 마셨고/나는 깊은 밤에 토했다/뼈저린 외롬같은 것/너를 본 순간/나를 찾아온 건/하    이얀 피/쏟아지는 태양/어려운 아름다운/아무도 밟지 않은/고요한 공기/피로의 물거품을 뚫고/솟아오르던/빛    으로 가득한 빵/너를 본 순간/나는 거대한 녹색의 방에 뒹굴고/태양의 가시에 찔리고/침묵의 혀에 쌓였다/너    를 본 순간/허나 너는 이미/거기 없었다(이승훈, 「너를 본 순간」부분)


  바람에게 듣건대 볼이 붉고 잇바디가 새하얗던 사철나무 열매는 떨어져 깡패의 때 이른 아내가 되고 나는 주섬주섬 대학생이 되었다. 수성못을 거닐며 울었다.



누가 西風의 얼굴을 하고

  말꼬리 잡지도 말고 길게 말하지도 말자. 첫사랑은 어느덧 잠깐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라며 손 흔들며 떠나가는 서풍 같은 것이니까. 


   너도 아니고 그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라는데...... 꽃인 듯 눈물인 듯 어쩌면 이야기인   듯 누가 그런 얼굴을 하고,

  간다 지나간다. 환한 햇빛 속을 손을 흔들며......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라는데, 온통 풀냄새를 널어놓고 복사꽃을 울려놓고 복사꽃을 울려만 놓고,

  환한 햇빛 속을 꽃인 듯 눈물인 듯 어쩌면 이야기인 듯 누가 그런 얼굴을 하고......

                                                                            --김춘수, 「西風賦」전문


  그 마을엔 늘 넝쿨장미가 피고 그 마을에 내리는 눈은 언제나 첫눈이다. 그 마을 사람들은 눈부신 아침 햇살을 먹고살고 그 마을 사람들은 기러기 날개가 펼쳐주는 밤하늘을 덮고 잠이 든다. 그 마을 사람들은 아침저녁 한결같이 세 발 자전거를 타고 집을 나서고 아침저녁 한결같이 세 발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설레임과 외로움과 기다림의 세 발 자전거. 누군가 세 발 자전거를 타고 환한 햇빛 속을 가고 있다면, 누군가 유리창에 흔들리는 스스로의 뒷모습을 부끄러워한다면 환갑이 불원한 누군가인 당신은 지금 첫사랑 중이다.     그러나 밤이 깊어 첫눈 오는 마을은 길 밖에 있고 우리네 세 발 자전거는 부서진 지 오래이다. 겨울이 오기 전에 철새들의 이동을 이용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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