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전 상서
어머니, 일본 며칠 다녀왔습니다. “국경 없는 시대의 국제관계 이해”라는 주제로 심포지움이 있었습니다. 일본, 중국, 베트남, 그리고 한국의 교원양성 대학 책임자들과 그 분야에 관심 있는 학자들이 고베에 초대되어 3박4일 동안 심포지움을 했습니다. 아래 글은 그때 제가 발표한 기조연설 내용을 간추린 것입니다.
3N Day
3N Day는 내가 만든 용어이다. 3N은 No Tie, No Car & Neighborhood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든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3N Day란 일주일에 어느 하루, 아니면 한 달에 어느 하루, 그 마저 어려우면 일 년에 단 하루라도 넥타이 매지 않고, 자동차 타지 말고 어려운 이웃과 함께하는 날을 살자는 것이다. 넥타이를 매지 않는다는 것은 간편복 차림의 수준을 넘어서 틀에 박힌 일상을 탈출해보자는 뜻을 담고 있고, 차를 타지 않는 다는 것은 단순한 교통캠페인의 차원을 넘어서 기득의 편의를 버리자는 의미를 함축한다. 요컨대 일상 탈출에서 얻어진 동력과 기득의 편의를 버림으로 창출되는 에너지를 어려운 이웃을 위해 활용하는 운동을 벌여보자는 것이 3N Day의 근본 취지이다. 3N Day를 구상하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구속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었다.
지난 삼월 한 대학의 책임자로 취임한 뒤 피부에 닿는 가장 직접적인 변화는 넥타이에 묶여야 하는, 관용차에 갇혀야 하는 갑갑함이었다. 일주일에 하루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듯 자유롭고 싶었다. 혁신이란 창조적 파괴의 산물이 아니겠는가. 넥타이 매기의 판에 박힌 근엄과 관용차 타기의 편의주의적 관행을 깨뜨림으로 어려운 이웃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여력이 생긴다면 가치 있는 일이겠다 마음먹게 되었다.
둘째, 길을 내기 위해서는 슬로건이 필요했다.
변화와 혁신이란 말은 이 시대를 이해하는 키 워드이며 대학이라 해서 비켜설 수 없는 화두가 된 지 오래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내가 맡고 있는 대구교육대학교는 지금까지 초등교사 양성 목적대학으로 주어진 여건과 정해진 제도에 충실해 왔다. 그러나 지금은 현실을 지키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을 때가 아니라 성을 허물고 미답의 세계를 향해 실크로드를 내어야 할 때라는 것이 우리 대학에 대한 나의 인식이었다. 지역밀착 혁신대학 기반 구축 계획을 세우고 교육 소외계층을 찾아 나서도록 했다. 3N Day가 필요했다.
셋째, 내 삶의 미션은 무엇인가에 답하고 싶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은 세상에 수없이 많다. 그러나 소년 소녀 가장보다 더 어렵고 안타까운 사람이 있을까 싶지 않다. 그들은 자유의지로 자신의 현실, 그 불우의 나날을 선택하거나 초래한 것은 아니다. 못난 부모, 가난한 시대, 궁핍한 사회는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그들에게 주어진 것,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책임보다는 잘 자랄 권리만 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소년소녀 가장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다.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운동의 불씨를 내가 지피고 싶었다. 교사 양성대학의 총장의 사명을 넘어 내 삶의 소명임을 깨닫게 되었다.
수소문을 거듭하고 발로 찾아다녀야 했다. 소년 소녀 가장을 직접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는 생각처럼 싶지 않았다. 어렵사리 나는 30여명의 소년 소녀 가장들을 총장실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들로부터 장래의 꿈과 희망, 그리고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듣게 되었다. 자장면을 함께 먹으며 스킨십의 체온을 나누는 소중한 시간을 갖게 되었다. 맨토링을 해주고, 이동문고를 만들어 주고, 컴퓨터를 고쳐주고...한 달에 한 번 나와 직원들은 부모가 되어주는, 우리 학생 맨토들은 형제가 되어주는 문화체험의 날도 갖게 되었다.
3N Day 운동을 통해 나는 이 땅에 소년소녀 가장들의 눈물이 없는 날을 꿈꾸어 본다. 내가 책임지고 있는 대학의 학생들이 어려운 이웃과 함께 하는 생활의 고귀함을, 나누는 삶의 가치를 자신의 생철학으로 체득해서 교단에 서기를 꿈꾸어 본다. 그들이 왕자병, 공주병에 걸린 어린 제자들을 치유하는 참된 스승이 되는 날을 꿈꾸어 본다.
누가 알겠는가. 지금은 첫발걸음에 불과한 3N Day가 자기 밖에 모르는 지금, 이곳의 남루를 메워 깁는 불씨가 되려는 지를.
제 이야기가 끝났을 때 가장 박수를 크게 친 분들은 브라질에서 온 사회학자 한 사람과 효고교육대학 부설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었습니다. 그분들은 모두 50대 후반의 여성 학자들이었습니다. 세계 어느 곳의 어머니도 어머니는 한결같이 어머니였습니다. 유네스코 활동이나 정치 경제 문제 중심의 딱딱한 발언보다는 감성을 겨냥한 제 부드러운 이야기가 그들에게는 훨씬 더 호소력이 있는 듯이 보였습니다, 어머니.
청첩장
어머니 저 사위봅니다. 손녀 딸 인사 받는 자리일 때면 언제나 “너 시집가는 것 보고 가야할텐테...”하시던, 그 아이 이제사 시집갑니다. 청첩장은 보셨는지요? 어머니 읽으시던 성경책 곁에 두었는데요. 11월 11일 12시 인터불고 호텔입니다. 이제 1주일 밖에 남지 않았네요, 어머니.
사위될 사람은 미국 퍼듀대학에서 전산학을 공부하고 서울에서 외국인 회사에 다니고 있고요 사돈될 분들은 대구에 살고 있습니다. 평범한 중산층 가정입니다. 신랑 서제원은 어머니. 공교롭게도 어머니 성과 같은 달성 서씨입니다. 어느 교수의 소개로 알게 되었습니다. 맏이로 태어나 사랑 많이 받고 자란 듯 구김이 없고 요즘 젊은이들 답지않게 가파른 상황에서도 느긋해서 좋습니다. 만날 때마다 와인도 한 잔씩 같이 하고 어머니 계셨으면 그러셨겠다 싶어 등도 쓰다듬어 주곤 합니다. 붙임성이 있어 낯설지 않다며 어멈도 퍽 반기는 눈치입니다. 가끔 토닥거리기는 하지만 무엇보다도 저희들끼리 좋아하는 모습이 이뿌네요, 어머니.
지운이는 신랑감이 갖추어야할 조건이 서른 몇 가지라고 콧대를 높이곤 했는데 얼마나 충족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집은 대구이고 직장은 서울이어야 한다는 것도 조건 중의 하나였고, 영어를 저보다 더 잘 해야 하는 것도 그 중의 하나였으니 그 두 가지는 확실하게 갖추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세월이 왜 이렇듯 빠른지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1978년 12월 25일 난산의 진통 앞에서 발동동 구르던 칠성동 회춘산부인과 복도가 눈에 선한데, 밤새도록 하도 울어서 갖다 버리라고 고함지르던 수성동 처가에서의 그날이 엊그제인데, 강보에 쌓인 아이 등에 업고 오가던 바람 부는 눈길이 손에 잡히는데...그 아이가 성인이 되어 이제 시집가요, 어머니. 나비 리본 나풀나풀 어린 날을 지나, 온몸에 뿔 돋은 사춘기를 지나 대학 나오고 일자리 얻고 저 혼자 세계를 한 바퀴 돌아오기도 하고,,, 이제 자신보다 먼저 제 부모 생각하는 나이가 되었으니 시집갈 때가 되긴 되었지요. 벌써 스물 아홉이예요, 어머니. 서른 살은 넘기지 말랬는데 그 당부 들어주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결혼을 필수가 아닌 선택으로 생각하는 요즘 젊은이들의 세태에 혼기를 놓치지 않고 제 짝을 만나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 지 모르겠습니다.
어머니를 아는 사람들은 지운이를 제 할머니 많이 닮았다고들 합니다. 지고는 못사는 성격이 그렇고 이마의 생김새와 간 크고 똑똑한 것이 특히 제 할머니 닮았다네요. 다른 아이들은 시집 갈 준비 부모들이 다해준다는데 저는 별로 도와준 일이 없습니다. 제 스스로 다 알아서 했습니다. 제 살 집 세간살이며, 시댁 첫인사 갈 때의 선물꾸러미 준비며, 결혼식 식순까지 시나리오를 만들어놓았네요. 신부입장 순서에는, “이어서 신부 입장이 있겠습니다. 따뜻한 박수로 맞이하여 주십시오. 신부, 입장!!”이라고 쓴 안내문 옆에 “주례단상이 가까워졌을 때 신랑은 정중히 인사하며 부친은 신랑에게 악수를 청한다”는 체크사항까지 적어두고 있습니다.
딸 아이를 사위에게 넘겨주고 악수를 청할 때 제 감정이 어떨지 짐작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눈물 보이면 안된다며,,,그 순간의 서운함과 허탈감의 진폭을 일러주곤 하던데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으로서는 그냥 무덤덤할 것 같기만 하네요, 어머니. 제 버릇이 그렇듯이 혼자 있는 시간에 조절할 수 없는 감정의 분출 앞에서 망연자실하겠지요. 행복한 걱정입니다.
어제는 어떤 자리에서 “어느 60대 노부부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60대 노부부라니! 말 안되는 소리지만 그렇다하더라도 “막내 아들 대학 시험 뜬 눈으로 지새던 밤들/어렴풋이 생각나오 여보 그 때를 기억하오/세월을 그렇게 흘러 여기까지 왔는데/ 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우는데/큰딸 아이 결혼식날 흘리던 눈물 방울이 이제는 모두 말라”와 같은 노랫말이 남의 이야기가 아닌 실감으로 왔습니다.
찔레꽃
어머니, 제가 어머니 보고 싶을 때 찔레꽃 흥얼거리는 것 아시지요? 행복자임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제가 관리하는 홈페이지에 그 노래를 올려놓았네요. 1절과 2절은 알고 있었는데 3절은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그 노랫말이 너무 마음에 닿습니다.
가을 밤 외로운 밤 벌레 우는 밤
초가집 뒷담길 어두워질 때
엄마 품이 그리워 눈물 나오면
마루 끝에 나와 앉아 별만 셉니다.
어머니, 배고픈 날 남몰래 한 잎 두 잎 따 먹는 그 찔레꽃은 어머니 일하러 가신 여수바우 호두나무 밭 길가에 갈 봄 여름 없이 피어 있는 꽃이지요. 찔레꽃 그늘아랜 죽은 누이가 세 살박이 아이로 아장아장 위테 위태 걷고 있고요. 오늘이 절기로는 입동이지만 지금 이곳은 가을 밤 외로운 밤 벌레 우는 밤입니다. 절기와 관계없이 어머니 안 계신 이곳은 제게 언제나 가을 밤 외로운 밤 벌레 우는 밤입니다. 뒷담 무너지면 어쩌나 하고 개나리를 심은 그 뒷담길은 하루에도 열두번 씩 어두워 지고, 마루 끝에 나와 앉아 별만 세던 아이는
하늘이 하 높고 푸르러
하늘 아래 物物은 耳順하다
어쩔 수 없이,
노을 속을 파고드는 기러기처럼
강물은 흘러 흘러서 어디로 가나
-「세한도․ 38」부분
어쩔 수 없이 가을을 맞고, 어쩔 수 없이 물물의 이순을 느끼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한 대학의 책임자가 되고 한 젊은이의 장인이 되었어도 엄마 품이 그리워 자주 눈물 나오는 것 또한 어쩔 수 없습니다.
어머니, 지난 주말엔 잠깐 그 초가집 담길 다녀왔습니다.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에도 어머니께서 두고 가신 적막, 어머니께서 살고 가신 고요의 눈빛으로 사무쳤습니다. 텃밭에 심은 고추가 얼마나 잘 자라는지 아직도 열매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뽑아내려다 그냥 두고 왔습니다. 거름을 많이 해서 그런지 고추가 어쩌면 이렇게 많이 달리는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장안댁네 할머니가 담 너머로 듣고 “어머이가 날마다 산에서 내려와 가꾸니까 그렇다고” 해서 웃었습니다. 저승 가신 어머니를 예사스럽게 이승으로 데려다 주었습니다. “우리 영감은 뭐 그리 좋은 데가 많은지 나한테는 한 번도 안와”하며 서운해 하시는 할머니에게 삶과 죽음의 경계는 무시로 넘나드는 문지방이었습니다.
대문을 새것으로 바꾸어 달고, 대문 옆 가죽나무 곁에 능소화 한 그루 심었습니다. 제대로 돌보지 않아서 그런지 올해는 어머니, 감도 호두도 모두 흉작입니다. 그렇듯 왕성하던 국화도 분꽃도 시들하기만 합니다. 두어 차례 비료를 주었더니 제법 김장감이 될 만큼 제 모습을 갖추긴 했지만 무, 배추도 어머니 계실 때 갖지 않습니다. 참 어머니 손자국 남아 있는 요소 비료 이제 다 쓰고 없습니다. 생명 가진 것은 너나 없이 사랑을 먹고 살도록 되어 있나봅니다. 빈 집을 지키는 저것들이 고맙고, 빈 집에 두고 가야할 저것들이 몹시 안쓰럽습니다. 단 것은 솎아내고 속이 찬 배추는 어린 아이 보듬 듯 묶어주며 어머니 생각 많이 했습니다. 붉은 얼굴을 내민다고 일러주시던 가을 감나무와도, 마당 가득 덤벼드는 한여름 잡초와도, 나비라고 이름 지어준 아침 햇살 속의 고양이와도, 펄 펄 휘날리는 동지섣달 눈발과도 한 식구로 살아가시던 날들의 어머니, 가위눌리셨을 외로움에 가슴 메였습니다.
그곳에도 때가 되면 낙엽지고 바람 불고 때가 되면 비 오고 눈 내리고 그러한지요? 지난 봄 돌아가신 뒷집 할머니 요즈음도 아침 저녁 함께 계시는지요? 입맛 없으시면 보리밥 해서 나물에 비벼 드시는 점심때도 있는 지요? 가끔 윷놀이도 하시는 지요?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 큰 일 잘 치루겠습니다. 예식장 혼주석에 어머니 자리 마련해 놓겠습니다. 겨울 깊어지기 전에 사위 데리고 어머니 유택에 인사 올리러 가겠습니다. 늘 편히 계세요,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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