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가 있는 응접실

배고팠던 날들의 기억

by 고요의 남쪽 2009. 9. 17.

배고팠던 날들의 기억


                                             

 그 방은 자목련 그늘 밑에 있었다. 본관 건물 아래층에 있었으므로 지금은 아마도 행정 부속실로 쓰이고 있으리라. 그러나 내게 그 방은 지금도 자목련 그늘 밑 햇빛 들지 않는 강의실이다. 내 인생의 꿈이 시인이었으니까, 문학을 하기 위해 김춘수 선생께서 계신다는 경북대학교에 입학했으니까 두근두근 그 방을 찾아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현대문학연구회에서 복현문우회로 이름이 막 바뀐 그 방의 터줏대감은 K선배였다. 굽은 어깨와 도수 높은 안경, 그리고 끝간 데 모를 그의 진지한 사변은 풋내기 문학 지망생인 나를 압도하기에 충분한 분위기였다. 그 방을 거쳐 간 전설적인 시인 선배들도 그러하고 당시의 내 눈 높이에는 하늘처럼 보이던  한 두 해 선배들의 문학적 열기도 그러했지만 지도교수가 김춘수 시인이라는 사실에 나는 얼마나 설레었던가. 그 설렘을 나는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선생님은 처음 내게 하나의 황홀로 왔다. 그것은 널리 알려진 『꽃』으로부터였다. 이 작품을 나는 해방 몇 주년 기념으로 우리 문학을 조감하는 어느 신문의 기획 난에서 읽었다. 그때 나는 입시에 실패하고 재수를 하고 있었는데, 재수를 하면서도 정신 못 차리고 한하운의 일생과 보리피리 같은 것에 찔끔찔끔 슬퍼하며 시간 다 보내고 어디 만만한 지방대학쯤으로 뜻을 굽힐 무렵 『꽃』을 만났던 것이다. 그것은 한하운 유의 슬픔과는 전혀 다른, 이를테면 우리가 서양 여자의 살갗을 처음 스쳤을 때 느끼는 그런 뜻밖의 황홀이었다. 내게는 그랬다. 돈이 없어 사범대학에 입학하고 보니 선생님은 문리대에 계셨고, 참 낭패스러워 하던 중 나는 선생님께서 지도교수로 계시는 복현문우회에 서둘러 가입했고 서둘러 선생님을 뵙고 싶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당시의 내게는 너무 멀리, 너무 높이 계셨다. 지금 와서 생각건대 낙서밖에 아닌 것을 시랍시고 들고 연구실을 찾아가고, 인문대에 개설된 “시론”강의를 청강도 하고, 학보사에 작품을 투고해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도 싶었지만 그때마다 나는 배고픈 체험만을 했을 뿐이었다. 일청담 옆 미루나무 로터리에서 일 년에 한두 차례 시화전을 하고 가을이 깊어지면 문학의 밤을 하고,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진정성보다는 현시욕을 앞세운 토론회를 하고(그렇다 문제는 진정성이다!), 그러는 사이 하늘처럼 보이던 선배들도 하나 둘 하늘이 아닌 채 그 방을 떠났다. 배고픈 나는 한사코 사대 국어과를 사대 국문과로 바꾸어 썼지만 문학에 주린 배는 채워지지 않았다. 문학이란 고독한 개인의 작업이란 사실에 무심했던 것, 문학이란 길이 끝난 곳에서 길이 되는 가열한 고통의 산물임에 등한했던 것. 학교 공부도 시들해지고 동아리 활동도 뜨악해졌다. 당연히 나는 학교 대신 향촌동을 떠돌았고, 동아리 활동 대신 바깥 글쟁이들과 어울려 동가식서가숙 천박지축 헤매었다. 교문 앞에 학사주점 델레스망을 차렸던 일도 그 무렵의 일이고, 복현동 과수원 뒤편 한적한 사이길, 회상의 그 언덕을 “강현국 로드”라고 명명했던 치기만만도 그 무렵의 일이었다.


 그 방을 떠난 지 한 세대가 지났고 시인의 꿈을 이룬지도 30년이 넘었다. 이쯤 서서 바라보니 자랑보다는 부끄러움뿐이고, 만족보다는 후회가 앞선다. 그 때 그것을 알았더라면, 세월이 이렇듯 많이 흘러갔으므로 목 놓아 운다해도 어쩔 수 없는 회한의 가슴앓이를 예감할 수 있었다면! 때 이른 후회는 세상에 없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 때 그 풋풋한 날들을 다시 살 수 있다면, 손 시린 고독, 그늘진 구석을 그때보다 더 잘 견딜 수 있을까. 그대 추운 겨울을 위해 내 몸을 불태울 언어의 땔감을 헛간 가득 예비할 수 있을까. 아무도 가지 않는 그 길의 끝까지 가서 아득한 지평선 푸른 하늘 한 자락을 만져볼 수 있을까. 아니다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아니다 그렇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하더라도 그 방의 날들은 향기로웠다. 결여가 욕망을 낳는다 하지 않는가. 한 세대 전 나처럼 지금도 누군가 거기 그 방을 드나들며 시인이 되면 하늘을 도리질하리라는 맹목의 열병을 앓고 있겠지. 다시 공화국이 아홉에 아홉 번을 바뀐다 하더라도 철따라 피고 질 자목련 그늘 밑 그때 그 깊고 서늘했던 몽상의 방에서.      



'시가 있는 응접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해야 하는 이유  (0) 2009.09.22
사랑한다는 것  (0) 2009.09.19
사랑의 시간  (0) 2009.09.17
너와 그녀도 남이 아니었구나  (0) 2009.09.12
나 없는 세상  (0) 2009.0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