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 28과 시 정신
‘시는 물오리가 날아가는 땅거미 깃드는 하늘이다’라고 말한 사람은 미국의 시인 칼 샌드버그이다. 물오리가 날아가는 땅거미 깃드는 하늘이라니! 그는 왜 시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을까? 물오리가 날아가는 땅거미 깃드는 하늘은 어떤 하늘일까? 하늘의 수식어인 ‘물오리가 날아가는 땅거미 깃드는’을 살펴보기로 하자.
‘물오리’는 주체이고, ‘날아가는’은 주체의 행위이고, ‘땅거미 깃드는’은 주체의 행위가 일어나는 배경(시간)이다. 시의 비유어인 ‘하늘’의 빛깔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체의 특성과 행위의 이유와 배경의 의미를 따져볼 필요가 있겠다.
물오리는 집오리와 다르다. 물오리는 야생이고 집오리는 가축이다. 야생은 자신이 주인이고 가축은 사람이 주인이다. 물오리는 자신이 주인이므로 자신의 삶을 스스로 꾸려가고 물오리는 주인이 따로 있으므로 자신의 삶을 타의에 의존한다. 스스로 꾸려가는 삶의 고충과 타의에 의존하는 삶의 안일은 물오리와 집오리의 운명을 판이하게 바꾼다. 고충은 날개를 생성하고 안일은 날개를 퇴화시킨다. 물오리가 하늘을 날 때 집오리가 식탁 위에 오를 수밖에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날아간다는 것은 공간의 이동을 뜻한다. 이동은 보다 나은 곳을 찾아가는 자리바꿈의 행위이다. 먹이를 찾아서, 보금자리를 찾아서, 혹은 그리운 짝을 찾아서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넌다. 지금/이곳에 길들여지거나 붙박이지 않고 미지를 향해 허공에 몸을 맡기는 저 처연함! 그러므로 날아간다는 것은 꿈꾸는 자의 징표이자 살아있음의 징후이다. 죽음은 몸이 굳어 움직이지 못하지만 꿈은 현실의 결여를 박차고 약속의 땅을 향해 돛을 올린다. 실크로드는 만리장성을 허문 자의 몫이다.
해는 졌으나 등불을 켜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 땅거미 깃드는 시간이다. 달리 말하자면 낮과 밤이 만나는 시간이다. 일상 속으로 외출했던 내가 본래적인 나에게로 귀환하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시간, 너와 내가, 자아와 세계가 살 섞는 시간, 훼손되지 않은 원초적 감성이 눈 뜨는 때가 땅거미 깃드는 시간이다. 만남이란 하나가 되고 싶은 욕구이어서 땅거미 깃드는 시간에 마시는 커피는 턱없이 부드럽고, 한낮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게 카잘스의 첼로는 듣는 사람의 가슴을 뜯는다.
하늘의 빛깔은 이와 같은 것이다. 물오리가 날아가는 땅거미 깃드는 하늘이라고 정의한 칼 샌드버그의 속사정은 이와 같은 것이다. 날개와 꿈과 만남은 혈육이어서 날개가 꿈을 잉태하고 꿈이 만남을 낳는다 라고 하거나, 만남이 꿈을 잉태하고 꿈이 날개를 낳는다 라고 해도 상관없다. 순서와 절차로 분절하는 것은 해롭다. 시는 날개와 꿈과 만남이 파스텔처럼 한 몸으로 번지는 하늘이라는 사실 만이 중요하다.
여기 바람 한 점 없는 산속에 서면
나무들은 움직임 없이 고요한데
어떤 나뭇가지 하나만 흔들린다
그것은 새가 그 위에 날아와 앉았기 때문이다
별일 없이 살아가는 뭇사람들 속에서
오직 나만 홀로 흔들리는 것은
당신이 내 안에 날아와 앉았기 때문이다
새는 그 나뭇가지에 집을 짓고
나무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지만
나만 홀로 끝없이 흔들리는 것은
당신이 내 안에 집을 짓지 않은 까닭이다
-류시화, 「새와 나무」 전문
물오리가 날아가는 땅거미 깃드는 하늘이 보이는가? 윗시의 주제어는 ‘당신’과 ‘흔들림’과 ‘집’이다. 당신 때문에 흔들리고, 당신이 내 안에 집을 짓지 않아 흔들림이 멎지 않는다. 물오리가 보이는가? 별일 없이 살아가는 뭇사람들은 집오리이다. 날아가는 동작이 만져지는가? 오직 나만 홀로 흔들리는 것은 꿈꾸는 자의 징표이자 살아있음의 징후이다. 땅거미 깃드는 시간이 느껴지는가? 새가 나뭇가지에 집을 지어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깊은 산속 고요한 나무를 상상해 보라.
강단을 떠난 지 십년이 지나도록 시는 물오리가 날아가는 땅거미 깃드는 하늘이라는 칼 샌드버그의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시를 정의한 그의 독특한 방식 때문일 것이다. 개념적으로 진술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표현한, 가령 ‘시는 체험이다’와 같이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하늘의 빛깔을 통해 우회적으로 시의 속성을 느끼게 한 비유의 힘 때문일 것이다.
눈치 빠른 독자는 일찌감치 알고 있었겠지만 나는 지금 시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2 ‧ 28을 말하려 하고 있다. 시를 통해 2 ‧ 28을, 시 정신을 통해 2 ‧ 28정신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비유의 힘에 기대어 세월에 부식되지 않는 2 ‧ 28정신의 보편적 의의를 되새기고 싶은 것이다.
2 ‧ 28의거는 이승만의 독재정권에 맞선 대구지역 고등학생들의 저항운동이었다. 반세기 전 그들이 밝혔던 횃불은 이 땅 만주화의 길 닦기였다. 2 ‧ 28의 불씨는 3 ‧ 15와 4 ‧ 19를 거쳐 민주시민혁명을 일구어낸 도화선이었던 것. 그 때, 그 날 떨치고 일어섰던 젊음의 함성에서 나는 물오리가 날아가는 땅거미 깃드는 하늘을 본다. 날개와 꿈과 만남으로 처연한 시의 빛깔을 본다. 시가 하늘이라면, 하늘이 물오리의 길이라면, 2 ‧ 28 또한 우리가 꿈꾸는 하늘, 참된 역사의 지평을 찾아가는 길이 아니었을까. 거친 논리가 허용된다면 2 ‧ 28정신은 시정신과 동궤의 것이라 말해도 되겠다.
그러나 아직도 이 세상 도처에 횃불이 필요하고, 도화선이 필요하고, ‘별일 없이 살아가는 뭇사람들 속에서 오직 나만 홀로 흔들리고 있으니’ 어찌 2 ‧ 28의 시효가 끝났다 하겠는가! 한 시인이 노래한 바와 같이 ‘그러나’ 우리에겐 지켜야 할 약속이 있어 잠들기 전에 먼 길을 가야한다. 잠들기 전에 먼 길을 가야만 한다.
The woods are lovely, dark and deep,
But I have promises to keep,
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
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
- Robert Frost, 「Stoppping By Woods On A Snowy Evening」부분
강현국(시인, 사단법인 녹색문화컨텐츠개발연구원 이사장, 전 대구교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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