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애원,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 의료원
우복(愚伏)선생 전상서
꽃 피는 봄 사월 존애원을 찾았습니다. 흰 구름 산들 바람 향기로운 날이었습니다. 선생 계신 그곳 하늘나라에도 봄이 오면 꽃 피고 새 울고 농부들 딸 흘리며 논밭갈이 하는지요? 그곳에도 사건 사고가 있고, 신문이 있고 방송이 있고, 정치가 있고 경제가 있고 교육이 있고 문화가 있고, 국경이 있고 이념이 있는지요?
경상북도 상주시 청리면 율리 353번지. 선생께서 두고 가신 존애원까지 선생의 14대 손인 정관 박사가 동행해 주었습니다. 얼마 전 존애원 기념 사업회 책임을 맡게 되었다며 어깨를 무거워 했습니다. 이대로는 안 되겠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다며 어깨가 무겁다 했습니다. 겸양이나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정관 박사로부터 전해들은 바 역사에 새겨진 선생의 발자국과 존애원에 간직된 숭고한 정신에 견줄 때 이건 아니고 이래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광화문을 노래한 어느 시인의 말처럼 ‘차라리 한 채의 소슬한 종교’이어야 마땅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존애원은 쓸쓸히 버려진 한낱 낡은 기와집일 뿐이었습니다. 역사의 뒤안길에 지워져가는 흔적처럼, 아무도 찾지 않는 유배지의 선비처럼 남루의 극단이란 느낌이 들었습니다. 기해년(선조32년) 가을 선생께서 중심이 되어 설립한 존애원의 쓸쓸함과 남루함은 아무래도 400여 년 동안 진행되어 온 시간의 침식과 잘못된 세태의 간섭으로 말미암은 것일 터입니다.
유배지의 선비처럼
계유년(1993년)2월에 경상북도 지방문화재 제89호로 지정하고, 갑술년(1994년) 정부의 문화재보수 계획에 의거 보수공사를 하고, 무인년(1998년)과 계미년(2003년)에 각각 담장 및 주변정비공사, 외부 주차장 및 화장실 시설공사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고 하나 아무래도 제가 보기에는 왠지 겉치레로 느껴질 뿐이었습니다. 외관도 외관이려니와, 정신이 소멸된 유적이란 눈요기일 뿐이며, 혼이 소거된 유물이란 돌덩이일 뿐이지요. 생동하는 정신과 살아 숨쉬는 혼의 계승이야말로 선대에 대한 후대의 예의이며, 어제를 통해 오늘을 사는 우리가 내일을 위해 지켜야할 책무일진데, 안타깝게도 존애원에는 선생의 혼과 정신을 지키려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 다 차치하고라도, 당시에 약을 빻거나 할 때 사용하던 돌절구에 버려진 담배꽁초며 코 푼 휴지 조각이 저간의 사정을 웅변하고 있었습니다.
선생 가슴에 달아드린 명찰, ‘지방문화재 제89호’에 대한 선생의 생각은 어떠하신지요? 선생께서 내려다보시는 오늘의 세태, 후세들이 살아가는 꼬락서니가 어떻게 보이시는지요? 존애원의 가치가 폄훼되지 않고, 선생의 살아 숨 쉬는 기침소리 쩌렁쩌렁 울리는 일깨움의 도량으로 존중되었다면 적어도 이럴 수는 없었겠지요. 만시지탄은 있지만 이럴 수는 없고,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을 떨쳐버릴 수 없어 선생이 두고 가신 유지(有志)의 거울 앞에 오늘을 사는 저희들의 자화상을 비쳐봅니다. 용서하소서!
이준 선생의 <존애원기>는 다음과 같이 존애원 설립의 정신적 주춧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정선생(程先生)의 존심애물(存心愛物-본심을 지켜 기르고 남을 사랑함) 이란 말을 취하여 존애당이라 이름 지었다. 대저, 남과 내가 비록 친소는 다르나 한가지로 천지간에 태어나 한 기운을 고르게 받았은즉 만강(滿腔)의 차마 못하는 어진 마음을 미루어 동포를 구활(救活)함이 어찌 사람의 본분을 다함이 아니랴.(중략) 유마힐(維摩詰)은 위(位)가 있는 자가 아님에도 능히 백성의 병을 보기를 자기의 병을 보듯 하였는데, 하물며 우리는 우리 유자(儒者)이며 또 나와 남이 한가지라 여기는 자임에랴.
나와 남이 한가지라
박애정신에 기초한 공동체 의식을 정신적 주춧돌로 한 존애원의 설립은 물론 시대적 요청에 의한 것이었으며 애물(愛物)이 곧 제물(濟物-모든 이를 구제함)로서 이의 실천이 곧 선비의 도리라 여겼던 살아있는 선비정신의 발현이었습니다.
선생께서 존애원을 창설하신 상주 땅은 군사 요충지여서 임난의 피해가 여간이 아니었음을 조정은 그의 임난일기에서,
궁춘(窮春)이 돌아오매 굶어 죽는 자가 적병의 칼날에 죽은 자 보다 몇 배가 많았다. 사람의 목숨이 초개(草芥)가 아닌데 봄철이 지나기 전에 거의 죽게 되었으니 저 어진 하늘이 어찌 이런 일을 차마 한다는 말인가.(선조 26년 2월 29일)
모맥(牟麥)이 흉년이 들고 신곡(新穀)은 나오지 않아 근일에 굶어 죽은 자가 길에 널려 참담한 정경은 차마 볼 수 없었다. 앞으로 신곡을 수확하자면 아직도 40여일이 남았는데 저 불쌍한 백성들이 어이 살아 나갈 것인가. 통탄할 일이었다.(선조 26년 7월 25일)
오후에 길을 떠나 속리산에 도착하녀 자주(慈主)를 뵈었는데, 큰 절에는 역질이 크게 번졌으므로 동암(東庵)으로 사저를 옮겼다. 심중(審中)의 병은 차도가 많이 있으나 다만 원기가 극도로 쇠약하여 소생되기가 쉽지 않으니 염려스러웠다.
자주(慈主)께서 부리는 노복과 정자댁(正字宅)의 노비 등 8, 9명이 모두 역질에 걸렸는데 대산(大山)과 검시(儉是)는 이미 작고하였고, 그 나머지도 위석(委席)해 누웠다고 하였다. 병이 위중할 뿐만 아니라 양식이 떨어져 구원할 길이 없었으니, 병이 수월하다 하더라도 굶주리는 것이 뻔한 일이었다. 마음이 아픈 나머지 걱정스러움이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었다.(선조 26년 2월 18일)
등과 같이 기록하고 있고, 우곡(愚谷)은 그의 시 <亂後還故居>에서,
옛 마을 황량한데 새들만 지저귀고, 뜰 가득 잡초 자라 인적도 적적하네.
내 죽잖아 터럭은 서리 같은데, 나랏일 아직도 위태해 꿈속 혼이 놀라네.
아들 아비되어 살아있음 한스러운데, 손자 없는 자식 묻자니 말 앞서 눈물일세.
진종일 꽃지는 푸른 산 속에, 외로이 창천을 우러러 문을 닫지 못하네.
와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 기막힘 형언할 수 없습니다. 조정의 기록과 우곡의 시는 7년여에 걸친 임란의 폐해, 극에 달한 민초들의 굶주림과 대책 없이 죽음에 내몰린 질병의 고통을 핍진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비극적 참상에 대한 사실적 기록의 바탕에는 민초에 대한 사대부의, 아니 인간에 대한 인간의 관심과 사랑이 연민의 정조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인간애의 숨결인 연민의 정조가 박애정신으로 승화되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 존재원이겠지요. “저 불쌍한 백성들이 어이 살아 나갈 것인가. 통탄”한 선비들의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실천이 존애원을 세웠던 것입니다.
“저 불쌍한 백성들이 어이 살아 나갈 것인가. 통탄”한 선비들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사건의 성격과 사태의 세목은 같지 않다하더라도 형언할 수 없이 기막힌 사연들은 지금 이곳에도 자행되고 있습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되고, 병원이 즐비하고, 전 국민이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고, 신식무기로 외침을 막고 있는 2012년 꽃 피는 봄 사월에도 끔찍한 살상과 처참한 죽음의 그림자는 도처에 잠복되어 호시탐탐한 민초들의 죄 없는 생명을 노리고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존애원을 찾아가는 날 한 조간신문 사회면에는 믿기 힘든 사건 소식을 전해주고 있었습니다. 선생께서 아래 기사를 읽으신다면 어떤 표정을 지으실지 사뭇 궁금해집니다.
A씨 언니(32)도 경찰에게 연락을 받고 2일 오전 3시 10분쯤 사건 인근 현장을 찾았다. 한 수퍼마켓 앞에 경찰 승합차가 주차돼 있었고, A씨 언니는 승합차 안에서 탐문 수사팀의 무전을 들으면서 경찰과 함께 대기하고 있었다. A씨의 언니는 본지와의 전화 통화에서 “승합차 안에서 대기하던 형사 2명이 잠을 자고 있어 ‘여기서 이러지 말고 동생을 찾아봐야 하지 않겠냐’고 말하자, ‘지금 밖에서 열심히 찾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대답한 뒤 다시 졸았다”고 말했다. 경찰은 이에 대해 “차 안에서 대기하고 있었을 뿐 잠을 잔 적은 없다”고 주장했다.(A12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처참했다. 마치 가축을 도살하듯 뼈만 앙상하게 남겨 놓았다.” 지난 1일 수원에서 발생한 20대 여성 토막살해 사건의 범인 오원춘(42)은 피해자 A씨의 시신을 마치 짐승을 도축하듯 다뤘다. 지난 3일 A씨의 시신을 부검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너무 엽기적이어서 말문이 막힐 정도였다”고 말했다. 국과수는 이날 수원 중부 경찰서로부터 토막 난 시신이 담긴 검은 봉지 14개를 받았다. 국과수 관계자는 “봉지 하나 당 20여점씩 살점 덩어리가 총 280여점이 담겨 있었다”며 오씨가 A씨의 온몸을 난도질한 상태였다“고 말했다.(A13면)
“네가 교장이면 다냐. 나는 학교 그만두면 돼. 야, 교장 너, 밤길 조심해.”
A중학교 교장 B씨는 지난 해 큰 충격을 받았다. 중학교 1학년 1명과 3학년 학생 1명에게서 욕설을 듣고 폭행을 당한 것이다. 이 학생들은 수업 중 무단 외출을 했다가 교무실로 불려온 상태였다. 교무실에 나타난 두 학생은 교사에게 갖은 폭언을 쏟아내고 눈을 부릅뜨며 위협했다. 또 교장실로 불려간 학생들은 교장에게 반말과 협박을 하고 캐비닛을 발로 찼다. 결국 학교측은 경찰을 불러 학생들을 막았다. 이 학교 교사 C씨는 “학생들은(벌주기조차 금지한 학생인권조례 때문에)교사의 손발이 묶여 있다는 것을 알고 이를 악용한다”며 “학생의 폭력을 막을 방법이 없어 답답하고 슬프다”고 했다.(A14면)
부끄럽습니다. 인면수심에 의해 생명이 갈 갈이 찢겨 도륙당하고, 제자가 스승에게 육두문자의 폭력을 휘두르는 세태의 처참함이 어찌 선생께서 몸담으셨던 임란 뒤의 그것보다 덜하다 하겠습니까?
세태의 처참함, 일그러진 우리들의 초상
임진왜란 7년여의 전쟁으로 백성들의 굶주림은 극에 달했고, 돌림병 특히 역병이나 각종 질병이 만연하였으나 중앙정부의 손길이 닿지 않아서 백성들은 의료혜택을 전혀 볼 수 없었을 때, 이러한 참상을 차마 두고 볼 수 없었던 선생께서는 이준, 성람, 김각, 강응철, 기광두 등의 상산 선비들과 힘을 모아 1599년 이 나라 최초 사설 의료국인 존애원을 세우셨습니다. 이준 선생의 존애원기는
하루는 그(우복) 친구 성람과 상의하기를 “우리는 혈육을 지닌 몸으로 한서의 침해를 받아 사백 가지나 되는 병이 침공해오는데도 약은 한 두 가지도 갖추지 못해 왕왕 비명에 죽으니, 그것이 바위 담장 아래서 질곡에 죽어가는 것과 같지 않은? 지금 공은 시서와 학문에다 의술에도 통달하였다. ......이제 동지들과 대략 약재를 모아 급할 때 쓰고자 하니, 진료하고 투약하는 일은 공의 일이다.”라고 하니, 성람이 마땅한 일이라 여겼고, 여러 사우 또한 혼연히 참여를 원하여 협력하려 하였다.
와 같이 선생의 육성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선비로서의 품격과 지도자로서의 도량이 능히 읽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땅엔 품격 높은 선비도 도량 넓은 지도자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마키아벨리즘에 사로잡힌 정치, 정경유착과 빈익빈 부익부를 근간으로 한 천박한 자본주의, 끝간 데 없이 경쟁을 부추켜 인성을 갉아먹는 교육,,,한 생명이 도막쳐지는 단말마의 오침에도 귀 막고 조는 경찰, 학생이 교사의 머리채를 잡아도 자식을 나무라기보다는 오히려 고소하겠다고 어름장 놓는 학부모,,,어느 한 곳 병들지 않은 곳 없어도 아무도 아프지 않은 게 선생 가신지 400여년이 지난 후손들의 자화상입니다. 유마 힐도 찾을 길 없고, 선비 정신 소멸한지 이미 오래인데 누가 있어 지식 정보 사회에 걸맞는 존애원을 세우겠습니까?
그리운 선비정신, 존애원의 현대적 계승에 대한 목마름
선생께서 두고 가신 존애원을 찾아가는 날은 아침에 읽은 신문기사의 그늘에 가위눌려 있었습니다. 그늘진 저의 마음이 쇠락한 존애원의 쓸쓸함을 부추켰음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 쓸쓸함의 안쪽에는 선생의 높은 뜻과 숭고한 정신에 대한 그리움이 자리 잡고 있음을 물론입니다. 의료시설이 극히 미약하였던 당시, 상주 지역을 대표하는 각 문중에서 상주향약의 정신과 숭고한 박애정신을 바탕으로 한 환난상휼(患難相恤), 경노잔치인 백수회를 개최하여, 老壯은 少長에 대한 돈독한 애정을, 소장은 노장에 대한 공경을 실천하며 배워서 민풍을 순화하고자 했던 예속상교(禮俗相交), 항상 문장과 학문에 덕망이 높은 한 사람을 단독으로 추천하여 육영하는 낙(樂 )에 종사케 했던 교학상장(敎學相長)을 근간으로 수세기를 활약해온 존애원의 현대적 계승에 대한 목마름이 선생에 대한 그리움의 가장 큰 이유입니다.
건립 당시 존재하였다는 창고와 당우, 혹은 그 이후 본격적으로 건립되었을 시설들은 그 위치와 규모조차 전혀 알 수 없는 지금 존애원은 네모진 흙담장, 2단으로 된 마당, 얕은 자연석 기단 위에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 온돌방 배치, 쌍여닫이문, 온돌방 후편 수납공간 인 벽장이시설의 전부입니다. 물리적 시설도 소홀히 할 문제는 아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존애원 정신의 부활에 있지 않겠습니까?
선조32년(1599년)설립된 존애원은 정조6년(1782년)향민의 무고로 수난을 거쳐 오늘의 남루로 남아 있습니다. 가까이는 신묘년(2011년) 상주문화원에서 존애원의 설립에 관한 학술발표회를 개최, 상주청년유도회 주관 의료구휼행사를 시연 하는 등 존애원의 정신 복원과 계승에 안간 힘을 쓰고 있으나 역사의 흔적을 넘어 한 채의 소슬한 종교로 승화하기까지에는 아직도 갈 길이 멀어 보입니다. 존애원 기념사업회의 의미 있는 활동이 기대되는 이유입니다.
선생의 높은 뜻이 새삼 그리워 저는 다시 계정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계정(溪亭)은 대청 한 칸, 방 한 칸으로 지붕은 초가로 올린 단출하면서도 검박한 건물이었습니다. 1603년경 우산에 처음 자리 잡은 후 3년 후에 지은 것으로 이곳이 조선조 퇴계학의 학통을 바로 잇고 경세제민(經世濟民)의 대선비로 이름난 선생께서 학문을 닦고 연구하던 공간이라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람만 앉아도 비좁을 듯한 방, 그래도 방문을 여니 어느덧 앞산이 머뭇거림 없이 다가와 한 시대를 경영했던 대학자의 여유 있는 읊조림이 귀에 쟁쟁했습니다.
萬壑風泉獨掩 만학풍천에 빗장 걸어 닫고 홀로 있으니
日長無客到溪亭 긴긴해 계정에 찾아오는 나그네 없도다
晩來意倦抛書出 해질녘 정신 지쳐 서책 버려두고 나오니
潑眼新陰綠滿庭 눈부신 산록의 그늘 뜰 안에 가득하구나
‘우복 선생전 상서’라고 써고 보니 50여년전 그 때가 생각납니다. 통신 수단이래야 인편에 기별을 하거나, 우표를 붙여 편지를 보내거나 선진한 사람들이 다급할 때 전보를 치는 것이 고작이었던 그 때, ‘부모님전 상서’ 아래 만리장서로 부모님께 안부를 여쭙던 어린 날이 생각납니다. 지금은 통신 수단의 발달로 지구가 한 집안이 되었다 하나 선생께서 계신 곳은 아무래도 지구 바깥이니 전화를 드릴 수도 없고, 찾아뵈올 수는 더더욱 없고, 어쩔 수없이 이렇게 마음의 우표 한 장 붙여 글월 올렸습니다.
2012년 4월 강현국 큰절
<보유>존애원 기념사업회장 정관 박사(우복 14대손)인터뷰
-우복선생의 사상적 요체는 무엇입니까?
-민본사상(民本思想), 인륜지학(人倫之學)의 실천, 학자 관료로서 지향한 국태민안(國泰民安) 등으로 요약할 수 있겠지요.
-우복선생께서 생전에 남기신 기억할만한 에피소드는?
-선생의 탄생을 예고한 스님의 풍수이야기, 홍만종의 순오지에 나오는 과거시험길에 유숙한 일화 등이 잘 알려져 있지만 선생께서 당신의 사위를 고르시던 이야기, 즉 우복선생이 사계(김장생)선생과 학문적 교분이 깊었는데 사계선생이 “오늘날 세상에서 학문과 예를 논할 사람은 오직 정경세 밖에 없다,”고 한바 있습니다. 사계선생이 우복선생의 출가시킬 따님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신랑을 추천한 일화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마침 사계선생의 제자 3명이 별채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그 3명이 모두 자질이 뛰어나니 그 중에서 선택하라했다. 우복선생이 별채에 들어서니 한사람은 인기척을 듣고 서둘러 방문 밖으로 나와 예를 취하고, 또 한사람은 방 윗목에 비켜서서 예를 취하고, 다른 한사람은 아랫목에 반쯤 누운 자세로 멀끔히 쳐다보고 있다가 선생이 들어선 후에 겨우 앉았다. 선생이 좌정하고 이유를 물은즉 ‘어른이 누구신지 알 수는 없었으나 사계선생을 찾으신 분이시니 필경 예를 갖춤이 마땅하다고 여겼습니다.’(이유태) 또 한사람은 ‘어른이 누구신지 알 수가 없어서 들어오신 연후에 예를 갖추고자 이렇게 서 있었습니다.’(송준길) 비스듬히 누워 있던 사람은 ‘童子는 무례라 하였는데 누구신지도 모르면서 서둘러 예를 갖출 필요가 없어서 그랬습니다.’(송시열)하였다. 우복선생은 그 중 송준길의 행동을 가장 적당하고 택하여 사위 삼았다. ” 선생의 사람보는 눈을 엿볼수 있는 대목이지요.
-우복선생의 가장 큰 민족사적 공적은 무엇이라 보십니까?
-국방을 위한 노력이 아닌가 합니다. 임진왜란을 겪으시고 의병활동을 통하여 전쟁을 경험하셨으며 국방에 대한 인식이 더 확고해 지셨을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국방에는 화약확보가 난관이었습니다. 1610년(광해군3년)중국 사신으로 외교력을 발휘하여 화약을 두배로(3000근을 6000근으로) 수입할 수 있게 했지요.
-존애원 설립이 사족 중심의 향촌지배질서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 즉 하층민을 통제할 수 있는 하나의 방안으로서 사대부의 지배정책과도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구나! 당시의 시대상황을 안다면 이런 질문은 없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조선시대를 전체적으로 보면 사대부 중심의 사회임에는 틀림없지마는 존애원이 생기는 시기는 임진왜란(1592~1598, 우복의 경상도관찰사는 1598년)의 혹독한 피해를 당하여 구휼(救恤)이 시대정신이 되었던 시기 1602년이었습니다. 이때는 계층이 변화하여 노비가 상민으로, 상민이 양반으로 신분변동이 일어나기 시작된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임진란 막 끝난 시기는 농사를 여러 해 짓지 못하여 양식이 고갈되고 굶주림 속에 질병이 만연하여 인명을 구하는 일이 시급하였습니다. 어느 때보다 신분을 구분하기 어려운 시기였으며 임진란 공신록에 노비도 원종공신으로 많이 올라있습니다. 우복선생도 원종공신입니다.
-우복선생께서 오늘의 황폐한 세태를 보신다면 어떤 감정, 어떤 행동을 보여주셨으리라 생각하는지요?
-인간에게 최고의 선은 예절이라고 가르치시고 실천하신 분으로서 국가사회의 질서가 혼란하고 국론이 분열된 사태를 이해하시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임금님(仁祖)께 신하로서 충고한 사례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당시 궁녀 두 사람이 정식 절차를 밟지 않고 사사로운 통로로 궁녀가 된 일이 있었는데 이 일을 이명준이 상소를 올려 문제가 되었고 비변사에서 올린 회계(보고서)가 임금님의 뜻에 어긋났습니다. 이에 임금님이 대노하여 소문의 진원을 조사하고 매개 역할을 한 사람을 아뢰라는 어명이 내려졌습니다. 이에 온 조정이 두려움에 떨어 상황이 불안하게 되었으므로 우복선생이 군왕의 덕(德)을 논하는 다음과 같은 차자를 올렸습니다. “이처럼 하찮은 일은 본디 성상께서 노여운 소리를 낼 일이 아니었는데 근래에 내리신 하교가 갈수록 준엄해지셔서 신하로서는 차마 듣기 민망한 지경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비록 잘못한 바가 없지 않지만 전하께서 대응하시는 것도 이토록 지나치게 엄중하게 하시는 것은 마땅치 않은 듯합니다. 궁성의 금법(禁法)에 대해서는 바깥사람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헛소문이 있었다면 성상께서는 평온한 기운으로 ‘그런 일은 없다’고 하셨어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 해도 성인(聖人)이 아니면 허물이 있을 것이니 ‘마땅히 즉시 고치겠다.’고 하셨어야 합니다. (중략) 그런데 애석하게도 성상의 학문이 중화(中和)의 극진한 공부에 지극하지 못하시어 중도(中道)를 잃어 천하의 대본을 세울 수가 없을 듯합니다. (중략) 삼가 바라옵건대 이치를 살피시고 사물에 응할 때는 텅 빈 마음을 가지시고 억제하기 어렵고 발하기 쉬운 것에 대해 공력을 기울이소서. 그리하여 분노하는 기운을 구름 걷히듯 안개가 사라지듯 사라지게 하소서. 그럴 경우 지난번 대노하신 일을 생각하면 견딜 수 없을 듯한 후회스러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번 소문의 진원을 조사하고 매개자를 조사하라 하신 것은 명백하게 전교를 내리셔서 정지하도록 명하여 후회하면서 사죄하는 뜻을 시원스레 보여주소서.”
임금은 “차자를 보고 그 뜻을 알았다. 경의 임금 사랑하는 정성을 가상히 여긴다.”라 하였습니다. 이후 정국이 평온해지고 모두들 이 차자의 내용을 외우기까지 하였다 합니다.
-후손으로서 갖는 자부심도 크시지요?
-조선 중기 성리학이 최고조로 발전했을 당시 학자관료로서 최고의 권위는 홍문관대제학(大提學)과 예문관대제학을 겸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양관 대제학을 겸임한 인재는 영남 출신으로서 네 분이 있는데 1. 퇴계 이황선생, 2. 서애 유성룡선생 (이상 안동출신) 3. 소재 노수신선생, 4. 우복 정경세선생(이상 상주출신)입니다. 특히 우복선생이 대제학이던 당시는 영남세력이 집권한 시기가 아니고 기호의 서인세력이 집권한 시기이기 때문에 더욱 자랑스럽습니다. 우복의 차녀가 동춘당 송준길의 부인이고 그 외손녀가 숙종왕비 인현왕후이고 그 후로 명성황후도 그 혈통인데 이들 민씨 가문에서는 우복선생의 혈통을 받았다하여 우복선생이라 부르지 않고 우복할아버지라 불렀던 것을 보면 그 학문과 인품이 얼마나 훌륭하였던가를 알 수 있습니다.
- 존애원 기념사업회 사업계획이 궁금합니니다.
-존애원의 역사적 가치를 거양할 수 있는 사업기반 마련을 위해 디음과 같은 일을 하고자 합니다.
1. 존애원의 공원화 (자연녹지 공원건설 및 약재재배 단지조성 등)
2. 현대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의료사업 진작, (예; 한방의료원 건설 등)
3. 도덕적 인간문화 가치를 확산시키기 위한 교육사업 (선비정신수련 등 인성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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